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주석
동방 박사의 실패와 성령의 완성
마태복음2장 예수의 탄생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누가와 달리 마태는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동방 박사의 내방을 기록한다. 이방인이, 그것도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한 사건은 이방인 구원에 관한 영광의 전조이다. 기이한 한 별이 나타나 이방인을 인도했다는 사실도 별에 관한 고대의 예언과 들어맞는다(민24:17). 그러나 실상 마태의 기록 의도는 구약의 성취나 이방인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장 전체에 흐르는 깊은 맥은 '동방박사의 실패와 성령의 완성'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동방박사의 실패(1-12절)
1) 예루살렘 방문
동방박사의 내장은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의외성으로 인해 특이한 한 사건으로 깊게 각인될 뿐 그들의 너무나 큰 실수는 가려진다. 어느날 세 명의 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 문을 두드렸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 한마디에서 그들이 구약의 예언(민24:17)을 알았던 것은 거의 확실해진다. 그런데 바로 이 말 속에서 그들의 착오 역시 확실해진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분명 별에 관한 얘기를 듣고 관찰하던 중 별을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정말 별만 바라보고 별만 따라왔단 말인가? 분명코 아니다. 그들이 별만 보고 따라왔다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1절에서 마태는 이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시 말해 박사들은 자신들을 인도해 오던 별을(9,10절) 유대 인근 지역에 이르자 소홀히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은 예루살렘 왕궁에 태어남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해서 더 이상 별을 바라보지 않고 예루살렘 왕궁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 탄생 소식이 헤롯에게 알려졌고, 급기야는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가야 했고(13-15절) 베들레헴 인근 지역의 갓난 아기들은 무참히 죽어야 했던 것이다(16-18절). 신앙 생활은 '상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상식보다 계시와 복종에 더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2) 믿음의 실상과 허상
한편 동방 박사 내방의 사건은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믿음의 실상과 허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헤롯이 예수의 탄생 장소를 묻자 '유대 베들레헴'(5절)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미5:2말씀을 읽어준다. 실로 말씀의 지식에 관한 한 빈틈이 없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하였는가? 확인이라도 했는가? 애석하게 그런 기록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후에 예수님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23:3)고 하셨다. 이것이 혹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2. 헤롯의 무모한 복수(13-18절)
1) 스스로 속은 헤롯
동방 박사들이 조용히 돌아간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난 헤롯은 광란한다. 그는 자기가 동방 박사들에게 속았다고 판단했다(16절). 그러나 정작 속은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헤롯 자신이다. 경배하기는 커녕 죽일 마음으로 가득하고도 오히려 경배하겠다는 그의 혀야말로 간교한 것 아닌가? 악한 꾀로 남을 속이려는 자는 자기가 속게 마련이다. 차라리 검은 속셈을 드러내고 동방 박사들에게 병사를 딸려보내는 것 대신 그 스스로의 악한 궤계로 술수를 쓴 것, 즉 위선과 기만으로 일관한 결과 그는 목적도 이루지 못한 채 위선만 드러낸 꼴이 되고 만 것이다.
2) 애꿎은 복수
헤롯의 광란은 무참한 유아 학살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왕가를 영원히 보존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애꿎은 베들레헴 인근의 아기들을 다 죽이고 만다. 그가 예수의 왕권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았어도 이러한 포학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 어두워진 욕망은 사람을 망치고 죽이고 파괴한다.
3. 성령의 예수의 보호(19-23절)
1) 살림과 완성의 성령
동방 박사들에게서 보듯이 사람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을 그르친다(7:15-18). 인간 본래의 나양성과 죄성 때문이다(7:17).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사업은 늘 망가지고 깨어지는가? 아니다. 살림과 완성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8:26-28).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12,13절), 헤롯이 죽은 후에도 성령은 깊이 관여하셨던 것이다.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는 늘 안심하며 성령이 계시기에 늘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다. 따라서 성소는 매사에 성령을 의존해야 한다.
2) 예배의 성취
예수께서는 애굽에 가서 사셨고(15절), 나사렛에 가서도 사셨다(23절) 결국 모든 것은 예언의 성취였다. 성령과 말씀,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저작물이다. 성령의 감동 없이 기록된 성경은 없다(딤후3:16). 그러므로 성령은 반드시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울러 성령은 말씀 없이는 역사하지 않으신다(엡6:17). 성령이 계신 곳에 말씀이 있고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무엇이 광신이고 무엇이 신비주의인가? 말씀 없는 성령 운동이다. 무엇이 자유주의이고 무엇이 잘못된 신학인가? 성령 없는, 성령을 배제하는 말씀 연구이다. 모름지기 말씀과 성령을 분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을 분리해내는 어리석음이요, 무리수이다. 동방박사들에게서 들려온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역설적으로 이방인들에게서 들려온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들려져서는 안될 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 결과 애꿎은 아기만이 무참히 죽임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방 박사들의 예배와 헤롯의 예수 살해 음모(마2:1-12)
◈ 원문강해 ◈
메시야 예수에 대한 세상 권세의 반응과 예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마태는 본문을 통해 악한 왕 헤롯과 대조되는 유대인의 왕이며 모든 민족의 메시야 되시는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1.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1-3절)
이방인 박사들의 출현은 예수의 족보(1:1-17)에 이방 여인들이 언급된 것처럼,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무리들 속에 이방 출신의 제자들이 포함될 것임을 암시한다. 마태는 이러한 점을 처녀 수태 고지에서(1:23)와 같은 놀람의 의미를 내포한 '보라'(idovu, 이두, 1a절)라는 단어로 강조한다.
1)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
(Tou' de; jIhsou' gennhqevnto"투 데 예수 겐네덴토스, 1a절)
예수의 탄생이 독립속격 구문으로 기록된다. 이는 예수의 탄생이 주체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본 절 이하에 언급되는 전체 내용의 서론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F.F.Bruce). 정관사 투(tou')는 '예수'의 이름이 이미 언급되었음을 가리키며(1:21;25), 예수가 지닌 '구원'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켜 준다. 한편 헤롯 왕 때에는 B.C.4년에 사망한 헤롯대왕이 통치하던 때에 예수께서 탄생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유대인의 왕'(2절)이신 예수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악한 왕의 지배시에 탄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고난받으실 것을 암시한다.
2)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함
(mavgoi ei[domen ga;r aujtou' to;n ajstevra ejn th'/ ajnatolh마고이 에이도멘 가르 아우투 톤 아스테라 엔 테 아나톨레, 1b,2절)
마고이(mavgoi박사들)는 70인역(LXX)의 단2:2,10에서 유래하는 단어로 현자 또는 제사장을 의미하며, 당시 메대, 바사, 바벨론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던 천문학과 점성술 분야의 전문가들을 가리킨다(HDCG Ⅱ, 97-101). 엔 테 아나톨레(en th'/ ajnatolh'동방에서)는 본래 '그 별이 떠오를 때'를 의미한다. 박사들은 동방에 있는 별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Moffatt). 정관사 톤(tovn)과 더불어 소유의 의미를 갖는 아우투 톤 아스테라(aujtou' tovn ajsthvra그의 별)는 '예수의 별'을 가리키며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24:17)라는 발람의 신탁(神託)과 부합되는 메시야의 별이었다.
