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 카빈
옛 예비군의 동반자. 통칭은 칼빈. 왜 카빈이 아니고 칼빈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아무도 카빈이라고 부르지 않고 군이든 사회든 가리지 않고 모두 칼빈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r이 묵음이 아니라서 카얼빈 혹은 카르빈 비슷하게 들린다. 때문에 맞춤법 표준안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다들 칼빈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적을 때도 대개 칼빈이라고 적었다. 따로 항목이 개설된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만 해도 당시에는 전부 칼빈 강도사건 혹은 칼빈총 강도사건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예전 드라마 수사반장에서도 저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에피소드 제목이 칼빈총 강도였다. 때문에 M1 카빈을 직접 만져본 연령대의 경우 어지간한 총덕이 아니면 지금도 칼빈이라고 해야 알아듣지 카빈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M1 또한 마찬가지인데 M1은 과거 M1 개런드를 부를 때 부를 때 쓰던 통칭이고 M1 카빈은 칼빈총 또는 그냥 칼빈이라고 불렀다. 카빈에 M1, M2 하는 식으로 제식 번호가 붙는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M1 Carbin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반자동소총. 이름이 M1이지만, 그 당시 주력 제식 소총으로 쓰던 M1 개런드 소총의 카빈 버전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설계된 카빈이다. M1 개런드를 단축하여 카빈화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으나 이 총이 개발되자 무산되었다.
애초부터 일반적인 보병 부대가 아니라 후방 부대나 운전병, 전차 승무원, 조종사등의 호신용 무기로 개발된 총으로 현대의 FN P90같은 PDW에 가까운 개념으로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들의 무장을 권총이나 톰슨 기관단총으로 하려 했으나, 권총은 사거리가 짧고 톰슨은 너무 크고 무거웠고 결정적으로 너무 비쌌다. 때문에 카빈이 서둘러 설계, 제작 되었다. 개발에는 채 6개월도 걸리지 않았지만 제작사인 윈체스터 사는 기존에 있던 반자동 엽총 Model 1907을 원형으로 철저하게 검증된 기술을 사용하여 개발시간과 비용을 단축시켰고 군 입찰을 위한 공개 테스트에서 경쟁사 총기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어 제식화에 성공했다.
총 자체가 당대의 기관단총보다 훨씬 가벼울 정도로 엄청나게 가볍고, 장탄수도 많으며 반자동 사격이 되고 고장도 매우 적었다. 원래 설계가 자동 사격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방아쇠를 빠르게 당기면 자동소총 못지않은 빠른 발사 속도도 낼수 있었다. M2 카빈은 실제로 자동 사격이 가능해 비싼 톰슨 기관단총을 일부 대체하기도 았다. 때문에 공수부대나 일반 보병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거기에다 제작비도 M1 개런드의 반 이하. 결국 이래저래 개런드보다 더 많은 생산수(총 600만 자루)를 자랑한다.
