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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이스라엘의 미라주 전투기 탑 에이스

by Ddak daddy 2020. 3. 2.




이스라엘의 미라주 전투기 탑 에이스

 

 
                                   이스라엘 공군의 에이스 조종사 지오라 에벤.


 

 
                              지오라가 1967년 첫 격추한 수호이 7기.
지오라가 발사한 30mm 아덴 기관포탄 전부가 수호이 분사구에 빨려들 듯 명중하고 기체는 공중 폭발했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스라엘 산 샤피르 미사일 보다도 기관포 사용으로 적기를 격추했다.


 
                      지오라가  수호이 7 기의 후미를 잡는 장면이 있다.

 

 
2007년도에 방영되었던 히스토리 채널의 동영상으로서 앞의 것과는 달리 6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이스라엘 미라주 기들이 시나이 상공에서 이집트 수호 기들을 추격해서 격추시키는 장면이다

 

1947년 주변 아랍국들에게 둘러싸인 불리한 입장에서 아주 약한 국력으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독립선언이후 여러 번이나 민족의 사활을 건 전쟁을 했었다. 

지금은 국력이 강해지고 주변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변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대하는 폭력 국가의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지만 10월 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치를 때까지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과 크고 작은 생존의 싸움을 버티어내야 했다.

이스라엘 국방의 전위에 섰던 이스라엘 공군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보다도 그 국방에 기여했던 공로가 크다.

 

                                        미라주 3


 

그러한 공군의 공헌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스라엘 조종사들의 활약이 지대했다. 

이스라엘은 1947년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 전쟁 등 여러 전쟁을 치뤄서 적 전투기와 공중전도 많았는데 적기를 다수 격추한 에이스[적기 5기 이상 격추] 조종사들도 많았다.

 


  프랑스제 미라주의 이스라엘 생산 복제품인 네세르-아르헨티나에 수출되어 포크랜드 
전쟁에 출격 하였다.


그러나 아랍 권과 치열한 열전과 냉전을 거듭하는 동안 테러의 위협에 무수히 노출 되었던 이스라엘은 테러 가능성 때문에 그런 에이스의 신원을 다년간 비밀로 했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미 군사관계 잡지에서 이스라엘에 적기를 15 기 이상 격추한 에이스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상당히 궁금했었지만 더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랍 제국들과 관계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테러의 
위협도 줄어들자 점차 이스라엘 공군 에이스들의 신원도 공개 되기 시작했다. 

나는 몇 년 전 그동안 항상 궁금해하던 이스라엘 격추왕의 실체를 
비로소 아는 기회를 가졌다.

이스라엘 공군에서 1963년부터 1997년까지 34년간 근무했던 지오라 에번이라는 조종사인데 총 적기 격추 수는 17 기 이며
 격추한 적기는 모두 이집트 공군 기로 미그, 수호이 전투기들과 M-8 헬리콥터 등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전 최고의 에이스인 멕코넬 대위가 16 기, 
월남전의 에이스 리치 대위[공군]와 커닝햄 대위[해군]의 기록이 5 기 임을 새겨보면 대단한 기록임을 알 수가 있다.  



                       미라주의 천적 미그 21 비스형 [폴랜드 공군형]


그는 1938년 이스라엘의 시골에 위치한 네그바 키부츠에서 
태어나서 평범한 시골 어린이로 성장하였다.[키브츠는 협동형 집단 농장]

어린 시절 이름은 지오라 엡스테인 이었는데
 소년기 때부터 비행기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고 영국 전투기 에이스들의 무용담을 읽으며 조종사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수에즈 전쟁이 끝난 1956년 입대 가능한 나이인 18세가 되자 이스라엘 국방군[IDF]에 입대했는데 군 복무 중 조종사의 꿈을 이루고자 비행학교에 지원했지만 입학 신체검사에서 심장계통에 작은 이상이 발견되어 단념해야 했다. 

열이 오른 그는 대장에게 가서 비행학교가 불가능하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비행할 수 있는 공수 부대라도 보내 달라고 졸랐고 대장은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지오라는 공수부대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낙하 시범 팀[스카이 다이버 팀]에 선발되었는데
 덕분에 700회에 가까운 낙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스카이 다이버 대회에도 자주 참가했는데 그는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1959년 군의 보안 방침에 따라 성을 엡스타인에서 에벤으로 개명했다.[에벤이란 히브리어로 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정서나 개념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하여튼 그는 그 뒤 지오라 에벤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는 공수부대에서 3년간 잘 복무하고 제대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답답한 시골과 농사일을 참기가 힘들었고 결국 기회를 보다가 재복무를 신청해서 다시 군으로 돌아왔다. 


  
  

                               지오라가 조종했던 미라주 3 전투기



그러나 비행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던지라 군복무를 하면서 
다시 비행학교에 지원했다.[당시 이스라엘 공군에는 공군 사관학교가 없었고 단지 2년제 비행학교만 있었다.]

