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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묵상

이미 그러나 아직

by Ddak daddy 2026. 4. 10.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이십여 년 전 한국교회는 시한부 종말론으로 떠들썩하게 몸살을 앓았으며, 수년 전에는 마야력에 근거한 2012년 12월 종말론이 퍼지기도 했으며, 몇년 전에는 홍모 전도사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올바른 믿음 안에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하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종말론적 신앙은 개인적인 죽음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오늘이라도 당장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수 있음을 의식하고 오늘과 순간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이 기독교에서 애물단지 비슷했던 때가 많았었다. 그 이유는 정통 기독교 때문은 아니고, 이단들 때문이었다. 그동안 기독교 이단들은 종말론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종말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심리를 흔들어 놓았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서 착취하였다. 실례로 1992년에 있었던 ‘다미선교회’ 사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992년 수많은 사람들이 시한부 종말신앙에 미혹되어 임박한 날(휴거 날?)에 저마다 흰옷을 입고 한자리에 모여서 휴거되기를 기다렸다.(올라간다! 올라간다!)

그 날 경찰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많은 인원이 출동하여 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했지만 돌발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 당시 흰옷을 입은 무리들 틈에 있었던 어떤 사람은 다른 주변 사람들과 함께 휴거될 줄 알았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고... 침묵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눈을 떠 보니 “너도 있고 니도 있고 내도 그대로 있구나!" )

 

시한부 종말론의 결과를 보게 되면, 어느 특정한 시간에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가 있을 거라고 선동해 놓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게 만든 다음, 재림이나 휴거와 상관없이 성도들이 바친 재산을 가지고 잠적하기도 하고... 재림과 휴거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미 넋이 나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은 줄도 모르고 다시 정신 차리기도 힘들고... 이렇게 자꾸 종말론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당하니까, 기독교인들이 아예 종말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영어 표현은 “hide one’s head in the sand”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실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이 종말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삶의 현실을 도피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종말론을 모른 채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못 본채 하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만 마음에 그린다는 뜻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싶겠지만,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 당당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선포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선포한 이 세상의 현실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것이 이 세상을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절박하고 유일한 메시지였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이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동안 팔레스타인 곳곳을 다니면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대해서 전하셨으며, 예수님의 그 메시지에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우리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다. 그리고 점차 무명의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는 장면은 다름이 아닌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내용은 구약 요나서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였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이는 굉장한 임박성과 긴박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심판의 날이 사십일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 선포에 니느웨 사람들은 신속하게 즉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하였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였다.( 짐승들까지 자발적이었을까? )  그러나 현대의 교인들은 제자들이나 니느웨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애써 외면한다.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핍박한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나?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당하시고 미움 받으셔서 죽으신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이는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영어로는 “The present form of this world is passing away.” 이다. 이 세상의 현재 모습(형태)은 영원하지 못하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뜻이다. 잠깐 그 형태를 갖고 있을 뿐 곧 사라지고 말 거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토대로 다시 설명하자면, 결혼생활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내가 언제 결혼생활을 했는가 싶은 정도로 훌쩍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것도 잠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울고 기뻐하는 일의 근거도 결국 이 세상의 일 때문인데, 우리를 울게 했고 기쁘게 했던 그것들도 결국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매매하는 자들이나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 타고 있는 차, 그리고 우리가 아끼는 물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 그리고 사도 바울의 종말에 대한 교훈은 우리의 삶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요즘처럼 소비와 소유에 물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분명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여러 가지 말세 징후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약해지고 있고, 신앙과 믿음보다 지식적 종교성이 만연한 상황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 숨겨진 엘리야 시대의 칠천의 용사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세대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팽배해 있는 ‘감성적 영성’과 비성경적 종말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버리고 무기력한 모습과 세상을 등지고 있는 건강하지 못한 삶을 보게 되는 것도 작금의 현실이다.

 

‘감성적 영성’이라는 것은 오직 감각적, 초자연적 종교적 체험만을 강조하고 그것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의 신앙은 다양한 가운데 신앙적 체험보다는 이성적 지식적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또한 이와 반대로 성경보다도 신앙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영적 체험만을 강조하고 세상과 등을 지고 건강하지 못한 반쪽짜리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으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의 제한적 축복론을 강조하여 세상적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의 삶임을 강조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광야교회의 교훈은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현대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상적 악함에 대하여 영적신앙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믿음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수도적인 율법의 삶만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잘못된 종교적 신앙인들도 있으며 왜곡된 은사가 마치 성령께서 주시는 시대적 기름부음이라는 잘못된 신앙도 난무한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모든 영적인 것은 우리의 삶에서 좋은 열매로서 나타나야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함과 은사적 현상은 성도들을 건강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건강한 복음적 인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복음을 상실한 은사주의, 성공주의, 율법주의뿐만 아니라 잘못된 종말론적인 베리칩 등과 같은 시대적 현상들에만 집중하여 성도들이 누려야 하는 평안과 자유를 상실한 채 건강한 교회와 성경적 양육의 소중한 신앙을 등진 반쪽짜리 교인들이 많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666이 ‘베리칩“이라며 이것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전도하는 교회나 선교단체도 있다. 과거에는 666이 컴퓨터나 신용카드, 바코드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요즘은 ‘베리칩’ 주장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에 보면 666은 짐승의 숫자이며 사람의 수로 언급되어 있다(계 13:18).

 

"그 짐승과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고, 이마나 손에 표(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계 14:9-10, 표준새번역)

 

 

'짐승의 표'는 무엇인가? 영국의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의 저서에 의하면 '짐승의 표'는 고대 로마제국 안에 행해졌던 관행과 연관된 표현이다. 즉 향을 피우고 황제에게 경배하고 난 후에는 그것을 이행했다는 증표를 사람들은 받았다. 이 증표가 바로 '짐승의 표'이다. 이 표를 받은 사람은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었고, 로마제국 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상행위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계시록 13장에서 이 '짐승의 표'를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신앙을 버리고 황제를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장차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13장에 언급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요즘의 ‘베리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타락한 이 세상을 찬탈하고 있는 악한 세력에 동조하고 그 세력에 종노릇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임한 가운데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종말의 끝은 아니다. 종말의 끝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종말의 끝은 언제 올 것인가? 그날은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십년 후가 될지 아니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은 다음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며 그것은 아들(예수)도 천사들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신다.

1992년 재림론은 해프닝(?)이자 사기극으로 끝난 허구였고, 2012년 12월에 올 것이라는 종말론도 불발로 끝나고 말았으며 홍모전도사의 한국전쟁 발발 예언도 거짓 예언으로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는 말하기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끝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올바른 종말 신앙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려야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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