3) 예루살렘의 소동
(pa'sa JIerosovluma met! aujtou' 파사 예로솔뤼마 메트 아우트, 3절)
메트 아우트(metj aujtou')는 '그와 함께' 즉 헤롯과 함께를 뜻한다. 이는 정적(政敵)을 두려워하는 헤롯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전체가 새로운 왕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파사(pa'sa온)는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를 대적하는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2. 동방 박사들을 기만한 헤롯의 궤계(4-8절)
헤롯은 다윗 가문의 왕도, 유대인도 아닌 이두매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법적 왕권을 지키려고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박사들을 반기는 것처럼 기만하였다.
1) 동방 박사들의 내방에 대한 헤롯의 반응
(sunagagw;n pavnta" tou;" ajrcierei'" kai; grammatei'" tou' laou' 쉬나가곤 판타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그람마테이스 투 라우, 4a절)
헤롯은 메시야의 출생지를 묻고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소집하였다. 사두개파에 속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더불어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Sanhedrin)을 형성하였다. 마태는 헤롯이 소집한 이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헤롯과 마찬가지로 불신앙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바리새파 출신인 서기관들은 '회당'을 뜻하는 쉬나고게(sunagwghv)에서 유래한 부정과거 분사 '쉬나가곤'(sunagagwvn모아)을 써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과거에 예수를 배척하였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2) 헤롯이 예수 탄생 장소를 물음
(ejpunqavneto par! aujtw'n pou' oJ Cristo;" genna'tai 에퓐다네토 파르 아우톤 푸 호 크리스토스 겐나타이, 4b절)
에퓐다네토(ejpunqavneto)는 미완료 시제로 헤롯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집요하게 메시야의 출생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마태는 미5:2의 '작을지라도'(twOyh}li ry[ix차이르 르흐요트)를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oujsamw'" !elacivsth우다모스 엘라키스테)로 바꿔 인용하였다(6a절). 마태에게 있어서 베들레헴(Bhqlev- eJm떡의 집)은 미가 예언 당시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다윗 가문에 메시야가 탄생하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3) 헤롯이 예수 탄생 시기를 물음
(lavqra/ kalevsa" tou;" mavgou" hjkrivbwsen 라드라 칼레사스 투스 마구스 에크리보센, 7,8절)
라드라(lavqra은밀히)와 '에크리보센'(hjkrivbwsen정확히 탐색하다)은 메시야의 출생지와 출생 시기를 확인하는 헤롯이 예수 살해 음모를 숨기고 박사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거짓된 모습을 간교하게 감추는 악한 자의 행위는 사단의 방법이기도 하다.
3. 동방 박사들의 경배(9-12절)
아기 예수께 대한 이방인 박사들의 경배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으나 이방인에게는 받아들여지는 메시야의 운명의 전조이다(F.F.Bruce).
1)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감
(ijdou; oJ ajsth;r … proh'gen aujtou;" 이두 호아스테르…프로에겐 아우투스, 9,10절)
프로에겐(proh'gen앞서 인도하여)은 미완료시제로서 별이 박사들보다 앞서서 계속 진행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별(2절)은 아기 예수가 계신 베들레헴의 사관(눅2:7)으로 박사들을 인도하였다. 박사들은 별이 아기 예수가 계신 곳위에 머물자 커다란 기쁨과 감격을 감출 수 없었다(10절). 이는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를 발견한 자가 표출하는 반응이다. 빛과 구원이신 주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화평 안에 머물게 된다(빌4:6,7절).
2)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림
(ajnoivxante" tou;" qhsaurou;" aujtw'n아노이 크산테스 투스 데사우루스 아우톤, 11절)
데사우루스(qhsaurouv"보배함)는 고대 문필가들 사이에서 통용된 작은 상자, 보물 상자를 말한다(A.T.Robertson). 박사들이 작은 상자에 담아 가져온 예물,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각각 예수의 신성과 왕권과 죽으심을 상징한다(72:10,11,15; 사60:2,3,6). 박사들이 이러한 예물을 예수께 드림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주며 진정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자의 참된 자세를 보여준다.
3)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귀국함
(crhmatisqevnte" kat! o[nar 크레마티스덴테스 카트 오나르, 12절)
크레마티스덴테스(Crhmatisqevnte")는 본래 '거래하다'는 의미이나 70인역(LXX)과 신약에서 '신탁하다, 가르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Deissmann). 박사들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 꿈에 신탁을 받아 헤롯의 박해를 벗어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McNeile)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받는다.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앞의 이야기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으며, 여타의 다른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제1세기 기독교 문서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조작인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 가치와 중요성은 사실성 여부와 관계가 없다(G.Buttick). 마태는 전기적 사실에는 관심이 없이, 기독론적 관심과 종말론적 관심에서 설화를 전개한다(H.Waetjen). 그러나 동방 박사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은 많은 면에서 역사적 가능성을 지닌다(Allen). 마태는 미래의 세상 왕을 영접하는 이방인과 그를 배척하는 유다 왕을 대조시킨다. 이것은 마태의 중심 관심사의 하나이다(Schweitzer). 본문은 마태가 갈릴리와 베들레헴의 전설들을 융합시켜 조작했다는 견해도 있다(E.Nellessen). 본문에서 예수 탄생은 다만 부수적인 언급에 불과하다(E.Schweitzer).
1. 박사들의 수소문(1-3절)
'유대'(1절)가 강조된 것은 스불론과 베들레헴의 구별과 메시야의 유다 지파 탄생 예언 때문이다(유24절;히7:14 계5:5,W.Allen, Davies). 본문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별들의 현상을 계산해 볼 때, 예수의 탄생은 B.C.7년(Schweitzer)에서 4년 사이로 보여진다(Davies). 그러나 마태의 관심사는 연대기가 아니라 예수가 헤롯의 통치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Davies). 박사 이야기는 발람(민24장)과어떤 역사적 사건들(Buttrick, Davies)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Schweitzer). 박사들이 왕과 함께 왔으며 세 명이라는 학설은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Schweitzer, Davies). 동방의 점성술은 오래 점부터 발전했으며(Pliny, Suetonius, Oefele), 유대교 역시 성행하여(Schweitzer) 메시야 탄생 소망이 널리 퍼져 있었다(Virgil, Allen). 마고이(mavgoii박사들)는 본래 메대족의 사제를 가리킨다(E.Bickerman, J.Moulton).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2절)은 아라비아(창10:30; 욥1:3; 사11:14 Tertullian, Dpiphanius), 바벨론(Celsus, Jerome, Buttrick, Allen), 페르시아(Clement, Chrysostom Cyril)등이라는 견해가 있다(Brown, Davies). 박사들이 본 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목성과 금성의 접근, 헬리 혜성의 통과(Buttrick)등으로 볼 때 본문의 기사가 사실일 가능성을 보여준다(Davies). 아나톨레(ajnatolh;동방)는 점성술의 기술 용어로서 민24:17의 아나텔레인(ajnatevllein;나오며)과 연결된다. 이 단어들은 70인역에서 메시야 예언에 사용되었다(민24:17; 시72:7 사43:19,Davies). '유대인의 왕'은 수난 기사와 비기독교 자료에 많이 나타나며(Josephus), 이방인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27:42; 막15:32; 요12:15,Davies). 헤롯은 에돔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왕좌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메시야 탄생을 두려워하였다(Waetjen, Schweitzer, Davies). 슈바이쳐(Schweitzer)는 이 소동이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주권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2. 헤롯의 음모(4-8절)
산헤드린은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되었다(눅22:66,Buttrick). 슈바이처(Schweitzer)는 산헤드린 소집이 마태가 성경을 인용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그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반면 버트릭(Buttrick)은 헤롯이 산헤드린 전체 회의를 소집한 것이 아니고 회원 중 몇 사람과 의논한 것이라고 본다. 마태는 히브리 본문과 70인역을 사용하지 않고 미가의 예언을 인용하였다(Waetjen, Allen). 여기에는 변경된 표현들이 많다.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6절)은 미5:2을 암시하지만 문자적으로는 다윗 언약(삼하5:2)에서 유래한다. 메시야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기대는 요7:42 Tg.Mic.5:1)등에 나타나지만(Lightfoot, Jeremias, Allen), 그에 대한 공적인 견해는 불분명하다(Davies). 본문은 역사적이리기보다는 변증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Brown, C.Dodd. Davies). '목자'에 대한 개념은 종말적 기대와 함께 나타난다(겔34:4,16; 미5:1-9 M.Sanh. 10:3, Davies). '별이 나타난 때'는 점성학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되며 그것을 통해 아기의 나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Buttrick). 헤롯이 군인들을 박사들과 함께 보내지 않은 것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위선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헤롯에 관한 다른 이야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Schweitzer). 클로스터만(Klostemann)은 헤롯이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을 때 그들과 함께 살인자들도 보냈을 것이라고 본다(Buttrick).
