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어야 할 절박한 이유
5개월 전엔.
민족사관고등학교의 한 여학생이 미국의 명문 대학 열 곳에 합격해 화제가 되었었다. TV 인터뷰에 응한 그 학생은 셰익스피어와 제임스 조이스를 줄줄 외우고 있었다.
찬사와 축복을 보내기에 앞서 내 마음은 심히 착잡했다. 만일 한국의 교육 환경이 좋아서 그 학생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고, 미국의 사례처럼 인문학적 교양을 측정하는 테스트가 있었더라면, 그 학생은 서양의 고전만이 아니라 ‘두시언해’도 외고 ‘무정’도 읽었으리라.
그럴 기회를 스스로 없애버림으로써 한국사회는 재원도 빼앗기고 유산도 거덜내는 꼴을 당하고 있다.
30년 전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오광섭 담임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수업시간에 옛날이야기만 해주셨다.
옛날이야기라고 했지만, 실은 김내성의 ‘청춘극장’에서 시작해 차츰 난이도를 높여서 졸업할 때쯤에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난해한 구조주의까지 소개해주셨다.
우리 반은 대학 입시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내기까지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산 책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였다. 중학생 때 읽었어야 할 책을 대학생이 되고서야 겨우 읽었다.
그리고 20년 전.
제대와 더불어 제대로 공부 좀 해보겠다고 전공 서적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나는 외국 학자들이 고전의 금언들을 능숙하게 원용하는 걸 보고 기가 팍 죽고 만다.
그렇게 고전을 요귀의 팔다리처럼 굴신자재하게 놀리려면 어렸을 때 읽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초등학생들이 발자크를 읽고 중등학생들이 스피노자를 읽을 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나는 생각한다. 고전은 강제로라도 읽어야 하고, 일찍 읽을수록 좋고, 그러려면 대입제도가 아니라 초·중·고교의 교육내용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왜 고전을 읽는가? 왜냐하면 전 세계의 어린 학생들이 모두 고전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만 빼놓고.
미국의 명문 대학들에 동시다발로 합격한 그 여학생은 자연과학을 전공할 거면서 왜 그 어려운 조이스의 문장들을 외웠을까? 그게 어떻게 좋은 대학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증빙자료로 쓰일 수 있었을까?
고전은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지식의 장수 유전자가 잘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한 분야에만 쓰이지만 지식의 유전자는 모든 분야에 두루 응용될 수 있는 융통성이 ‘빵빵’하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고전에 대한 열네 가지 정의 속에 “고전은 끊임없이 생각의 구름을 일으키는데 그러면서도 항상 그 구름으로부터 빠져나온다”라는 구절을 집어넣었다. 고전은 생각의 촉매들이다.
인간 두뇌의 용적은 참으로 작아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 안에 우겨넣으려 하면 터져버린다. 그러니 지식을 넣을 게 아니라 생각의 촉매들을 양질의 것들로 골라 넣어두어야 한다.
고전의 고전성, 즉 그것이 오랜 시간의 시험을 거쳐 살아남아서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생히 울리고 있다는 것은 그 질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유종호 교수는 “탕진되는 법 없는 통찰과 지혜”라고 말한다.
왜 어렸을 때 읽어야 하는가? 아직 기억의 주름이 말랑말랑해서 읽은 내용의 알맹이가, 예쁜 건포도가 빵 속에 박히듯이 쏙쏙 심기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읽은 것을 나이가 든 후에 다시 읽으면 고전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을 새록새록 솟게 한다. 어린 시절에 읽지 않았다면 금세 증발해 버릴 게 십중팔구인 것들이 말이다.
(정과리·연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박지원의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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