카빈을 위해 개발된 탄환 .30 Carbine은 M1 개런드와 구경은 같으나 형태는 소총탄보다는 권총탄에 가깝고 발사시 특성도 권총탄에 가깝다. 원래 코요테나 여우 정도의 소형동물 수렵용 탄인 .32 Winchester Self-Loading를 림리스화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개런드와 구경을 같게 했을 뿐인 것이다. 실제 위력도 중소형 사냥감 정도를 잡는데 적당하며, 사슴 사냥용으로는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사용하는 탄이 7.62mm라고 하니까 AK-47 등의 AKM 계열 돌격소총과 같은 카트리지를 쓰는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카빈의 카트리지는 7.62x33mm로 아담한 총탄이고(웬만한 권총탄보다 좀 큰 정도) AK의 카트리지는 7.62x39mm로 이보다 훨씬 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널리 쓰였고 이래저래 명성이 높은 총기지만, 한국에서는 못 믿을 총 취급. 한국전쟁 당시엔 도망가는 중공군이 이불(바리에이션으로 방한복도 있다.)을 뒤집어 쓰고 도망가는걸 사격했으나 그냥 계속 도망갔다는 전설도 있다.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중공군의 방한복(방탄복이 아니다)조차도 원거리에서는 뚫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견이 많이 접수될 정도였다. 소총 등의 제대로 된 보병용 화기가 미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중공군이 그냥 소총 사격을 무릅쓰고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는데 이걸 M2 카빈으로 저지할 수가 없다는 것. 게다가 장진호 전투 등에서는 혹한으로 인해 카빈 카트리지와 카빈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으며, 실제로는 카빈탄이 겨울옷을 못 뚫는 게 아니었다. 자동사격으로 제압(suppress) 효과를 보려면 상대가 총에 맞을까봐 두려워해야 하는데, 중공군 돌격대는 독한 술을 잔뜩 먹여 제정신이 아닌지라 총탄을 퍼부어도 별다른 제압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미군 자신이 중공군에게 심리전에 제압이 된 경우도 있었던 것. 물론 좀더 가까운 거리라면 M2 연사로도 어느 정도 명중률이 나오지만, 척탄병은 대충 50야드(45미터) 이내로만 접근하면 수류탄을 던져넣을 수 있는 개싸움의 영역이니 팔자 좋게 사격전이나 할 수 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중공군이 카빈탄을 맞고도 버티는 것이라 오인한 미군은 좀더 강력한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전투소총을 개발하게 되고, 이것이 비운의 제식소총인 M14 소총이다.
하지만 근거리에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명중률이 확보되는 근거리에서 적과 조우할 경우 연사는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야간 정찰에서 수색대가 장비하는 M3 카빈이 대활약했는데, M3는 M2에다가 적외선 스코프를 증설한 물건으로 어둠을 틈타 중공군에게 접근한 후 연사로 일망타진하는 작전이 큰 효과가 있었다. 물론 오늘날 미군이 사용하는 야시경은 당시엔 꿈도 꿀 수 없는 물건이었기에, 분대 중 한명은 자동차 전조등만한 크기의 적외선 램프가 달린 M3를, 나머지는 길다란 망원경처럼 생긴 적외선 스코프가 달린 M3를 소지하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M3는 겨우 2000여정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미군의 야간 작전의 기틀을 마련한 소총이다.
다만 전설적인 장진호 전투 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초에 추운데서 쓰려고 만든 총이 아니였던게 컸는지 카빈이 죄다 맛이 가서 병사들이 카빈을 내다버리고 어떻게든 개런드를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탄약 자체가 권총탄급으로 작약이 적은데다가 일단은 소총인지라 찬바람에 계속 노출되다보니 총을 격발하더라도 제대로 화약이 전부 타오르질 않고 불완전 연소되다보니 작동을 위한 가스압을 제대로 못만들었기 때문. 개런드같은 소총탄을 쓴 무기들이야 어떻게든 딱 한발만이라도 발사하고 나면 화약이 워낙 많으니 최소한 차탄을 쏠만큼의 가스를 만들수 있었고 총기도 좀 데워지므로 몇발 쏘다보면 적어도 전투중에 맛이 가는 일은 적었는데 이놈의 카빈은 정상적인 작동을 할정도로 총을 데우기 위해 필요탄 격발수가 많았고 겨우 데워도 금방 식어버리면 또 그짓을 반복해야했다. 뭐 장진호 전투는 기관단총도 사이좋게 맛이 가는 경우가 많았고 기관총이나 소총도 가끔가다 몇발 쏴서 데워줘야 했을정도로 막장이였으니 이해 할 만 하지만 그건 딴사람들 이야기지 당사자인 보병들 입장에선 자신의 생명을 지켜줘야 할 소총이 중요할때 맛이 간 걸 본 미군들은 악평을 쏟아낼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AR-10대신 M14가 채용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작은탄환은 극한 상황에선 쓸모 없다는 이미지가 생겨버린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론 미군이 추운데서 싸운적이 없다는거...