3. 박사들의 경배(9-12절)
유대 설화 중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장소 위에 구름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별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있는 집으로 인도한 것이다(Schweitzer). 10절에는 박사들의 기쁨이 선명하게 표현되었다(Schweitzer). 그러나 헤롯과 예루살렘은 박사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섰으며 에시야의 탄생선언은 축하와 축제로 이어지지 않는다(Waetjen, Davies). 예물(11절)은 왕에게 드리는 것이다(시72:10 아3:6 사60:6,Buttrick, Allen, Schweitzer). 황금이 왕을, 유향이 하나님을, 몰약이 죽은 자를 상징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막14:3,8;15:23;요19:5,Buttrick, Schweitzer, Davies). 꿈(12절)은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헤롯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뜻이다(Buttrick).
◈ 보수주의 주석 ◈
성경에서 본문만큼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 부분도 없을 것이다(W.Schulze, D.Carson). 동방 박사의 기사가 초자연적인 것인지 역사적인 것이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신학적 동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마태가 모세의 탄생 기사를 재편집하여 본문을 작성했다는 주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가 제기되지만(Carson), 마태가 의도적으로 모세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를 비교한 것은 분명하다(Gundry, Carson).
1. 박사들의 수소문(1-3절)
요세푸스의 헤롯 사망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B.C.5년말-4년초에 나셨을 것이다(A.Williams, W.Hendriksen, Hochner, Carson). '유대'라는 강조는 동일 지명과의 구분과(Plummer, Williams, Bruce, Carson)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Ridderbos). 생명의 양식인 예수께서(눅2:4) '떡집'(mjltyb베들레헴, 눅2:4)에서 탄생하신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두(ijdouv보라)는 박사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보여준다(Ridderbos). '동방'(ajnatolh아나톨레)은 페르시아(Diodorus, Vincent), 바벨론, 메대(Origen, Carr), 아라비아(Bruce)등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바벨론이 가장 유력한데(Hendriksen Ridderbos, D.Carson) 그것은 유대인 포로의 정착과 교류 가능성 때문이다. 박사(mavgoi마고이)는 페르시아어의 음역으로(Hendriksen) 메대와 바사, 바벨론의 사제, 천문학자(Williams)를 가리킨다(단2:2;4:6). 초대교회의 전승은 이들이 가르파르, 벨기올, 발타살로 이방 왕들이라고 하나(Tertullian, Olshausen) 이것은 전설일 뿐이다(Tasker, Ridderbos). 이들의 경배는 메시야 예언에 기초한 것이며(시68:29; 사49:7),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은 이방인들의 메시야 호칭이다(Plummer). 본문의 별은 실제의 별(D.Brown), 심리 현상(Spinoza), 혜성(Ridderbos), 목성과 토성의 결합, 폭발로 인한 초신성(超新星,Kepler, R.Brown, Carson)등의 견해가 있다. 한편 성경과 유대 문헌들은 메시야를 별로 상징한다(민24:17; 계22:16 Tasker, Carson). 그러나 민수기에서는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으므로 쉽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Ridderbos). 이들은 예루살렘을 수소문한 후에 헤롯에게 나아갔다(Lenski, Hendriksen). '소동'(taravssw타라쏘)은 '뒤흔들다, 흥분케 하다, 괴롭게 하다'는 뜻이다(Hendriksen).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므로 자신의 왕위를 다른 유대인이 차지할 것을 두려워했다(Ridderbos). 예루살렘 거민은 이러한 사실이 헤롯을 자극하여 잔인한 학정이 다시 시작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소동했다(M.Henry, Brown, Hendriksen).
2. 헤롯의 음모(4-8절)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메시야를 가리킴을 알고 있었다. 헤롯의 소집이 산헤드린이라는 견해와(De Wette, Holtzmann, Tasker, Ridderbos) 헤롯의 자문인들이라는 견해가 있다(Vincent, Johnson, Bruce). 서기관들의 대부분이 바리새인들로서 거의 모두 사두개인 출신인 제사장들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으나(Carson) 헤롯은 이들의 경쟁 심리를 이용하여 한 곳에 모았다. 이들은 풍부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답변하였지만 메시야를 영접할 마음 자세는 갖추지 못했다(Ridderbos). 6절은 5:2의 인용인데 삼하5:2(대상11:2)이 첨가되어 있다(tasker, Hendriksen). 마태는 본문을 독자적으로 변형시켰다(Gundry). '자세히 묻고'는 '꼼꼼하고 정확하게'라는 의미이다. 헤롯은 별이 나타난 시간을 자세히 앎으로 아기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Hendriksen, Ridderbos). 그리고 헤롯은 아기의 탄생 시기와 장소에 대해 박사들이 보고해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12절). 이것은 메시야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Calvin, Henry).
3. 박사들의 경배(9-12절)
별은 동에서 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의 별은 북쪽(예루살렘)에서 남쪽(베들레헴)으로 움직였다(Hendriksen). 그래서 혹자는 이 별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광(Shekinah)을 나타낸다고 한다(Barbieri).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한 것은 헤롯이었고(Ridderos), 이들을 구체적으로 인도한 것은 별이다(Lenski). '머물러 섰는지라'는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정확하게 아기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음을 의미한다(Hendriksen, Ridderbos). 10절이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는 강조를 위해 동일 단어를 중첩해 사용했던 셈어의 영향을 받은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Moule). 고대 세계에서는 지위가 높은 자나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을 바쳤다(삼상9:7; 왕상10:2,Derett, Clarke, Ridderbos, Carson), 본문(11절)은 이방 왕들이 메시야께 예물을 드리며 복종하리라는 예언의 성취이다(시45:8; 사60:5; 습3:10; 학2:7,8,Barbieri). 황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유향은 신성을, 몰약은 수난과 죽음을 나타낸다(Origen, Epiphanius, Henry, W.Barclay, Hendriksen). '지시하심을 받아'(crhmatisqevnte"크레마티스텐테스)는 '문의한 것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는 뜻으로(Vincent, Bengel), 헤롯의 부탁에 대한 박사들의 의문이 해결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꿈은 헤롯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이다(Henry, Williams, P.Gaechter).
