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영적생활 - 프란시스 쉐퍼
쉐퍼는 영적 생활은 중생이 아닌 성화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영적생활은 내적인 것이며, 내적 실재의 결과가 외부로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르는 탐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탐심이야말로 모든 죄의 근원이며 진정한 영적 생활, 즉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쉐퍼는 1장에서 사실 우리가 처음에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말한다. 탐심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도 그 창조목적을 달성시켜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약간 논외의 이야기지만 나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그것이 전부라면 내가 조금 잘나지 못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그리고 이미 삶의 의미를 충족하고 있구나 인생이 허무하지 않구나 생각이 들어서 위로가 되었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우리도 죽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 생활에서의 매우 실제적인 죽음이다. 우리는 실제로 매일 우리 삶 속에서 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일을 포함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오직 만족해할 줄 아는 것이다. 또,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 사물과 자아의 위력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타락의 핵심이다. 하와가 그러했다. 아니오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들이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적 자아가 창조주와 주를 향해 반역하는 이질적인 세계의 인정을 받고자 할 때에도 자아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배척과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제자는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 이루어지는 부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죽음 - 2) 그리스도의 부활 - 3) 나의 죽음 - 4) 나의 영적 생활 (현재) - 4-1) 죽은 자처럼 사는 것 4-2) 믿음으로 살아나는 것 5) 나의 육체적 부활 (먼미래) 쉐퍼는 마치 우리가 이미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갓다가 부활하여 다시 돌아온 것 같은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첫번째 소명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위해 살고 모든 것에 대해 죽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인 자세도 아니고 금욕주의도 아니다. 이러한 부활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기독교 신비주의 속에는 타 종교와 같은 인격의 상실도 없고 개인의 상실도 없다. 기독교의 신비란 곧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인 나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적 생활을 행하심으로써 가능하다. 온전한 성령님의 사역이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내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능동적인 수동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성령의 능력은 초자연적이다. 우리 세대는 자연주의적으로 닫힌 체계 속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전적으로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계시는 인격적인 우주이다. 우주는 자연성과 초자연성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두 부분으로 된 실재의 영역 속에서 사는 삶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실 것이라는 가르침이 진실인 줄 안다. 우주의 초자연성이 없으면 기독교는 그저 심리적·사회적 도구 또는 단지 하나의 철학이 되고 하나님은 복과 위로의 하나님이 될 뿐이다. 이 불신앙의 삶은 육 안에서 되어지는 자기 노력으로 사는 삶이며, 외부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과시적 삶이며, 하늘에 속한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영광 돌리지 못하는 삶이 된다. 예수의 피를 믿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의 피를 믿는 것은 초자연적인 맥락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성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은 칭의, 성화, 영화의 단게로 이루어지며 성화는 구원의 현재적 부분이다. 칭의와 성화 간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칭의는 영단번에 죄의 죄책이 가려지는 것이지만 성화는 매순간순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칭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성화에 따라 그리스도인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은 매 순간순간,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대행적 사역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지이거나 또는 아는 데 그치는 것이다. 성화는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을 축적시켰을 때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매순간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통을 가짐으로 성령님의 대행사역으로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가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그 관계도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품의 깊은 샘을 다루어야 한다. 내적 사상 세계가 일차적이고 그것이 외부 세계를 존재케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사상 세계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매일매일 의식적으로 감사하는 것은 양심의 평안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지 정죄하시지 않는다. 심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동물이 될 수도 없어서 괴로워한다. 실존에서의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해결 가능하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자아를 볼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심리상태를 가질 수 없고 타락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 된다.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에 기댔을 때 실직적인 치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옛적의 소원을 품기란 매우 손쉬운 일이다. 타락의 교리를 부정하면서, '나는 나의 신분으로 보아서 마땅히 더 우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다시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의 제한성을 용납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실질성을 상실하고 심리적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가 오기 전까지는 완전인가 무인가 극단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통한 완성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격이다.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되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의식있고 책임있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우리의 심리적 기복은 하나님이 주신 합리적 구조로 기독교적 교훈에 입각하여 극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창조를 통해 계시하시고 특별히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이상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생각한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인생에 대한 완전히 해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따라 생각할 때, 즉 하나님을 따라 의지활동을 할 때, 나는 지적인 완전을 얻을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우월과 열등의 감정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열등감에 대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와 정당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월감에 대해서는, 피조물로서의 실재, 즉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진실로 인식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유한성을 인식할 때 월등하거나 무제한적이거나 무한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분수를 아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온 맘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피조되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통은 현재의 삶에서 나의 의지를 실제로 숙일 때 생기는 결과다. 이것 외에 다른 방도로는 전인을 완전케 할 수 없다. 창조주 앞에서의 피조물의 위치를 고수하기를 거절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용 목적에 그대로 쓰임받도록 나 자신을 드리지 아니할 때 이것이 곧 죄다. 삶의 최종 통합점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스포츠나 물질, 그림과 음악,성관계, 지식추구 등은 최종 통합점이 될 수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가의 구조, 타락에 관한 이해, 역사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떠나서는 심리적 필요와 짐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매순간순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고 진정한 통합된 삶의 길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인격대 인격의 관계로, 이 원리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의 원리로 발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를 다루신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의 피조물로서 생각하고 활동하기 시작할 때, 나는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외부로 향하게 된다. 나 자신을 모든 사람과 동일시 하게 되면, 나는 다른 사람과 동일한 처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더이상 나를 향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내부로 향할 때 그곳에는 대답할 자가 아무도 없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이 아니며 타락 이래로 우리 모두는 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나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인간관계는 그 자체적으로 충분치 못하며 또 불완전하다는 사실로 인해 나 자신을 파손시키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의 피조물로 있으며 그리고 최후의 관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며, 이 모든 인간관계는 동등하다는 것을 알 때, 나는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고서 모든 구조를 다 내동댕이 치는 일이 없이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것을 취할 수 있고 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 인간관계를 완전한 것으로 기대하지 아니하고 그 속의 아름다운 면을 보고서 기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외 인간관계는 궁극적으로 충분한 관계는 없다. 깊은 위로가 된다 작성자; 원어우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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