남한의 빨치산에서도 카빈은 약하다고 해서 주력 전투병들에겐 개런드를. 여성 같은 후방 인원에게 카빈을 지급했다고. 이 때 찍힌 이미지는 한국군에서 없어지지 않아서, (M16을 사용하기 시작한) 베트남전 때까지도 병사들이 카빈보다 M1 개런드를 더 선호할 정도였다. 물론 권총탄 중에서 손꼽게 강력한 탄인 .357 매그넘보다 1.5배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가진 탄이므로 무시하는 것도 곤란하다. 5.56mm와 운동에너지가 동급이라 사거리 내에서는 대인용으로는 충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한동안 생산되었고 M16이 보급되기 전, 베트남 전쟁 초반의 미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무거운 M14 소총보다는 도리어 카빈을 더 즐겨 가지고 다녔다. 의외로 M16 보급 이후에도 들고 다닌 사람이 많은데, M16보다도 훨씬 작고 가볍기 때문에 총기류의 선택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썼다. 게다가 이보다 더 작고 가볍게 마개조한 단축형 물건도 있는데, 총열을 거의 잘라내다시피 하고, 개머리판도 접철식으로 달아서 거의 팔뚝만한 길이로 줄인 경우도 있다. 장거리 정찰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등이 썼다. 걸프전쟁 당시 다국적군 사령관이었던 미 육군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이 베트남 전쟁 때 들고 다니던 카빈의 사진을 보면 거의 권총(...) 수준으로 잘라내 마개조 한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에서도 1972년부터 2년간 강도살인 행각을 벌인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의 두 범인이 훔친 M1 카빈을 이렇게 잘라서 사용했다. 위 덮개까지 떼어 버리고 점퍼 속에 감추고 다녔다고.
간결한 구조에 확실한 신뢰성, 가벼운 무게, 오염에 강한 점 등으로 인해 민간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지금도 팬이 많은 총. 이 때문에 공여 기간이 끝나 대한민국에서 회수된 카빈 중 상당수가 미국 일반 총기 시장에 풀렸고 지금도 한국 예비군 번호표가 붙은 카빈을 중고 총기 시장에서 곧잘 볼 수 있다. 참고로 이건 M1 개런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국군도 한국전쟁 이후로도 베트남전 종전 때까지 꾸준히 사용되었고, 2014년까지 예비군, 특히 향토예비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또한 북파공작원이 신뢰성과 휴대성이 좋다는 이유로 M1 카빈을 들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64식, 89식 소총등을 만든 호와 공업이라는 회사가 이 M1 카빈을 라이선스 생산하다가 1960년에 M1 카빈을 모델로 호와 M300이라는 자국산 민수용 엽총을 개발했다. 탄창은 총포 도검류 소지단속법 때문에 5발들이 탄창을 끼워팔지만 M1 카빈과는 같은 .30 US Carbine 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탄약 호환은 물론 불법이지만 카빈용 15발, 30발 탄창도 호환된다.
미국에서도 2차대전 당시의 명총이라는 이미지와 .30 카빈 탄의 저반동 덕에 민수용 화기로 수요가 있는 편이다. 거기에 구조상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라곤 후기형의 착검 장치 정도뿐이라 민수용으로 지금도 생산되는 것은 물론 카빈용 레일마운트와 폴리머 스톡 같은 옵션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1950년부터 1966년까지 M2 카빈을 국산화한 버전인 "산 크리스토발 M2 카빈"이라는 물건을 만들어 도미니카 공화국군 제식으로 굴린 적이 있다. 다만 도미니카 국산이라지만 정작 개발자는 헝가리 출신이라는 게 함정(...). 오리지널 M2 카빈과 비교하여 다른 점은 내부 구조와 오리지널보다 좀 더 느린 발사 속도(분당 580발). 쿠바에도 수출되어서 체 게바라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동상에서도 이 총을 들고 있다. 1990년경에 2선급 장비에서도 완전히 퇴역.