◈ 주석연구 ◈
수성궤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 업적인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수성 궤도가 태양계의 다른 위성들과는 달리 일정한 타원형의 궤도를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수성의 궤도는 태양계의 다른 위성보다 타원형 궤도의 호각이 43초 정도 차이가 난다. 43초라는 궤도 호각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엄청난 크기의 궤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수성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이상한 궤도를 따라 도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처럼 수성이 이상한 궤도를 따라 무질서하게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제까지 한번도 태양계의 다른 위성과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피조된 우주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별이 동방 박사들을 인도했다는 사실은 결코 마태의 상상물에서 비롯된 문학적 표현이거나 전설에서 차용해 온 것이 아니라, 수성의 엉뚱한 궤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딪치지 않게 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의 계시 매개체로서의 별의 운행을 관찰한 천문학자의 혜안을 돋보이게 한다.
모형론(typology)
다윗은 미래에 태어날 메시야, 곧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실제로 삼하5:2의 말씀은 다윗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가됨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지와 다윗의 출생지가 동일함(삼상16:4,12,13;눅2:4,7), 왕권과 그 영광(삼하7:13; 눅1:32,33)등 이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따라서 모형론의 측면에서 이해할 때 삼하5:2에 기록된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는 6절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와 깊은 연관성이 맺고 있으며, 다윗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점성술 문화Ⅰ(2:1-12)
◈ 세계배경 문화사 ◈
점성술은 별의 운행이나 새로운 별의 출현, 기존에 있던 별의 사라짐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이나 미래의 일을 예견하였던 학(學) 또는 술(術)이다. 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연구는 일찍이 근동 지방에서 발달되었다.
근동
근동에서 점성술이 가장 발달하였던 나라는 바벨론이다. 바벨론 사람들은 주전 7세기이전에 이미 천상에서 벌어지는 것과 지상의 사건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앗시리아의 앗술바니팔(Ashurbanipal, 668-633, B.C.) 왕의 서고에서 나온 토판에는 별의 위치에 따라 지상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미 별을 연구하여 만든 황도대가 작성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B.C.280년에는 바벨론의 제사장 베로수스가 코스(Cos) 섬에 점성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바벨론의 점성술은 후에 이집트로 전파되었다. 이집트의 점성술은 바벨론의 점성술에 비해 현격하게 조잡스러웠으나, B.C.3세기의 셀류커스 왕조 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점성술을 말할 때는 바벨론의 점성술을 언급한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점성술에 동요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조소하고 비판하였다(사47:13).
동양
바벨론의 점성술과 쌍벽을 이루는 것은 중국의 점성술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천관서(天官書)편을 보면 점성술에 대한 이론이 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인 「천문지(天文紙)」에도 앞서 언급된 사마천이 기술한 점성술과 내용, 방법면에서 매우 비슷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별의 이동이나 위치에 대해서 매우 세심하게 관찰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점성술을 발달시켰다. 중국 「전한서(前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 시기와 거의 유사한 B.C.5년경, 곧 건평(建坪) 2년 2월에서부터 약 70여일간혜성과 같은 것이 빛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별에 대한 연구가 중국에서 세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박혁거세(朴赫居世) 54년 2월에 별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도 별에 대한 연구가 매우 진전되어 세계에서도 우수하다고 인정하는 천문 관측소인 첨성대까지 설치하였다.
서양
서양의 점성술은 동양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후대에 나타난다. B.C.43년경에 키케로(Cicero)가 점성술에 대해 반박하는 저서를 썼다. 그러나 서양의 점성술은 A.D.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우스(Ptolemaeus)의 저서인 「알마게스트」(Almagest)에서 체계화되어 나타났다.
성경적 접근
별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창1:17). 이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본문에 언급되는 별은 그 일례(一例)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백 년 동안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하늘의 별과 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박사들을 이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별과 같은 피조물은 하나님 계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인 별을 숭배하거나 별 숭배를 장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명령에 위배되는 일이다(20:4,5).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불에 타은 초개(草芥)처럼 흔적도 없이 소각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사47:14).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두려움과 위선과 기만(2:1-12)
더러움은 빛 앞에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악은 선앞에서 그 실체가 밝혀진다. 그리스도의 탄생 직후 사단의 속성과 그 행태는 헤롯과 그 일당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 두려워하는 왕
박사들의 고백은 헤롯 왕가에 큰 소동을 일으켰다. 유대인의 왕이 또 다시 출현했다는 내용 때문이다. 사실 헤롯 왕가는 이두매 출신이다. 정통 유다 왕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항상 백성의 민란과 정통 유대 왕족 출신의 등장을 두려워했다. 이처럼 사단도 이 세계에서 거짓 왕 노릇을 해왔다. 죄와 죽음의 권세로 인류를 다스려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참된 생명의 왕이 오시니 그 거짓 보좌를 내놓아야 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 사단의 하수인인 귀신들의 고백에서도 사단의 두려움이 반영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여…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8:29).
2. 위선에 사로잡힌 자들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 헤롯이 먼저 한 일은 성경의 예언을 묻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뇨"(4절). 이에 어용 학자들은 정확하게 예언의 내용을 밝혔다. 헤롯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끊기 위해, 어용 학자들은 아부를 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밝힌 것이다. 즉 진리를 찾되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야망과 이익의 재료로 쓰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했다. 사단의 처음과 끝 모두가 이처럼 위선적인 것이다.
3. 기만의 천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 헤롯은 기만의 천재이다.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그 소재지를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끊으려고 박사들을 기만하였다. 진리와 자유, 정의와 양심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남을 속인 자가 헤롯이다. 그래서 사단의 별명은 '속이고 온 천하를 꾀는 자'(계12:9)이다. 그와 같은 사단의 행태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별과 예언과 박사들(2:1-12)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하여 여러 가지 현상과 사건이 등장한다. 즉 별의 출현 예언의 공표 그리고 동방 현자들의 방문 등이다.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일까?
1. 구원의 표징을 보여줌
별은 일찍이 천기의 증표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나라의 역사가 암울할 때 큰 별이 나타나는 것을 국운이 살아나는 길조로 여기기도 한 것이다. 별은 곧 희망의 상징이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행27:20)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이 세계는 진정한 생명과 진리에의 여망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인류의 영원한 희망과 구원의 표징으로 구세주가 오신 사실을 별이 나타낸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이 승리했음을 보여줌
박사들의 체험과 고백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예언서를 읽었다. 곧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 내용이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약속이요, 의지요, 결심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절대적인 의지가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의미를 지닌다. 사단의 어떤 훼방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선하신 뜻은 영영히 선다. 말구유 안에 잠든 아기 예수는 선하신 하나님의 결심과 의지의 화신이요, 하나님 섭리의 승리의 표징이다.