재차 시도한 비행학교 신체검사에서도 심장 계통의 
이상이 발견되었지만 이번의 군의관은 한편으로 그의 심장이 정통 훈련을 받은 직업선수 처럼 대단히 튼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일단 합격을 허락했다.

지오라는 꿈에도 그리던 조종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장애물은 아직도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동기 중에서 최우수 후보생으로 졸업했지만 다시 심장 계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전투기 조종사가 아닌 헬리콥터 조종사의 길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하면서도 전투기 조종사를 
향한 열정을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지오라는 기회를 봐서 미 공군 군의관이자 심장 전문의에게 그의 신체 검사 관련 모든 기록과 엑스레이 사진을 보냈다. 

한참 뒤에 그 미 공군 군의관에게서 그의 모든 것을 
다 검토했는데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발견할 수가 없다는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지오라는 의기 백배하여 이 회신을 들고 상부와 다투면서 
전투기 부대로 전출시켜 달라는 투쟁을 시작했고 갖은 장애물을 다 헤쳐가며 드디어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공군 참모총장 에제르 와이즈만 장군과 독대를 할 수있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야망과 그가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준 미 심장 전문 군의관의 소견서를 보여주며 필사적으로 전투기 부대로의 전출 희망을 피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의 경력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억지를 부렸다. 

“총장님. 총장님으로부터 확답을 받을 때까지 앞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를 달래서 돌려 보낸 와이즈만은 밤새 숙고해보고 다음날 
지오라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 이 골치 아픈 놈! 당장 보따리를 싸서 전투기 부대로 떠나! 
그리고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에제르 와이즈만 총장. 나중에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전투기 조종사가 될 때까지 그는 수 없는 난관과 싸우며 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지오라는 조종 훈련생 때부터 너무 시력이 좋아서 
매눈[HAWK EYE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 24마일의 원거리에서도 적 전투기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전투기 레이다 탐색 거리 밖에 있는 적기도 발견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보통 조종사가 8내지 12마일 거리에서나 적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비하면 그의 시력은 두 세 배 좋은 것이었다. 

지오라는 1963년 대망의 전투기 조종사가 된 뒤에 
여러 전투기들을 조종하였다.

다쏘 우라강, 슈페르 미스테르, 그리고 
미라주 3 C 등의 프랑스제 전투기를 조종했고 미라주의 이스라엘 생산 복사품인 네세르와 미라주 파생품인 크피르 전투기도 그의 손을 거쳤다. 


  
 

                     미라주 전투기에 격추 당하는 이집트 공군 미그 21기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적기 17 기를 격추한 이스라엘 최고의 에이스였다.

그가 격추한 첫 이집트 공군기는 수호이 7 기로서 6일 전쟁이 
발발했던 1967년 6월 6일 시나이 반도의 엘 아이리쉬 시 상공에서 거둔 것이다.


    

                        이스라엘의 미라주 파생형 - 크피르 전투기


이스라엘에게 대패했던 이집트의 나세르가 시도했던 
1969년-1970년 동안의 마멸전쟁[WAR OF ATTRITION]에서 미그 17 기 한 기와 수호이 7 기 한기, 그리고 이집트 최신형 미그 21 기 두 기를 격추하였다.

17 기 중 12 기는 1973년 발발했던 욤 키프르
 전쟁 때 거둔 전과인데 놀라운 점은 그 12 기 중에서 8 기를 단 26 시간 동안 격추했다는 것이다.

추측해보면 그가 최대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이집트가 개전 직후 
기습의 우세함을 활용하기 위해서 전투기 부대를 대량으로 동원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호이 7


 

개전 3일 동안[1973년 10월 18일부터 20일 까지] 그는 M-8 헬리콥터와 9 기의 적 제트 전투기를 격추하였는데 격추한 전투기는 수호이 7 기 2대, 수호이 20 기 2대, 미그 21 기 4대들이다.

그리고 1973년 10월 24일 그레이트 비터 레이크 상공에서 3기의 
미그 21 기를 격추해서 토탈 적기 격추수를 17기로 늘렸다.  

 


                                         미그 17 기


그가 거둔 전과 중 8 기는 미라주 3로 거둔 것이고 
나머지 9 기는 미라주 5 기의 이스라엘 생산 복제품인 네세르로 거둔 전과이다.[모두 델타(삼각) 날개의 전투기들이다.]

전후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무공훈장인 메달 오브 아이디얼 
훈장을 수여 받았는데 이 훈장은 한국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에 해당한다. 

그는 미라주 전투 비행단장과 크피르 전투 비행단장을 역임했었고 
1988년 대령 계급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1997년까지 현역과 예비역으로 이스라엘 공군에 복무했으며 
그의 60세 생일날 F-16 조종을 끝으로 조국 수호의 일선에서 은퇴를 했다.



출처: http://mnd-nara.tistory.com/791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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