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로이든 존스는 웨스트 민스터 교회에서 10년 동안 로마서를 강해했다고 한다. 필자가 알기로 20세기 신학자들에게 신학적 폭탄을 터트렸다고 하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도 오랫동안 저술했다고 들었다. 바울이 꼭 교리적 진술을 위해 쓴 서신은 아니더라도 로마서 안에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보고처럼 쌓여 있다. 그런 책의 주석을 한번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은 로마서에 대한 모독이란 생각이 든다.
이한수 교수님의 주석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보고인 로마서 연구에 한 장을 넘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목회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인내와 연구의 작업이 필요함을 로마서 주석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도로, 또한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로마서를 더 깊고 풍부히 이해하여 나의 사상과 나의 언어로 소화하고 싶다. 처음 로마서 주석을 대할 때 필자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1500쪽이 넘는 쪽수이고, 둘째는 1000권이상의 참고도서이다. 따라서 필자가 한번 일고 로마서 전체에 대한 주해를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한수 교수님의 학문적 수고를 통하여 이전보다 더 깊이 성경을 이해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의 이름 없는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낀다. 물론 그것은 내가 소유한 복음에 대한 한계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소유하지 못한 나에 대한 한계이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필자의 존재와 복음적 실존 앞에서 그리고 박약한 복음을 아는 지식의 한계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필자는 보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그랬듯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필연적 이유는 그의 존재와 사역 속에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포스트 모던이즘의 시대 속에서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바울이 사역했던 1세기 경 지혜를 사랑했던 헬라시대도 목수의 아들이었던 한 청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하여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바울의 복음은 아마도 기괴하고 경멸스러운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그의 사역 속에서 체험하였다. 평생 귀신에 시달려 종으로 살던 사람을 해방시키고, 피조물을 섬기며 하나님 없이 절망 속에 살았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케 하였다. 복음은 바울에게 있어서 단순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담지한 능력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주는 좋은 충고가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속에서 죄악 된 실존을 변화시키는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음의 능력이 있어야 하리라! 점점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의 교회의 영적인 형편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한계의 핵심에는 복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무능력한 사역자가 있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지금 현재적 삶의 실존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과,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게 될 것을 지금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이 복음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로마서에 기록된 문자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복음이 능력 있게 증거되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신적 현현이 필자가 섬기고 있는 사역지에 나타나길 기도해본다.
1. 언약신학의 전망 속에서 로마서의 이해
로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해석학적인 열쇠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로마서는 단순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정교하게 교리화 하기 위한 변증서도 아니고, 선교적 목적이나, 목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서신 만도 아니다. 이 모든 목적이 로마서 안에 있다. 따라서 각각의 목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로마서의 중심 사상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각 장과 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주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서신의 목적 중에서도 바울 서신인 로마서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는 바울의 언약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1세기 로마 교회의 삶의 정황을 파악하지 않고 개인화시키며 내가 어떻게 하면 하니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한 루터의 한계일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정황이 아니라, 저자와 수신자의 정황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세기 경의 그들의 정황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바울이 씨름하던 삶의 상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구원사적인 질문일 것이다. 곧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류시킬 수 있을까? 라는 문제와 씨름을 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합시킬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를 이신칭의의 교리에서 찾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유대교의 배타적 언약신학을 포기할 수 있게 한 사상적 전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혐오하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중심의 언약 신학의 한계를 볼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즉 바울 자신이 겪은 인식의 혁명적 변화는 곧바로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유대교의 배타적 언약신학의 한계들을 비평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것, 선택된 민족,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업, 무엇보다 선택된 민족과 이방민족을 구분하는 할례라는 언약 등은 옛 언약이 어떻게 실행되었고, 이런 옛 언약의 실행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론적인 해석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언약신학의 전방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구약의 여호와의 영적인 종교를 민족주의적인 배타적 언약으로 이해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확대되고, 자신이 가졌던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의 사도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사도의 소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계시적 인식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 계시된 언약이 유대 민족주의적 배타성의 종교를 다시 언약사의 관점에서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함으로 배타적 유대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족속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전 우주적 구원종교의 교리을 얻을 수 있었다.