3. 의인의 승리를 보여줌
중요한 것은 동방 박사들이 탄생하신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연구했던 현자들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천문학자들이다. 이 땅의 역사의 한계를 알고, 오직 하늘의 구원의 징표를 구한 참된 학자들인 것이다. 이 땅의 허영과 욕심에 눈을 판 사람들이 아니라 저 높은 본질과 이상과 하늘의 메시지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했음을 기억하자. 이는 이 세계와 역사가 오늘도 높은 곳에 관심을 둔 사람들의 것이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예수의 애굽 피신과 헤롯의 유아 학살(마2:13-18)
◈ 원문강해 ◈
헤롯의 추적과 유아 학살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는 아기 예수
동방박사들이 나타나 왕의 탄생을 알렸을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노리게 될 '후환'을 없앨 음모를 꾸미던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속은줄 알고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두 살 이하 유아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와 그 부모는 이미 애굽으로 피하신 후였고 베들레헴에서는 예레미야에게서 예언된 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1. 천사가 애굽으로 피할 것을 지시함(13,14절)
본서에만 나오는 독특한 이 기사는 특히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신했던 것은 그가 구원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생활을 상징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1) 천사가 애굽으로 피할 것을 지시함
(!Anacwrhsavntwn de; aujtw'n ... feu'ge eij" Ai[gupton ... @Hrwv/dh" zhtei'n to; paidivon tou' ajpolevsai aujtov 아나코레산톤 데 아우톤…퓨게 에이스 아이귀프톤…헤로데스 제테인 토파이디온 투 아폴레싸이 아우토, 13절)
12절에 이어 본절에 사용된 아나코레산톤(!Anacwrhsavntwn)은 ajnacwrew(아나코레오;떠나다)의 부정 과거분사로서, 동방박사들이 헤롯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 급히 떠난 사실 또는 그 행동을 암시한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14절에서 예수의 부모가 밤중에 일어나 피신하는 데 사용될 때는 천사의 지시에 특별히 따른 것이다(J.H.Moulton & G.Milligan). '피하여'에 해당하는 '퓨게'(feu'ge)도 명령형으로 역시 '도망 중에 안전함을 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W.Bauer). 아폴레싸이(ajpolevsai죽이려 하니)는 관사의 소유격(tou'투)과 더불어 사용되어 목적을 나타낸다. 이 용법을 통해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잔인한 의도를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 헤롯은 당시 유대 메시야 사상을 근본적으로 척결하려고 잔악한 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2) 애굽으로 피해가는 아기 예수
(parevlaben to; paidivon kai; th;n mhtevra aujtou' nukto;" kai; ajnecwvrhsen 파렐라벤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 아우투 뉘크토스 카이 아네코레젠, 14절)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오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했던 요셉은 밤중에 피할 것을 명하는 천사의 명령에 즉각 순종해 '밤에'(nukto;"뉘크토스) 아기 예수와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 13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to; paidivon kai; thvn mhtevra)라고 하여 '아기와 모친'의 순서인 것은 의미가 있다. 아기 예수는 탄생한 순간부터 그를 낳아준 모친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들보다 앞서는 지위를 차지하는 위대한 메시야였던 것이다(F.F.Bruce).
2. 애굽에 거하는 아기 예수(15절)
급히 애굽으로 피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보호하려는 의도와 아울러 보다 중요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는 성육신의 비하(卑下) 과정에서 더욱 더 낮아지시는 과정을 보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과거 애굽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멸시키지 못했듯이 헤롯도 애굽으로 피한 예수에 대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음
(hejkei' e{w" th'" teleuth'" @Hrwv/dou 엔 에케이 헤오스 테스 펠류테스 헤로두, 15a절)
예수의 가족이 애굽에 머물러 있었던 기간에 대해 확실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지만, 헤롯의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으므로(Sandmel), 만약에 헤롯의 사망 직후에 예수의 가족이 귀환했다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예수의 가족은 애굽에 거주하던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애굽에 가신 아기 예수
(i{na plhrwqh'/ to; rJhqe;n uJpo; kurivou dia; tou' profhvtou 히나 폴레로테 토 레덴 휘포 퀴리우디아 투 프로페투, 15b절)
히나 플레로데(i{na plhrwqh'/)에서 플레로데는 가정법(subjunctive)인데 히나가 가정법과 함께 목적을 나타낸다. 즉 예수가 애굽에 가신 것은 바로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강한 목적성을 가진다. 호11:1의 인용 부분인 본문은 17인역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보아 히브리어 본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세아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 받아 나오는 것을 가리켰으나, 마태는 그러한 출애굽의 이미지를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야로서 참이스라엘이 누리게 될 '죄로붙의 구원'의 상태를 이루기 위해 과거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체험을 반복하셨다. 그 결과 예수는 구약시대의 모세를 이은 제2의 모세로 나타나신다.
3. 헤롯의 유아 학살(16-18절)
동방 박사들에게 속아 아기로 태어난 왕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헤롯은 극악 무도한 유아 살해의 범죄를 저질렀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막을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대로 방치하셨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위에서 애굽에서 나오신다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목적이 강조된 반면, 여기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부정과거형 '이루어졌느니라'라는 결과를 강조한다.
1) 헤롯의 잔인무도한 유아학살
(ajnei'len pavnta" tou;" pai'da" ... ajpo; dietou'" kai; katwtevrw 아네일렌 판타스 투스 파이다스…아포 디에투스 카이 카토테로, 16절)
박사들을 속이려한 헤롯은 당연히 그 아이의 나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의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였다. 투스 파이다스(tou;" pai'sa"사내 아이)가 남성 복수인 것으로 보아 여자 아이들은 제외되었던 듯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헤롯이 하나님께 심판받을 행위였다. 혹자는 여기서 '두 살부터 그 아래'(ajpo diet ou'" kai; katwtevrw아포 디에투스 카이 카토테로)의 아이들이 죽임당한 것을 두고 이미 아기 예수의 나이가 두 살즘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예수는 헤롯이 죽기 직전에 탄생한 것이 분명하며(A.Eder sheim) 최대한으로 잡아도 예수는 태어난 지 6개월 이전에 애굽으로 피신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Hendriksen).
2)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됨
(ejplhrwvqh to; rJhqe;n upJo; !Ieremivou tou' profhvtou 에플레로데 토 레덴 휘포 예레미우투 프로페투, 17,18절)
마태가 제시하는 이 예레미야서의 인용 부분은 그저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여기서 마태가 인용하는 렘31장은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위로로 가득 차 있다. '라마'라는 지명은 예루살렘 북방 10㎞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접경 지대였다(왕상15:17). 그러므로 이 지명은 두 왕국을 대표할 수 있다. 또한 라헬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아비 요셉을 낳았는데 열 지파가 단순히 에브라임으로 통칭되는 것으로 보아 라헬은 이스라엘을 대포하며 또한 베냐민은 유다의 상징일 수 있다(Hendriksen). 따라서 '라헬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위로받을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헤롯의 유아 학살로 말미암은 베들레헴의 통곡 소리에 대해 그리스도는 합당한 위로를 베풀 것을 암시한다. 이 세상의 진정한 위로자되시는 예수는 참된 영적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11:28-30).
◈ 진보주의 주석 ◈
본 단락은 예수 가족의 애굽 피난 설화를 다룬다. 마태는 이 설화를 구약 예언의 완성이라는 구조로 설명한다. 예수 가족의 애굽 피난은 구약의 지도자 모세를 모방한 제2의 새로운 모세로 예수를 표현하려는 편집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 진다(E.Schweitzer, W.C.Allen, R.H.Gundry). 그러나 혹자는 이 사건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영적 경험을 표출하는 것으로 본다(W.F.Albright).
