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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서평

<빵의 역사>

by Ddak daddy 2016. 1. 23.




                  소박하지만 가장 중요한 음식. 하인리히 E. 야콥의 <빵의 역사>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할까. 저자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젊은 시절 식물학자 게오르크 슈바인푸르트를 만나서 빵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을 회상한다. 노학자는 1만년 역사를 지닌 빵의 역사를 집필해보면 어떻겠느냐는 하인리히의 말에 도리어 직접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20년 자료를 모으면, 집필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이 씨가 되어 하인리하 에두아르트 야콥은 20년 동안 무려 4,000권의 서적을 참고하면서 <빵의 역사>(Six Thousand Years of Bread, 곽명단, 임지원 역, 우물이 있는 집)를 집필했다. 하나의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인터넷 정보가 난무하는 오늘날 한 권의 책을 위해 이토록 많은 책을 참고하는 저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빵의 역사>는 그런 긴 여정을 거쳐서 나온 노작(勞作)이다.


1944년 <빵의 역사>의 영어판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에는 이런 평이 실렸다. 이처럼 일반 독자들에게 철저한 학문적 고증을 제시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이 책은 서양 문명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 연구서 같다.” 월스트리트 저널도 마찬가지로 호평했다. “빵의 역사라는 거대한 서사의 집필을 통해, 야콥은 세계사를 개괄적으로 그려냈다. 요컨대 세계의 풍속, 종교, 민간 신앙, 역병 등을 빵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작가이자 저자의 친구이기도 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종교적, 정치적, 기술적 진보를 빵을 통해 논하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라고 적었다.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빵의 역사>를 통해 빵과 음식, 곡물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기술했다.

 


 

<빵의 역사>는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변화해온 인류의 생활과 빵의 발달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1장 선사시대의 빵, 2장 고대의 빵, 3장 중세의 빵, 4장 초기 아메리카의 빵, 5장 19세기의 빵 그리고 6장 우리 시대의 빵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그 시대의 빵도 변화한 것이다.

 

1장 선사시대의 빵에서 하인리히 E. 야콥은 머나먼 과거를 상상한다. 사냥을 하러 나간 아버지, 잡은 동물을 울타리에 가둬 놓고 새끼를 치면 어떨까 하면서 목동이 된 아들, 어머니는 풀과 열매를 채집하다가 술을 빚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채마밭을 일구면서 원시적인 쟁기도 발명된다. 쟁기는 대지를 갈아서 자궁으로 만들었고 수컷을 상징하는 씨를 넣었다. 쟁기로 땅을 파면서 대지는 상처를 입는다. 플루타르코스는 말했다. “상처 입히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모든 농업의 신은 결혼의 신이기도 하다. 땅은 하늘의 아내였다. 대지는 여신이자 어머니였다.

 

앙리 파브르는 인간에게 필요한 먹거리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한탄했다.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다른 곡식들과 그 역사가 전혀 다른 벼를 제외하면,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이용한 곡식은 여섯 가지, 즉 인류 초기의 기장, 귀리, 보리, 밀과 고전주의 시대 말엽부터 이용한 호밀, 그리고 아메리카 발견 이후 재배된 옥수수이다. 이 여섯 형제가 1만년이 넘도록 세상의 인간들을 먹여 살렸다.”(p54) 몽골이나 인도에서는 기장을 주로 먹었고, 보리는 아리안 족에 의해 널리 퍼진다. 보리와 밀을 동시에 재배하던 이집트에서 빵이 발명되면서 곡물의 역사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보리는 잘 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빵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빵이 만들어진 때부터 밀은 곡식의 왕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장은 본격적으로 빵이 만들어진 고대로 넘어간다. 로마나 게르만 등 다른 민족들은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데 급급했지만 이집트에서는 오히려 밀가루 반죽이 부패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기뻐했다. 이집트인들은 과학적인 면에서 효모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약간 부패해서 시큼해진 반죽을 구우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색다른 음식으로 변한다는 결과는 알고 있었다. 이 새로운 음식은 숯불에서는 구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오븐도 발명되었다. “빵을 굽기 바로 전에, 시큼해진 반죽에다 소금을 뿌린 다음, 다시 한 번 꼭꼭 주물렀다. 그런 다음 빵 굽는 그릇 밑바닥에 반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겨를 깔았다. 발효된 반죽을 국자로 떠서 가지런히 팬에 올린 다음, 오븐에 넣고 문을 닫았다.(p72)” 이집트인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오븐을 지켜보며 빵이 다 구워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들의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고분 안에 그려놓은 벽화 덕분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빵을 먹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빵을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먹었다. “오늘날에도 이집트인의 후예들은 둥근 빵을 잘라 벌린 다음 그 속에 알라신이 베풀어준 야채, 다진 고기, 생선을 넣어서 먹는다.(p80)”