극렬한 유대교 수호자였던 바울이 그렇게 갑자기 인식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급격히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체험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새로운 계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것은 단순한 삶의 변화가 아니라, 그의 신학 해석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즉 유대인들의 혈통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언약신학의 한계를 비평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우주적인 구원 종교의 본질, 이들의 영적인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은 단순히 혈통으로나 육신의 할례, 돌비에 문자로 새겨진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음
모든 바울 서신이 그러하듯 그의 인사말은 1세기경의 인사말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사말은 단순한 예의를 갖추기 위한 서론적 글이 아니라, 그의 존재적 본질이 그의 실존이 어떠한지를 정확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고백 속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존재론적인 고백과, 사역적인 고백이 그 안에서 통일된 사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고, 이런 존재로서의 그의 사역은 사도의 일이다. 이 모든 것에는 자신의 주체적 의지의 결단이전에 하나님에 의한 택정함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과 복음은 선교하는 과정에서 그가 스스로 고안해 낸 인간적인 술책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이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그의 존재적 부르심의 근원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백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사도직이부활하시고 올리우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를 만나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왜 그토록 자신의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는 근원이 자신의 의도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복음의 신적인 기원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성취나 지혜를 목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두 가지 권위의 문제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첫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기원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권위의 문제이다. 그의 사역 속에서는 항상 이 두 가지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바울 복음의 신적 기원과 이것을 바탕으로 한 신적 기원의 권위의 문제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바울 자신의 인간적 열정이나 욕망을 위한 사역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복음의 신적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선택이다. 이 구문은 이한수 교수님이 지적하셨듯이 바울을 꾸며주는 세 개의 병행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존재를 세 가지 어구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부르심을 받은 사도, 복음을 위한 택정함 이다. 바울의 이런 자기 인식은 오늘 목회 준비생으로서의 삶을 사는 신학도의 존재가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해준다.
필자는 이제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 신학교 3학년이다. 졸업 후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 들려오는 소리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교회의 성도의 수는 늘지 않고, 그렇다고 교회 안에 강력한 복음적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개척해서 고생하고, 실패하는 목회자들의 눈물이 보이고... 그 속에서 복음의 본질은 훼손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복음의 사역지가 죽음의 땅처럼 느껴지는 것은 필자가 너무 비관론자이기 때문일까?
사실은 사실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 절망의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수고한 바울의 심정도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사도를 그를 죽음에 내어 버릴 줄 알았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이 시대가 어떠하냐보다.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가? 하나님이 나를 복음 전파자의 사도로 부르셨는가? 나는 복음을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된 사람으로 존재적 구별이 있는가? 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복음을 떠난 인류의 종말론적 위기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였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 구원은 이한수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현재 경험하는 구원과, 우주의 종말 혹은 개인의 종말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면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설명 이후에 바울은 부정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성품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훼손하는 교리적 탕자들에 대한 심판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그것이 바울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이다. 이들의 진정한 위기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 즉 최후의 심판이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의 실존 속에서 또한 개인의 삶과 내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의 핵심은 절대성보다는 상대성과 개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실존적 상태는 영원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소유자라고 부추긴다.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전자적 진화를 이루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해야한다고 한다. 이런 낙관적 인간론에서 최후의 심판, 혹은 현재적인 심판, 인간의 전적인 타락, 무능력, 절대자 앞으로의 귀의 등의 교리는 고대 종교의 구태한 관습정도로 이해하는 듯 하다.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했는데, 그의 후예라고 하는 우리들은 과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난 복음을 감추고 있지 않는가? 인류의 진정한 희망은 무한한 가능성을 소유한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하늘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자기 인식에서 출발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나타나고 있음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심판을 향하여 역사는 움직이고 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자시의 실존에 위기를 느끼고 그 성을 떠나는 것처럼, 죄인의 숨통을 조이는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앞에 절망하는 것이 인간이 소망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의 실존은 참 아이러니 하다. 분명히 나타난 복음적 사실에 그들은 하나님께로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스스로 가두고, 버리고 하고 있다. 더 큰 위기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인간의 배교적 태도를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혹은 신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고, 조금만 소중하게 여기면 언제든지 깨끗한 생명수가 흐를 수 있는 물웅덩이는 탐욕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성적인 타락으로 더럽히고 있다. 인류는 죄를 범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피조물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그들 안에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진리를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진리를 막는데 있다. 이 막는 것은 억압하다, 억누르다의 뜻이다. 불의한 자의 의도성과 적극성을 보게 한다. 고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현재적 최후의 심판은 정당하다.