1. 피난 명령(13절)
박해로부터의 피난 주제를 다루기 위해 마태의 편집자는 본 절에서 눅2:22과는 달리 애굽 피난의 설화로 대치해서 기록했다. 이것은 모세의 삶과 대조시켜서 예수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다(R.H.Gundry). 또한 예수 가족의 애굽 피난의 배후에 신적 개입과 돌보심이 있었음을 천사의 계시로 표출시키고 있다. 새로운 신적 개입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는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를 사용하여 1:20의 계시적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본절에서 마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신적 개입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사적 현재형 파이네타이(faivnetai현몽, 나타나다)를 사용한다. 또한 본절의 에겔데이스(jEgerqeiv"잠을 깨다)는 1:24의 반복이고, 파랄라베(paravlabe데려오다, 받다)는 1:20을 생각나게 한다(R.H.Gundry). 본절은 바로가 유아 살해를 명령하는 모세 설화 속의 내용과 비슷하다. 모세 이전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애굽 피난도 본절과 유사성을 드러낸다. 피난 장소로 애굽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그곳이 유대인들이 다양한 이유로―정치적 박해, 복수의 위험, 경제적 압박 등―인해 자주 피난가던 곳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초대교회 당시 애굽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R.H.Gundry, W.F.Albright).
2. 애굽 체류(14,15절)
본 단락에서는 그 당시 예수에 관한 그릇된 전승―예수가 애굽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그곳에서 다양한 마술을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서 그 배운 것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성을 주장했다―에 대하여 예수의 애굽 체류에 대한 구약과의 관련성을 예언 완성의 구조로 기록하고 있다(W.F.Albright). 예수의 애굽 도피와 체류는 그의 유아기에 있었던 일이므로 그릇된 전승에서와 같이 마술을 배워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유대교의 그릇된 전승은 기독교 전승에 확실한 배경이 되지 못한다(E.Schweitzer). 본 단락 끝에 있는 호11:1의 인용문은 예수의 애굽 도피와는 무관하다. 실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고통에서 구원하셨는가를 서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태가 호11:1을 본 단락에서 인용한 것은 내용적 관계가 부족하더라도 문자적 연관성을 찾아내서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만드는 그의 의도적 표출이다. 마태는 예수가 약속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과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고 했다(W.C.Allen, W.F.Albright, E.Schweitzer).
3. 라마의 통곡(16-18절)
본 단락에서 헤롯이 유아 살해의 명령을 내리는데, 이에 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사실이 없었다기보다는 그 당시 베들레헴의 규모로 봐서 적은 규모의 살상만이 있었기 때문에 요세푸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헤롯의 흉폭한 성격으로 미뤄보아 유아 살해는 잔혹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W.F.Albright). 본 단락 끝에서도 마태는 렘31:15을 인용했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 텍스트를 마태가 임의로 번역했거나 70인역(LXX)이 아닌 다른 어떤 헬라어 번역을 인용한 듯 하다(W.C.Allen). 렘31:15에서 예레미야가 의미한 것은 헤롯의 유아 살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 구절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에 라마가 있다. 라마는 야곱이 사랑하던 부인 라헬이 묻혀 있는 곳이다(삼상10:2). 예레미야는 묻혀있는 라헬도 이스라엘의 비극을 슬퍼한다는 의미에서 라마의 통곡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헤롯의 유아 살해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언 완성의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태가 특별히 유대인을 많이 의식하며 글을 편집했기 때문이다(E.Schweitzer, W.C.Allen, R.H.Gundry).
◈ 보수주의 주석 ◈
본 단락은 헤롯의 영아 살해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며 아기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본 단락의 사건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후자는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니며 바로의 히브리 영아 살해 사건과 비교하기 위한 마태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롯의 포악성과 잔인성으로 보아 이런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헤롯은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제거시켜 왔다. 따라서 단지 다른 기록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속단이다(J.Calvin, Alford, W.Hendriksen, Bruce). 최근에는 이 사건이 마크로비우스(Macrobins)의 「축제」(Saturaalia)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 주의 사자의 피신 명령(13절)
본 절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증명하기 위한 마태의 의도적 삽입으로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R.Gundry, E.Schweitzer, Hill).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모세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1장의 족보가 모세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통만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D.Carson). '일어나'(egerqei"에게르데이스)라는 표현은 분사로서 뒤의 명령형(데리고)과 연관되어 있는 말로 요셉으로 하여금 명령을 받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바로 행동을 취하라는 촉급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당시 애굽은 피난하기에 적합할 장소였다. 필로에 의하면 그 당시에 약 100만명의유대인이 애굽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나안 땅과 애굽 사이에는 큰 사막이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의 애굽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헤롯의 손길이 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애굽에의 거주(14,15절)
마태는 예수의 애굽 거주와 귀환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호11:1)라는 예언의 성취라고 본다. 이 구절의 인용은 70인역이 아닌 히브리 성경의 번역으로 보인다. 본 절에 대한 해석들은 다음과 같다. ①이스라엘의 원형과 예표인 예수가 이스라엘의 체험을 반복하셨다(Calvin, Carr, R.Tasker, Carson). ②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예언을 성취했다. ③호세아가 메시야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을 마태가 인용했다. ④호세아가 모르는 내용을 마태가 밝혔다(W.LaSor). ⑤예수는 그의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어 약속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갔던 애굽으로 내려가셨다(B.Murray).
3. 헤롯의 영아 살해(16-18절)
혹자에 의하면 마태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구원자인 모세가 애굽의 전제 군주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당했듯이 두 번째 구원자 예수도 그러했다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한다.(B.Murray). 2살 이하를 죽이라는 명령은 별이 나타난 시점을 근거한 것이다. 이런 본문이 암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①아기를 제거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짐 ②박사들이 별을 본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간을 생각함 ③박사들이 귀국한 후 2년만에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의미라는 주장들이 있다. 한편 '2살 이하'라는 규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15-20개월로 보는 견해와(A.Rovertson) 6-20개월로 보는 견해(Carson)가 있다. 이 사건으로 살해된 아이의 숫자에 대해서도 소수라는 주장(Carr)과 다수라는 주장(Alford)이 있으며 전승에 의하면 14,000명이었다고도 한다. 아기 어머니들의 통곡은 라헬의 울음을 생각나게 한다. 라헬은 야곱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돌아오는 중 죽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장사되었으며 그녀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그 자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슬피 운 것으로 상징되었다(렘31:15). 미드라쉬는 라헬을 길가에 장사한 것이 포로민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실제 내용은 위로이다. 구원이 가까웠으므로 자녀들은 돌아오게 된 것이다(렘31:16,17,B.Murray). 마태는 바벨론 포로를 전환점으로 생각하여 메시야의 도래로 새 언약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Carson).