6.25 전쟁에서 쓰였으며 적외선 야간투시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다. 미군의 야간정찰 작전에서 중공군과 교전하는데 큰 효과를 봤다고 한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폭동진압 및 치안유지 목적으로 경찰에 M1 카빈을 지급한 것이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의 M1 카빈 보유 시초다. 그런데 정작 국방경비대 및 그 후신인 대한민국 국군은 카빈보다는 M1 개런드의 지급이 더 순조로웠는데, 단적으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연대의 총기 인가량은 M1 개런드 약 1,300정에 M1 카빈이 1,200정으로 거의 대등했으나 실제 보유량은 대부분의 연대에서 M1 개런드가 그나마 더 많고 카빈은 인가량보다 600정 이상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일정치는 않아서 어떤 연대는 M1 카빈이 더 많고 어떤 연대는 M1 개런드가 더 많은 등 들쭉날쭉이었지만, 전반적으로는 M1 카빈이 더 부족했다. 이는 특히 한국 육군의 연대 및 사단이 미군의 동급 부대에 비해 지원부대가 1/3 이하인 등 빈약한 부대였던 탓이 컸다.
그러다가 6.25 전쟁 발발 이후 부족분은 대부분 미군의 군사원조를 통해 충족되었고, 급격한 확장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는 거의 50만 정에 달하는 M1 카빈이 한국군에 공급되었다. 특히 M1 카빈은 하사관 및 장교용 개인화기, 그리고 각종 지원화기 운용병력의 개인화기로서 지급되었기 때문에 미군식의 묵직한 편제로 군이 대폭 확장된 1952년 이후가 되면 M1 개런드보다도 더 많은 숫자가 공급되어 실질적으로 한국군 및 민간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소총이 되었다.
이후 베트남 전쟁 파병을 거쳐 M16이 대량 도입되면서 M1 개런드와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단시간에 국군의 일선에서 퇴출되었으나, M1 카빈 및 M2 카빈은 가벼운 무게와 높은 휴대성으로 말미암아 약간 더 오랫동안, 주로 특수부대 및 각급 지원부대를 중심으로 해서 운용되었으며, 이마저도 M16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사실상 대체 직후 곧바로 치장장비가 되어 창고에 처박힌 채 썩어간 M1 개런드와는 달리 향토예비군의 주력 소총으로서 지속적으로 운용이 되었다.(2015년부터 M16)이 때문에 M1 개런드용 탄약 및 각종 소모품은 1970년대에 이미 생산이 정지되나, M1 카빈용 소모품과 탄약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생산이 유지되었다.
또한 경찰은 1980년대까지 M1 카빈이 주력 소총이었다가 1990년대부터 K2 소총 및 M16 소총으로 카빈을 신속히 대체해서 이제는 M1 카빈을 운용하지 않는다. 특히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강원지방경찰청의 보유 소총은 대부분 카빈이었는데, 사태가 급박해 경찰청에서 강원청 산하 카빈들을 M16을 건너뛰고 한방에 K2들로 교체하며 카빈이 굉장히 빨리 사라졌다. 현재 경찰이 보유하고 있던 M1 카빈은 본래 육군의 M1 카빈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군사원조품목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군의 재고와 통합해서 향토예비군 장비로 편입되었다.
