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 장세훈
성경읽기와 성경해석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어떠한지를 가늠하는 표본이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해석은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선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며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예언서가 과연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답은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평안함과 축복의 말씀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교회가 이사야서의 첫 장을 읽고 해석할라 치면, 우리의 선배인 구약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석인 책망에 계속해서 읽어나가기란 정말 힘든 고역이다. 그래서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역사 속에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시대 속에서 다시 울이지 못하게 덮어버리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듣지 못한다. 왜일까? 의도적인 유기인가? 아님 부주의한 태도인가? 우린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불의로 막고 거역하고 있지는 않는가? 개인과 공동체 속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 우리의 귀를 막고 있는 것인가? 말하고 있는 나팔을 막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예언자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께서 세우신 강단 곳곳에 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참회하게는 예언자의 말씀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의도성이고 둘째는 부주의 함이다.
의도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있는가? 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그것이 여전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토라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며, 나를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담의 피가 내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의 한계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한계이며, 절대자 앞에 귀의하기 싫은 악마의 종자로서의 한계이다. 하나님의 무궁하신 자비와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적 형식과, 외형적 섬김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화 한다고 비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가 필자가 겪는 개인의 절망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도성을 가지고 예언자의 말씀을 곡해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예언자의 역사성을 곡해하고,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지 못하도록 이사야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부주의함 이다. 이것은 지혜의 문제이면서 또한 기술의 문제이다. 또한 시대의 아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성경은 역사와 상관없이 시대의 정신과 무관하게 해석되지 않았다. 왜냐면 그 시대가 주는 해석학적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 장세훈 교수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다양한 해석학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어는 해석학적인 틀을 가지고 이사야서를 읽느냐에 따라서 말씀의 뜻이 각각 다르게 선포되어 진다. 이사야서가 지금 우리에게 울리는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록되어진 성경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가 의도한 가장 중요한 해석적 원리는 이사야의 통일성이다. 지난 세기 동안 이사야는 낱낱이 찢기어졌다. 다양한 이유에서 이사야서를 찢음으로 통일된 의도성이 없는 낱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장세훈 교수는 이것은 “역사비평의 희생양, 이사야서”라고 말한다. 통일된 의도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럼 그것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시 울리게 할 수 있는가? 분리된 나팔을 가지고 어떤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보안하기 위한 다양한 해석학적인 방법들을 학자들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있다.
몇 가지 방식으로 이사야서의 해석학적인 틀이 있다. 전통적인 방식, 편집비평적인 방식, 정경적 접근 방식, 문학적 접근 방식, 이데올로기적 접근 방식, 주제적 접근 방식이다.
저가가 그러했듯이 이런 다양한 해석 방식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문제는 현재의 독자나 해석자는 이런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함으로 균형 잡힌 해석학적인 안목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편집비평적인 해석은 원선지자의 의도에 치중하지 않고,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편집자의 의도와 그의 신학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서가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문서로 편집되었는지, 의도와 목적과 공동체의 관심을 탐구하여 해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편집의 의도와 신학을 규명하는데 핵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편집자의 의도와 원저자의 의도를 구별함으로 본문의 전자의 의도와 편집자의 의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어려움이 있지만, 이사야서의 통일성을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을 통하여 통합된 신학적 결론에 내려는 해석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이사야서가 그렇게 구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의 의도보다, 그들의 공동체의 종교적 신학적 배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집비평을 통하여 이사야서 그 말씀이 선포되었던 원 독자의 상활을 조합함으로 이사야서의 통일된 사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결국 지금 이차 독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전하는 선지자의 음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경적 접근 방법은 편집 비평적 작업 이후에 이사야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맥락에서 통일성을 찾고자 하는 작업이다. 교회가 어떻게 이사야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는가는 이사야서에 대한 권위를 강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객관성을 강조함으로 원독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그들의 말씀의 입장을 충분히 해석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문학적 접근 방법은 역사적인 재구성의 방법론을 탈피하여 본문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즉 원저자의 의도보다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문학적인 틀을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원저자는 문학적인 틀을 가지고 자신의 의도를 말하려 하였기 때문에 문학적인 이해를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은 본문 자체의 수사적인 구조, 문법적인 구조, 언어학적인 측면을 탐구하여 본문의 통일성을 찾는 작업이다. 이렇게 본문 자체의 문학적이고 문법적인 구조를 탐구하다보면, 역사적인 측면을 소흘리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본문의 text 로 말씀하시지만, 그 text 는 결국 역사와 문화의 환경과 배경 속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법적이고 수사적인 해석적 방식은 1차적으로 본문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수사적 기교를 사용한 저자에게는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해적은 본문에 암시된 여러 사회 계층들의 구조와 갈등 사회 문제 등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규명하고, 본문에서 무시된 이야기를 재발견하여 현대 독자들의 정활 속에서 어떻게 해석할지를 찾는 작업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언어적 표현과 기술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과 정황에 대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본문 자체의 의도보다 본문을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통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마치 그 때 그들의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의 중간에서 이사야를 보려는 시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있는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함으로 이사야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의 말씀으로서의 해석을 이데올로기가 막고 있지는 안는지 생각된다.
