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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

웨하스와 카스테라

by Ddak daddy 2022. 4. 8.


   오늘 이야기는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음식 이야기를 해도 좋을 법한 제목이다. 웨하스는 웨이퍼의 일본식 발음이고, 카스테라도 카스티야의 일본식 발음이다. 그래서 유럽의 음식 문화 가운데 일부가 동아시아로 옮겨온 흔적을 담고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써보고 싶은 주제이기는 하다.

     웨이퍼는 반도체 회로를 새긴 원반 실리콘 혹은 표면에 그물 무늬를 넣은 납작하고 동그란 과자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밀가루 떡, 즉 면병(麪餠)이다. 천주교에서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사제가 축성하면 성체로 바뀐다는 바로 그것이다. 축성하기 전에는 그냥 면병 혹은 제병이라 부르고, 아무나 먹을 수 있다. 혹시 성당에서 친절한 신부를 만났을 경우에는 그게 어떤 건지 몹시 궁금해 하면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먹어볼 수도 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운 것이다.

   그러나 성찬 전례에서 일단 축성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거룩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라는 교리이다. 이 용어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던 트렌토 공의회에서 완전하게 정립되었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과 함께 빵의 전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그리고 포도주의 실체가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한다. 가톨릭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변화’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축성한 성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다. 제병을 들어서 성체로 실체변화를 이루는 의식과 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먹는 의식으로 구성되는 성찬 전례는 천주교 미사의 절정에 해당한다. 이 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고, 실체변화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분리될 수 없다. 이 말은 성체를 분배받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독감 걸려서 집에 누워 있는 손자에게 주겠다며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가는 곧장 복사에게 제지당한다. 다만 특별한 쓰임새를 위해서 감실에 약간 보관해 두기는 한다. 그래도 사제가 성체를 축성하고, 모든 신자들이 성체를 받아먹는 과정은 바로 그 현장에서 완료되어야 한다. 그만큼 웨하스의 종교는 장소 고정성이 강하다.

   이에 반해서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념이나 상징이라고 여긴다. 백보양보해도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할 따름이라고 본다. 츠빙글리나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은 대부분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병이 실체변화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된다는 생각은 허구이고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배 절차의 일부인 성찬식은 단순한 기념 행위일 뿐이고, 예배의 핵심은 말씀의 선포, 즉 케리그마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청도교의 후예인 미국 개신교, 미국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여 정착한 한국 개신교에서는 예배가 대단히 단순하며, 부활절과 성탄절 외에는 성찬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붉은색 무알콜 포도주스와 카스테라를 사용하며 실체변화에 해당하는 의례 행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카스테라의 종교는 장소 유동성이 강하다.

   만약 전염병이 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웨하스의 종교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영성체를 포기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성당에 모여서 미사를 강행하지 않을까? 그리고 카스테라의 종교는 말씀이 기록된 바이블을 집집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예배당에 모일 필요 없이 각자 집에서 열심히 바이블을 봉독하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기도를 드리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질까?

   물론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얽매인 종교학도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겠지 싶다. 웨하스의 종교는 신영성체(神領聖體, spiritual communion)라는 비상조치를 갖고 있다. 성체를 받아먹을 수 없는 경우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영성체를 하고자 하는 지향만 가지고 있으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부득이한 경우에 묵주기도, 성서봉독, 선행 등으로 주일미사 참례를 대신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그래서 국가적인 재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참여하는 미사를 중지하고 성당을 폐쇄하였다고 말한다.

   한편 카스테라의 종교라고 예배를 케리그마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말씀의 선포와 더불어 코이노니아(친교, 교제)도 예배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래서 공동체가 모여서 예배를 보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대원칙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언론 보도에서 비슷한 논조의 인터뷰 기사를 몇 번 읽기도 하였다. 헌금 이야기는 논외로 하자.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영성체라는 임시조치도 코이노니아의 비타협성도 모두 현재 봉착한 문제와 그 해법에 관해서 그다지 정직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토록 실체변화를 강조하는 웨하스의 종교에서는 영성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보이질 않는다.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한편 실체변화를 강조하는 측과 똑같은 세기로 “오직 신앙만으로, 오직 성경만으로”를 외치며 말씀 중심의 종교성을 내세웠던 카스테라의 종교는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전쟁 때도 신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강변하면서 오히려 오늘날의 신자들을 위험에로 내몰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 27일 금요일 저녁 비내리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텅빈 광장에서 베르골료 할아버지가 웨하스의 종교성을 경쾌하게 돌파하였다. 성체를 모신 무거운 성광(聖光)을 힘겹게 들고 로마시와 온 세상을 향해 성체 강복을 거행하는 모습이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에 퍼진 것이다. 미리 이 계획을 발표하면서 통신수단을 통해서 모든 이들이 영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스마트폰이건 태블릿이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교황의 성체 강복을 받을 수 있고, 전대사의 조건 중 일부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카스테라의 종교성이 빚어내는 형식 타파의 역동성도 기대해봄 직하지 않은가? 개신교는 하향식의 일사불란함을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자기 혁신이 개신교의 장기가 아니던가? 게다가 목사는 사제가 아니다. 모든 신자가 직접 신과 인격적으로 만난다. 그래서 만인이 다 사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상향식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예배의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디오로 듣건 스마트폰으로 듣건 말씀의 선포는 훼손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굳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면서 인사해야만 코이노니아가 실현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글을 끝내려고 하는데 종교학도의 괘씸한 불경건이 고개를 쳐든다. 한국 개신교가 예배당에서 신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현장 예배를 참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과연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서 그럴까? 어쩌면 평양 대부흥 운동에서 발원하여, 일제 강점의 민족 수난과 한국전쟁의 동족 상잔을 견뎌내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산업화 시기에 도시로 몰려든 가난한 이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던 부흥회 스타일의 예배가 한국 개신교인들의 무의식에 각인된 것은 아닐까?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hbthomas@aks.ac.kr
앞으로 쓰고 싶은 논문으로는 <초기 한국종교학사 연구>, <박해시대 조선대목구의 사제 양성과 신학교 설립>, <19세기 조선 천주교 문헌에 나타난 번역 양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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