예비군 사용기
한국군은 M1 카빈을 수십만 정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어, 2014년까지는 이를 주로 예비군의 개인화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은 향토예비군 분대 단위에서 분대지원화기로 M16(...)을, 나머지 기본화기로 M1 카빈을 사용하는 방식. 보통은 예비군 4~5년차로 향토예비군에 편입되면서 사용하게 되나, 거주지역에 따라서는 최초 동원예비군 훈련 때부터 향토예비군으로 편입되면서 M1 카빈을 사용하게 되거나 동원미지정훈련 때 사격 훈련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일단 예비군 사용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K2나 M16에 비해서 훨씬 가벼워서 들고 다니긴 편하지만, 탄창 지급이 잘 안 되어서 한 발씩 장전해서 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모 예비군 훈련 교관 말에 의하면, 탄창이 너무 낡다 보니 스프링이 다 삭아서 탄을 밀어올리지 못하므로 장전이 안 된다나 뭐라나. 지급받은 카빈의 방아쇠 뭉치와 총몸 간의 유격이 너무 커서 탄창이 탄을 밀어올려도 장전이 안 되어, 사격훈련을 받는 예비군이 탄창을 왼손으로 받치고 사격 조교가 장전손잡이로 장전해주는 아름다운 2인 1조의 하모니로 사격 훈련을 했다는 말도 있다. 아니, 20개 사로 중 1/3 이상이 이런 상황. 1발 쏘고 장전손잡이 당기고, 쏘고 당기고 하는 경우는 저것보다 훨씬 더 흔하다. 또 사격 훈련 시 단발인데 연발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부품(단발자)이 마모되어 일어나는 현상이고, 종종 단발로 개조한 M2가 섞여 있는데 이게 그냥 연발로 나가기 때문. 총열 위 덮개 나무가 떨어져 나가는 건 다반사. 사격 시 화려하게 튀어올라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례가 굉장히 많다. 덤으로 좀 험하게 굴린 물건들의 경우 목제 부품들의 코팅 등이 벗겨지고 나뭇결이 거칠게 일어난 경우도 있어서 별 생각 없이 만졌다가 손에 가시가 박히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크게 다치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경험이라고(...)
쏘아 보면 반동은 M16이나 K2에 비해서 약간 적은 편이지만, 권총손잡이가 없고, 왼손 쪽도 파지하기 어설퍼서 발사시 총기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고 튀는 느낌이다. 그런데 비해서 탄착점은 잘 모이는 편. 성과제 조기 퇴소제가 적용된 현재, 지름 9cm의 원 내에 탄착군을 다 모으는 사람이 과반일 정도. 육군이나 해병대 병장 전역한 예비역이면 이 정도 사격 실력은 당연한 거지만제대로 쏜다면 말이지, 명심하자. 이 총은 2차대전, 6.25 때 굴러먹다가 예비군 물자로 질질 끌고 다니던, 단발식 소총 이하의 연사력을 지닌 골동품이다. 충공깽. 최대 문제는 환갑이 넘은 노후한 조준 기구들 때문에 겨냥이 제멋대로인 점이다.
카빈용 소모품은 1992년까지는 생산이 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생산되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현재까지 한국 국내에서 꾸준히 생산되는 카빈용 소모품은 탄약뿐이며, 그나마 탄약을 군용으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조사의 해외 수출용 스포츠 탄약을 재포장해서 군에 납품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예비군에서도 카빈은 퇴출 되었다. 이미 생산한 탄 재고는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카빈은 신뢰성 높고 고장이 적을 뿐, 전시에는 향토예비군도 현역용과 탄환이 호환되는 M16이나 K2를 받을 것이다. 동원예비군은 전시에 부대로 복귀하니 당연 K2, K1을 쓰게 된다. 동원훈련 시즌이 끝나고 나면 몇 정씩 부숴서 나무 부분은 그냥 타는 쓰레기로 버리고 금속 부분은 분해해서 부품용으로 쓴다.
실제로는 가볍고 다루기 쉽고 신뢰성있고 잘 맞기까지 하는 명총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접하는 카빈은 이렇게 골골대는 노인이나 다름없는 오래된 카빈만 예비군 훈련장에서 접하게 되는 통에 그저 고물로만 인식하고 있다. 사실 몇십 년간 써먹은, 최소한도로 잡아도 20대 중반 이상인 사용자들의 아버지들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 총이 정비도 제대로 받지 못 했는데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무진장 대단한 거다.(...)