◈ 주석연구 ◈
아기 예수의 애굽 피난을 예정하시고 섭리하심(13-18절)
세상을 구하려 인간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의 쫓김을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피난했다가 귀환한다. ①헤롯 왕이 내린 유아 학살령은(13,16절) 바로 왕이 히브리 남아를 출산함과 동시에 산파로 하여금 죽이게 하라던 명령(출1:16)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통치 체제에 대한 도전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왕권 유지 차원의 무력 행사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택한 자를 감동케 하시어 세상의 악을 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택한 자를 통하여 전파함으로써 세상을 구원코자 하심이다. 헤롯 왕이나 바로 왕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슬리고자 하는 악의 종들이며 하나님의 징계 대상이 된다. ②마태는 예수 탄생에 즈음하여 잠과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처음으로 요셉에게 현몽하여 마리아을 주저하지 말고 데려오도록 하였고(1:20,24), 동방박사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계신 곳'(2절)을 헤롯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예방했으며(12절), 요셉에게 두 번째 현몽하여 애굽으로 피난케 하였으며(13절), 세 번째는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의 죽음(20절; 출4:19)을 알려 귀환케 하였다. 마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자의 현몽은 동방박사에게 별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친히 섭리하고 계심을 밝히고 있다. ③예수의 피난처가 된 애굽은 야곱과 그 가족이 양식을 구하던 중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른 요셉을 만나 아주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야곱의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공동체로 형성되는 초기에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이 어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사실(출4:22)은 애굽에 피신한 아기 예수를 헤롯 왕이 죽은 뒤에 불러내실 예정(2:20)을 예고한 그림자와 같은 사건이다(15절;호11:1) ④헤롯이 동방 박사와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과 선지자의 예언(1-8절;미5:2)을 모두 믿고 두려워 두 살 이하의 아이를 죽인 사건도 이미 예언(렘31:15)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하심의 사건인 것이다.
사자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2:13-18)
◈ 세계배경 문화사 ◈
각 민족들의 정서를 살펴보면 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중에서 사자 혹은 천사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을 강하게 지배해 왔다.
근동
고대 페니키아에서는 '엘욘'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높은 곳의 신들'이라는 의미로서 지하 세계의 신들과 대조되는 말로 쓰였다. 고대 힛타이트에서도 '천상'과 '지하'의 신들이 언급되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날개 달린 천상의 존재로 묘사되는 '그룹'에 관한 기록이 있다. 즉 그 문서에서는 '카리부'(Karibu), 즉 '중생자' 가 기록되었고 이는 '날개달린 수호신'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자들의 모습은 B.C.9세기 갈그미스와 니므롯, 사마리아 등지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길가메쉬의 바벨론 서사시(Tablet Ⅸ, col.ii)에서는 해가 뜨고 지는 산을 지키는 악마적인 '전갈인'과 비교된다. 한편 페르시아의 가다스(Gathas)와 젠드 아베스타(Zend Avesta)에서 발견된 기록을 보면,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원론적 사고에서의 절대적인 천사 즉 '사단'과 '방해자'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동양
한국인의 정서에서 '사자' 혹은 '천사'는 귀신보다는 한 차원 높은 존재로 여겨졌다. 특히 고대인들의 사고 속에는 이원론적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선한 천사와 공포스럽고 두려운 천사가 구분되었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을 베풀면 천사가 보살핀다고 생각했고, 악하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악한 천사가 벌을 내리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나 극악 무도한 죄인은 저승 사자가 데리고 간다고 믿고 있었다. 이중에서 저승 사자는 특히 한국인의 정신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으며 항상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영적 존재를 인간적인 차원으로 낮추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신은 인간과 친숙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사자' 혹은 '천사'의 개념이 대개 '수호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한 개인이나 집단을 지키고 보호하는 자였다. 예를 들면,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Hera)는 미케네의 고데 수호신이었던 암소의 여신이었고 포세이돈은 어부들이 수호신으로 믿었다. 로마 역시 그리스와 거의 흡사한 형태의 사자개념을 지녔다. 동양처럼 특정한 한 천사나 사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 개인을 수호하거나 농사, 수확, 출산 등 각종 상황을 수호하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성경적 접근
천사는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실상 천사 혹은 사자들은 2천년 이상 성경의 각 지역에 나타났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천사들의 실재를 단언적으로 말했고 애써 그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자 혹은 천사는 고대 근동이나 서양에서와 같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요 종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피조물로 나타나고 있다(골1:16). 그렇지만 천사는 거룩성을 지닌 존재임과 동시에 특권을 지닌 존재요, 제한성을 지닌 존재이다(24:36). 그러나 이러한 천사도 성도, 즉 하나님의 백성을 부러워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은 성도들을 부러워하는 것이다(벧전1:12). 천사들은 오늘날도 기적과 이적으로 성도들을 인도하고(행12:10) 천계를 왕래하며 봉사하고 있다(히1:14).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사단의 모형(2:13-18)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을 '유능하고 간교하며 잔인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왕권을 위해서는 처남도, 왕비도, 또 왕자들도 살해한 냉혹한 통치자였다. 그런 그가 메시야로 알려진 예수를 없애기 위해 다수의 영아들을 살해한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게서 사단의 모형을 찾아보자.
1. 사망의 왕으로서의 모형
그는 유달리 왕권에 대해 예민했다. 누가 자신보다 백성의 인기를 끌면 못 견뎌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없애는 정책을 썼다. 그의 처남인 대제사장이 백성들에게 호감을 끌자 수영 파티를 열어 처남을 익사시킨 예도 있다. 이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무기로 그의 권좌를 지켰다. 사단도 죽음을 무기로 그의 권세를 지킨다. 죄로 인류를 유혹하고 끝내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것이다.
2. 적그리스도로서의 모형
헤롯이 영아들을 죽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는 사단의 활동 목적과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는 그분의 생명을 빼앗고자 애썼다. 그래서 끝내 십자가의 죽음까지 몰고 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박멸코자 힘쓰고 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12:4)라고 성경은 교회를 잔멸하려는 사단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3. 멸망자로서의 모형
잔인했던 헤롯도 결국은 죽음의 길로 갔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헤롯은 다시는 회개할 개회도 없이 멸망의 길로 갔을 것이다(히10:27). 사단의 별명도 '멸망의 아들'(살후2:3)이다. 그의 운명은 끝내 파멸이다. 영원한 무저갱의 불못에서 그의 하수인들과 함께 멸망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사단의 하수인이자 확실한 모형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사단의 모형을 띤 인생들이 속출한다는 점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두 왕의 삶(2:13-18)
대개 훌륭한 왕은 뼈를 깎는 고낭의 시기를 겪는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의 어린 시절도 예외는 아니다. 헤롯 대왕의 음해를 피해 유년기부터 망명 생활로 고난은 겪었다. 그 두 왕의 삶을 대비해보자.
1. 한 왕은 고난으로 지혜를 얻었음
당시 헤롯은 60세의 고령이었다. 그의 왕권은 권모술수의 계교로 다져진 것이다. 로마 제국에는 아부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재건의 계략으로써 '헤롯대왕'이라고 불렸다. 그는 권좌를 위해서 자신의 왕비와 왕자도 죽인 냉혈한 왕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와는 달리 삶은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지혜를 얻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고 했듯이 그리스도는 헤롯의 권모 술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과 덕과 지혜를 고난을 통해 갖추신 것이다(히2:9-11).
2. 한 왕은 폭력으로 한 왕은 사랑으로 행함
헤롯은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유아 대량 학살 정책을 썼다. 온 베들레헴은 공포와 애통의 천지가 되었다. 세상의 왕권 유지에는 백성의 고통과 희생이 수반된다. 그러나 우리 왕이신 주님의 정치는 어떠한가? 오히려 자신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 왕국을 세우셨음을 우리는 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왕이 아니라 섬기고 사랑하려고 오신 왕은 우리 주 예수 뿐이다.