 

“낯선 사람을 대접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네가 모르는 사이 천사를 대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한 구절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연상케 한다. 오디세이가 고국으로 돌아올 때의 광경도 그러하였으리라. 그리스 땅은 척박한 산악지대였다. 농사를 짓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더더욱 바다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먹어야 할 곡식도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다.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빛 양털가죽’을 찾으러 떠난 이아손과 원정대는 곡식을 구하려 가는 원정대를 영웅적으로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아손과 영웅적인 선원들은 기아로 허덕이는 조국을 위해, 아득한 옛날에 잃어버렸다는 ‘황금빛 양털가죽’을 되찾아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원정길에 오른, 무장한 곡물상들이었다.(p104)” 그런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 이후에는 농업을 중요시 여기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빵은 곧 정치라는 관념을 가졌다. 폼페이 유적지에는 그 당시에 사용하던 방아와 커다란 오븐이 남아 있다. 이집트의 제빵 기술이 로마에 보급되면서 오븐의 여신 포르낙스를 기리는 의식도 성대하게 열렸다. 그들은 “오븐 속에서 반죽이 커지면서 만들어지는 빵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아기가 자라는 것만큼이나 신비롭게 여겼다.(p149)”

 

구운 낟알이나 죽보다 빵이 훨씬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로마인들은 제빵 기술을 철저히 발전시켰다. 로마의 빵 모양은 이집트보다 훨씬 더 예술적이고 종류도 다양했다. “부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원했다. 시인이 방문하면, 부잣집 주인은 수금 모양의 빵을 만들어내도록 명령했다. 그런가 하면 결혼식 피로연에서는 두 개의 반지가 연결된 모양의 빵을 대접했다.(p150)”

 

제빵소의 주인들 중에는 해방 노예들도 많았고, 지금도 비석이 남아 있는 베르겔리우스 에우리사케스처럼 정당하게 부를 쌓은 이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빵사들은 강한 프로 의식으로 뭉쳐 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국가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길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로마에서 빵은 중요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로마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는 빵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곳을 소유한 사람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곡창지대인 이집트는 로마 제정 중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혁명 거점이 되었다.

 



3장은 중세의 빵이다. 하인리히 E. 야콥이 살던 시대까지만 해도 중세에 대한 연구가 미약했다. 그가 알고 있는 중세는 어둠의 시대였다. 또한 중세는 내내 기아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언제나 식량이 모자라서 굶는 일이 허다했다. 도시 바깥에는 방앗간이 있었고 도시 안에는 빵집들이 있었다. 제빵사는 방앗간 주인보다 사회적 지위가 훨씬 높았다. 제빵사 길드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만큼 그들의 자부심 또한 높았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제빵사들의 파수 임무를 면제해줄 정도였다. 밤샘 작업이 금지되어 모두가 잠을 잘 때도 제빵사들은 새벽에 빵을 살 손님들을 위해 철야작업을 했다. 그러나 기술은 답보 상태였다. 중세에도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도구를 썼다.

 

곡물 생산량 또한 적었기 때문에 빵의 무게나 품질을 속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함부르크에서는 “계량원은 품질이 나쁘고 함량 미달인 빵을 즉시 몰수할 권한이 있었다. 그런 제빵사는 당장 시의회에 끌려가, 당일 정오까지 벌금을 물어야 했다. 만약 똑같은 부정을 다시 저지를 경우, 도시는 그를 주민에게 넘겼다.(p238)” 군중들은 빵을 갖고 장난 친 제빵사들을 단죄했고, 사람들은 구경꺼리를 즐기곤 했다.

 

4장은 초기 아메리카의 빵이다. 콜럼버스 일행은 세상의 동쪽에서 벼를 재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벼를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눈에 띈 것은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곡물이었다. 기다란 잎으로 해를 가린 거대한 이삭에서 자라는 옥수수. 스페인에서 원정을 떠난 코르테스의 군사들도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들판 가득 옥수수가 심어진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유럽과 달리 아메리카 대륙에는 굶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옥수수가 유럽인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인가.

 

예상과 달리 유럽의 농부들은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옥수수와 감자를 재배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낯선 곡물들이었다. 특히 옥수수가루는 거칠어서 기존의 방식으로 빵을 굽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크레타 섬에 농장을 개간해서 재배한 옥수수를 이슬람교도들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 전역에 팔았다. 그 덕택이었을까. 이탈리아에는 죽의 일종이랄 수 있는 폴렌타를 끓여 먹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이 거치면서 감자도 영국, 독일, 러시아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곡물로 사랑을 받게 된다.