고등학교 시절 "교련"이라는 과목을 이수한 적이 있는 중년 남자라면 이 총을 가지고 총검술 및 집총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실총으로 총검술 대련을 하다가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대개는 플라스틱제 모형총으로 연습을 하고 실총은 1년에 두 번 정도 만지게 된다.) 심지어 유신 시절 고등학생들은 개인화기 조립/해체 훈련까지 받았다(...). 때문에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남자고등학교에는 실총이 보관되어 있는 "무기고"가 있었다. 당시에는 예비군 장교가 학교에 상주하면서 교련 수업을 지도하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여러 회사들이 카빈을 생산했다. GM(제너럴모터스)의 비자동차 사업부인 Inland Division을 비롯해, 쓰레기통 깡통 만들던 Rock Ola라는 회사도 있다. 제조회사명은 가늠자 근처 상단에 음각으로 새겨져있는데, 예비군 훈련 때 총신에 쓰여 있는 각인을 잘 보면 의외의 상표명이 가끔 보인다. 바로 IBM. 2차 대전 당시에는 컴퓨터 회사가 아니라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라는 풀네임 그대로 사무기기, 즉 타이프라이터 같은 것을 만들던 회사였고, 총기 제조와 공통점이 많은 그 생산 라인을 개조하며 총기를 공급한 것이다. 잘 보면 각 제조 회사별로 나무 부품 모양이나 장전손잡이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물론 호환은 거의 된다.
현재 M1카빈은 도태장비로 분류되어 예비군 향방기본훈련에서도 M16A1을 사용한다. 2014년 중반에도 예비군이 여전히 카빈을 쓴다고 까는 기사가 난 이후 국방부에서 공식적인 교체 계획을 발표했다. 현역들에게 풀리는 K2C1 소총으로 M16A1을 예비군으로 밀어내기 해서, 2017년 즈음에는 M1 카빈은 예비군에서도 전량 퇴역하고 예비군용 소총은 전량 M16A1 혹은 K2로 대체될 예정이다.
이 총의 개발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빗 마셜 윌리엄스는 이 총의 개발 당시 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가 총의 개발로 명성을 얻고 가석방까지 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달라서, 데이빗 윌리엄스는 20세 때인 1921년 보안관을 살해하고 2급 살인죄로 수감, 1931년에 석방되었다. 이 기간 중 데이빗 윌리엄스는 노동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권총 및 기관총 설계 특허를 몇 가지 냈다.
이후 그의 기술을 적용해서 윈체스터 사의 총기개발자 에드 브라우닝(존 브라우닝의 동생)이 훗날 M1 카빈의 원형이 되는 .30-06구경 M2 소총을 설계하던 중 이 총의 설계를 마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러자 윈체스터 사는 데이빗 윌리엄스를 채용해서 소총의 설계를 마무리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탄약의 변경과 육군의 신형 카빈 채택이 이뤄진 것이다.
요약하자면 데이빗 윌리엄스가 카빈의 개발로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나, 그 덕분에 석방된 것은 아니다. 이런 소문이 돈 것은 데이빗 윌리엄스의 인간승리 스토리가 1952년에 적당히 각색되어 영화화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탓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호바스 중사가 M1카빈을, 라멜에서의 제101공수사단대원중 일부는 접철식 개머리판을 쓰는 카빈을 사용한다. 영화 윈드토커에서도 자주 보이는데 나바호족 통신병 벤 야지와 찰리 화이트호스가 주로 사용했다.
1972년~1974년 사이 활동했던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의 두 범인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3정을 탈취해 범행에 사용하였고, 최단기간내 다량학살 용의자 우범곤이 탈취해 사용한 총기가 카빈이었다. 사실 범행에 사용한 모델은 M1은 아니고 M2 카빈, 물론 조정간이 존재하지 않는 모델이다. 그 이외에도 양구 다방 인질극 사건을 비롯, 군경의 카빈을 탈취하여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여럿 있다.
M1 카빈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 당시의 별명은 '아기 개런드였다.
2015년 12월 토이스타에서 M2탄창을 장착한 버전의 중국산 에어코킹건 모델을 수입해 국내 발매했다. 12월 15일 경 출시되었으며, 10만원 미만의 가격이지만 가성비는 좋은 편이다.
2차세계대전때 사용된 카빈들과 한국전때 사용된 카빈은 차이점이 있는데 2차 세계대전동안 사용된 카빈들은 총검장착대가 없으며 색도 진한색이며 가늠좌 조정이 불가능하고 슬링고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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