주제적 접근방식은 저자에 대하여 집중하기보다, 본문에 흐르고 있는 중심 사상을 파악하는 해석 방법이다. 따라서 편집자의 의도나, 저자의 수사적 표현보다는 본문에 나타난 중심 주제, 중심 신학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해석 방법은 마치 교의 신학적인 해석작업인 듯하다. 즉 이사야서의 몇 가지 중심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중심 주제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중심 주제라는 해석학적 열쇠를 통하여 이사야서의 통일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한눈에 통일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학자들의 이런 해석학적 노력은 결국 이사야서가 통일성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의미 화된 적용된 말씀으로서의 기능이 다소 덜 한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역사의 재구성을 넘어서 지금 우리의 시대에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바론 이런 성경 해석의 필요성을 저자는 다양한 이사야 해석 방식을 논함으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사야서의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배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주어진 본문을 숙독할 때 파악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역사비평은 우리에게 이미지화된 의미를 해석하기 보다는 원 자자의 의도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따라서 그 때 그 당시의 정황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본문을 과거 속에 묶어두는 위험이 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읽혀지고, 의미화 되고, 적용화 되어야할 지금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사야서가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의미 화된 글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 즉 문학적인 관점, 신학적인 관점, 함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자는 이 세 가지 방법은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문학적인 방법은 원자나, 편집자의 의도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의 저자는 이런 문학적 틀과 기교를 사용해서 무엇인가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인 작업은 원자자가 원 독자에게 의도하였던 그들의 이야기를 찾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문학적인 틀을 사용함을 찾는 것이다.
문학적인 해석 방법은 현대의 독자들이 최종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일는지 관심을 기울인다. 왜냐면 본문의 의미는 본문 밖에 존재하지 않고, 본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학적 접근 방법은 완결된 본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문학적 접근 방법의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이사야서의 병행구조를 통한 본문의 이해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은 독자가 본문 자체 안으로 들어가서 본문의 수사적, 문법적 의미를 파악하고 본문의 상화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통일성을 찾아야 한다.
신학적인 관점은 인간저자를 사용하여 무엇인가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무엇인가 요구하고, 필요한 것을 인간 전자를 통하여 전달하신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저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바로 이 작업인 신학적인 작업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곧 바로 기록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전달되어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이사야의 신학적인 이해의 틀로서 신학적 통일체로서의 이사야서라고 언급한다. 즉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사상은 다른 신학적인 개념들과 상호 관계를 이루며 이사야서의 중심 사상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하는데, 첫째는 불의한 백성을 심판하는 자로서, 둘째로 시온의 회복자로서, 셋째는 제2출애굽의 구속자로서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한다.
함의적 관점에서 이사야서의 이해는 현대의 독자의 입장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이사야서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즉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창이 되게 하는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거울이 되게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성경신학자는 그 때 그 시대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고,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배경과 다른 우리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 본문의 의미와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우리의 시대 속에 적용시켜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명백하게 드러난 의미뿐만 아니라, 드러난 의미 속에 감추어진 의미 -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감추어진 의미가 아니라, 그 시대에는 없었던 삶의 환경으로 말미암는 새롭게 적용되는 의미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사야 1장에서 그들의 제의적 부패와 도덕적인 타락의 선포가 지금 우리에게 선포되어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의 제의적 부패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 시내산 언약을 맺은 선민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들의 부패한 종교성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1장에서 우리에게 함의되어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성과 독특성을 유지하지 못할 때는 존재의 이유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게 집행되어진다. 그들도 그렇게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심판은 그들 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도 이루어 질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토라는 보는 창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고로 우리에게도 이사야가 성전에서 경험한 죄 사함의 경험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시고, 다시 이방의 빛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회복시키시는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절망과, 이사야의 소망을 함께 보는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서의 함의적 의미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모습을 해석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종교 다원주의와 기독교 인들의 성상 파괴 운동에 대한 해석을 이사야서를 통하여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사야서는 끊임없이 선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은 오직 여호와께만 달려있다. 이스라엘의 한계는 여호와의 무능의 한계가 아니라,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불신앙은 그들의 제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에 대한 멸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그들의 여호와 유일신 사상은 타락은 이방종교의 세계 속에서 그들의 유일신 신관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오직 여호와만 유일한 신이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모스트모던이즘의 다양성과 상대성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이는 선지자의 외침이다. 기독교의 종교적 제의는 예배와 삶이다.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핵심은 진리와 영 안에서 드리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선포되어지는 말씀의 청종을 통하여 입증된다.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예배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적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이유는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려는 강팍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비난했던 헛된 제물, 손에 피가 가득한 제물, 그리고 마당만 밟는 그들의 태도의 또 다른 거울이 아닐까?
이것은 결국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에 길들여진 배교자의 예배 태도이다. 토라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보다는 이방 종교의 세계관처럼, 그들의 신들에게 잘 보여 농사나 잘 짖고, 평안과 안락 속에서 유일신 사상을 망각한 체 심판의 종자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방 신들은 깨끗한 제물, 의로움 삶, 정결함 생활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그들은 먹을 것 주지 않으면 변덕을 내고, 고약한 성품으로 땅을 진노하는 아주 더럽고 추잡한 신이였다. 따라서 그냥 제사장에게 제물만 내고, 그들의 마음만 달래면, 비도 내려주고 농사도 풍요롭게 해주는 신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단순한 신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제의적 내용보다, 그들의 마음에 관심이 더 있었고, 겉으로 드리는 뇌물과 같은 제물보다, 삶으로 드리는 진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이었다.
이사야의 멸망과 회복에 대하 대칭 구조는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게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 때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것이 또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와 위로의 말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