 

5장은 19세기의 빵이다. “나에게 빵을 달라는 그의 외침은 인간 본성의 외침이어라.” 피에르 뒤퐁의 남긴 글이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모든 것들이 바뀐다. 그러나 혁명 이전까지 민중들을 빵을 위한 투쟁을 그칠 수 없었다. 18세기 이후 곡물 가격의 상승은 멈추지 않았다. 제분 방법이 낙후되어 밀기울까지 빵으로 만들곤 했다. 그러나 밀기울이 섞인 빵은 사람들의 위장만 속일 따름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다. 1789년 유사 이래 최악의 가뭄이 프랑스를 덮쳤다. 강물은 말라붙었고, 방앗간에서는 밀가루를 만들 수 없었다. 빵의 공급은 줄어들고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발견하고 외쳤다. “저기 빵 장수가 그의 마누라가 온다!” 그런 별명으로 불린 왕과 왕비도 민중들의 배고픔을 떨쳐줄 수는 없었다. 빵이야말로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었다. 혁명 이후 당통은 “온 나라에 걸쳐 적용되는 빵 가격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폭발한 민중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빵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내가 프랑스를 떠나 있는 동안 정부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사회 안정이오. 그리고 빵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오.” 라는 편지를 총리대신에게 썼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기근이 시작되고 있었다. 러시아 군대는 퇴각하면서 마지막 한 톨의 곡식까지도 가져가 버렸다. 냉혹한 바람이 부는 모스크바에 먹을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악의 식량난이 일어난다. 강추위보다도 빵이 없다는 사실이 나폴레옹 군대를 무너뜨리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빵은 승리를 불러온다’는 말이 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북부는 빵을 먹을 수 있었지만 남부는 면화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p428)” 링컨은 독립전쟁의 교훈을 인식하고 군인들이 최상의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북군 병사들을 위해 빵을 실은 짐마차 행렬들이 줄을 이었다. 군대 제빵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링컨의 대포알이란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이 밭에서 길러내고, 내가 오븐에서 구워낸 것이지.(p433)”

 



6장은 우리 시대의 빵이다. 물론 하인리히 E. 야콥이 쓴 시기를 감안하면 20세기 초, 1940년대 초반까지 빵의 역사다. 굶주림은 종종 전쟁이나 반란으로 이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일찍이 농업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농업은 모든 것에 앞서는 첫 번째 기술이다. 농업이 없이는 상업도, 시도, 철학도 존재할 수 없다.”

 

1916년부터 독일은 이미 1차 대전에서 패하고 있었다. 농업 노동력은 모자랐고 그나마 수확한 곡물들은 제대로 전선으로 이동시키지 못했다. 1917년 “미국은 총검뿐만 아니라 밀가루 포대를 가지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윌슨 대통령이 허버트 후버의 손에 맡긴 계획이 바로 ‘밀을 통한 승리’였다.(p505)”

 

기근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은 농업 생산을 안정시키면서 ‘20세기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히틀러는 과도한 전쟁배상으로 인한 가난과 기근을 미끼로 삼고 민중을 선동한 후 정권을 장악했다. 나치는 정복자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만 식량을 보급했다. 그 사이에 농촌에서는 콤바인이 등장하고, 새로운 밀의 이중교배 등이 이루어졌다. 빵을 둘러싼 인간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에게 미국은 신천지였던 모양이다. 빵의 역사 후반부서는 미국에 대해 지극히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피폐화된 유럽에 비하면 그가 피신해서 만나게 된 신세계는 경이로웠을 것이다. 저자는 미국 대통령인 후버로부터 직접 “세계의 평화는 빵의 평화다”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빵의 역사>를 처음 쓴 시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빵 문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빵이 없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서울 시내에는 수많은 빵집 간판들이 걸려 있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아침이면 바게트나 크루아상을 동네에서 사 먹을 수 있다. 이처럼 빵이 일상화된 시대에 <빵의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역사와 먹을거리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줄 것이다.

 

어쩌면 <빵의 역사>라는 제목보다는 ‘식량’이나 ‘곡물’의 역사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빵이 주인공이지만 인간 생활의 근간이 되는 곡물로 만든 음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빵이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그와 연관된 사회적 상황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빵 하나로 세상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움직인다.

 

책은 607쪽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빵의 역사> 한 권을 집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참고했을까 하는 것은 책을 읽고 있으면 생생하게 드러난다. 밀알들을 모아 한 조각 빵을 굽듯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작가
하인리히 E. 야콥
출판
우물이있는집
발매
200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