복음을 전하는 오늘날의 사도의 후예는 이런 인간의 존재론적 죄성과 의도적 악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여야 한다. 교회가 이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자신의 한계 앞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든 믿는 자에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4. 바울 사도가 유대인을 비평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로마서 2장은 유대인이었던 바울 사도가 유대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한수 교수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바울 신학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기둥이 온전히 세워져야 한다. 첫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사건과, 두 번째로는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비판의 궁극적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하는 이유가 신학적으로 어떤 근거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필자도 바울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 속에서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하는 이유가 유대교의 율법준수의 종교적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의 신학적 본질이 무엇인지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한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견해는 유대종교의 본질 즉 율법의 의미가 구원론적인 가치가 있는 수단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신 율법을 잘 지킴으로 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해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나 이런 해석은 의롭게 되는데 있어서 율법 준수의 정도가 어느 정도까지가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을뿐더러 더욱이 유대인들이 내세운 민족주의적 선민의식의 사회학적 배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유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선민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안에 선택받은 자신들의 종교를 자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절충주의적 해석으로 전통적인 해석인 율법의 준수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은 무슨 용도가 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신분의 변화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함으로 된 것이지만, 그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율법을 준주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외 될 수 있다는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신분은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로마서 2장에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보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비난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함으로 선택받은 백성인 것을 스스로 자부하며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지 않는 유대교를 향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행위 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유추론적인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 유대인이다. 그들은 혈통과 육체를 통하여 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함은 육체를 통한 형통을 근거로 된 것이 아니라, 언약사의 심층적 흐름의 요구, 즉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내면이 변화되고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고로 표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의 역사는 불순종의 역사인 것이다.
5.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구속언약의 일방성과 쌍방성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존재론적인 신분과 신분에 걸맞은 삶이 필요하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곧 그들의 신분과 신분에 맞는 삶을 살지 못하는데서 오는 삶의 불일치의 문제이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신분과 삶의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인정함을 받은 신자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적용하게 된다. 바울이 2장에서 유대인의 옳지 못한 삶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처럼, 그의 논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지 않을 때 경험되는 부정적인 모습을 충분히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런 글이 8장13절에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직설적 어법으로 분명히 말한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의 교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언약의 일방성과 쌍방성의 신학적 틀을 가지고 해석하면 신자의 신분과 삶의 의무 수행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월의식은 많이 가졌지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에서는 그렇지 못해서 바울에게 비난을 받았듯이, 오늘 조국의 교회 안에서도 유대인과 같은 기질과 신학적 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신자의 삶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의 의무는 그의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인 산산수훈을 읽다보면 예수님은 행위 구원론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뜻을 행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어조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 해석된 언약신학의 일방성과 쌍방성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행위를 해야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을 통한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곳 하나님과 우리와 이제 새로운 언약적 관계가 수립됨을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제 언약적 관계 속에서 쌍방적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믿고 순종하는 신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내적인 자원을 주신다고 언약하신 것이다. 삶의 열매 자체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되지 못하지만,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자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통하여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이런 언약신학의 쌍방성을 바울은 육신대로 살면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적 은혜로 구원을 얻은 백성은 이제 육신의 정신을 따라 살 수 없다. 언약이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죄를 죽이는 삶을 필요하게 만들고, 또한 가능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죄를 죽이는 삶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지만, 그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나 구원의 경험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죄 속에 지속적으로 육신대로 산다면, 그렇게 사는 삶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죄죽이는 삶을 살 의지도 없었고, 그렇게 살 수 있게 하는 능력도 없어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룬 구원과 아직 이루지 않는 구원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자는 이미 언약의 일방성 속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쌍방적 어약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할 삶에 철저히 자신을 복종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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