3. 한 왕은 죽고 한 왕은 영원함
세상의 왕권은 유한하다. 헤롯도 죽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오늘도 살아계신다. 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사망과 음부의 열쇠'(계1:18)을 가지고 생사화복의 왕노릇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와 같이 헤롯과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대조해 볼 때 성도의 삶의 결과도 드러난다. 그들에게는 이 땅의 고난 후에 영원한 승리가 주어질 것이다.
헤롯 사후 나사렛에 정착하신 예수(마2:19-23)
◈ 원문강해 ◈
마태가 진술하는 예수의 유년가 및 청년기의 생활 근거지에 대한 유일한 기록
아기 예수의 목숨을 찾으면 권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헤롯이 죽자, 천사는 다시금 요셉에게 나타나 귀국할 것을 명하였다. 요셉의 가족은 귀국하였지만,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를 두려워하여 유대 땅에 머물지 못하고 마리아와 요셉의 본래 주거지인 나사렛에 정착하였다.
1. 헤롯의 죽음과 천사의 귀국 명령(19,20절)
1) 헤롯의 죽음
(Teleuthvsanto" de; tou' JHrwv/dou텔류테산 토스 데 투 헤로두, 19a절)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의 죽음은 비참한 것이었다. 내장이 썩어가고 악취를 내뿜는 호흡과 구더기가 날 정도로 심하게 곪은 고환, 멈추지 않는 경련 등이 그 증상이었다. 그는 거의 70세가 되어서 통치 38년만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의 비참한 죽음을 더욱 부추기는 사실은, 자신의 아들 안티파터(Antipater)를 죽인 지 단 5일만에자신도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죽기 직전에 헤롯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유대의 주요 인사들을 여러 곳의 경기장에 감금시킨 후 자신이 죽으면 그들도 죽여서 애곡 소리가 들리도록 하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비록 헤롯이 죽고 난 후에 그 계획은 취소 되었지만 요세푸스가 요약한 대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극도로 잔혹한 인간이었고 자기의 분노에 얽매인 노예"로서 살아갔으며 죽을 때도 바로 그런 모습으로 죽어갔다.
2) 천사가 귀국을 명함
(levgwn, !Egerqei;" paravlabe to; paidivon kai; th;n mhtevra aujtou' kai; poreuvou eij" gh'n !Israhvl: teqnhvkasin ga;r oiJ zhtou'nte" th;n yuch;n tou' paidivou레곤 에게르데이스 파랄라베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 아우투 카이 포류우 에이스 겐 이스라엘 테드네카신 가르 호이 제툰테스 텐 후쉬켄 투 파이디우, 19b,20절)
2:13에서 하나님의 천사는 아기 예수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면서 돌아와야 할 때를 지시할 것이라고 말하였던 바,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에서 단수 대신에 복수(oiJ zhtou'nte" th;n yuch;n tou' paidivou호이 제툰테스 텐 후쉬켄 투 파이디우)가 사용된 것에 대해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헤롯의 죽음 5일 전에 죽은 안티파터를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A.Clarke). 그렇다면 요셉이 헤롯을 이은 아켈라오를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인가(22절)? 또한 헤롯과 그의 군병들(구체적으로 베들레헴 유아 학살에 동원되었던 군병들)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그 군병들이 갑자기 모두 다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복수는 오히려 헤롯의 죽음을 가리키는 일반적 복수로 보는 것이 좋다(F.Blass & A.Debrunner, A.T.Robertson). 이런 복수형을 통해 아기 예수의 목숨을 찾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잡고자 했던 바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모세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으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출4:19). 이곳에서 천사가 언급하는 복수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Bengel, F.F.Bruce).
2. 예수의 출애굽(21절)
1) 귀국하는 예수의 가족
(oJ de; ejgerqei;" parevlaben to; paidivon kai; th;n mhtevra aujtou' kai호 데 에게르데이스 파렐라밴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데라 아우투 카이 에이셀덴 에이스 겐 이스라엘, 21a절)
애굽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요셉은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향한다. 14절에 나타나는 '밤에'(nuktov"뉘크토스)라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그리 위급한 상황이 아니므로 정상적인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Israhvl)이라고 표현된 것은 일반적인 국명 혹은 지역을 의미하지만, 아마도 요셉 일행은 베들레헴으로 향하였을 것이다(22절). 그들 조상의 고향인 그곳에서는 친지들로부터 도움을 받을수 있었을 것이며, 신앙 생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인접해 있다는 지역적 요건이 바로 그들의 베들레헴행을 결정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W.B.Hendriksen).
2) 예수 귀국의 의미 :출애굽 사건의 영적 경험
(eijsh'lqen eij" gh'n !Israhvl에이셀덴 에이스겐 이스라엘, 21b절)
20절에 나타나는 천사의 명령이나 예수 가족의 이스라엘행을 기술하는 본서 기록자의 진술에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땅'(gh'n !Israhvl겐 이스라엘)이라고 기록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이것은 과거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인 땅을 지시하시고 그 땅에서 민족의 번성과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약속하신 것(창12:1-3)과 연관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에도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심으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영적으로 경험하셨으며 장차 그것을 왕성하실 것이다. 예수의 가족이 들어섰던 구체적인 지명(아마도 베들레헴)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지명인 '이스라엘 땅'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3. 나사렛에 정착하신 예수(22,23절)
1)요셉이 유대에 있기를 두려워함
(ajkouvsa" de; o{ti !Arcevlao" basileuvei th'" !Ioudaiva" ajnti; tou' patro;" aujtou' JHrwv/dou ejfobhvqh ejkei' ajpelqei'n아쿠사스 데 호티 아르켈라오스 바실류에이 테스 유다이아스 안티 투파트로스 아우투 헤로두 에포베테 에케이 아펠데인, 22a절)
죽은 헤롯의 아들 중 유대와 이두래 사마리아를 통치하게 된 아켈라오의 등장에 대해 요셉이 '무서워하였다'(ejfobhvqh에포베데)는 것은 단순히 그가 헤롯의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헤롯의 죽음 무렵에 예루살렘에서는 유대 랍비 유다스와 맛디아스가 제자들을 부추겨 성전 문 위에 세워져 있던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상을 파괴했다. 이 일로 인해 두 랍비들이 죽임당한 데 대해 유대인들은 헤롯의 죽음 후 곧 다가온 유월절에 큰 폭동을 일으켰다.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3,000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헤롯의 잔악한 기질 못지않게 아켈라오도 난폭한 통치자였으며 그런 사건을 경험하게 된 요셉은 그곳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였다.
2)나사렛에 정착하는 예수 가족
(crhmatisqei;" de; kat! o[nar ajnecwvrhsen ... Nazarevt: o{pw" plhrwqh'/ to; rJhqe;n dia; tw'n profhtw'n o{ti Nazwrai'o" klhqhvsetai 크레마티스데이스 데 카트 오나르 아네코레센…나자렛 호포스 플레로데 토 레덴 디아 톤 프로페톤 호티 나조라이오스 클레데세타이, 22b,23절)
나사렛은 한갓 보잘 것 없는 도시로서 구약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 가족이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이곳에 거주했었기 때문이다(눅2:39).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표현에 대한 구체적인 모든 견해들은 주석 부분을 참조하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언급이 구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여러 설명이 있지만 본래 나사렛이라는 곳은 멸시의 대상이었지만(요1:46;7:52) 후에 예수로 인해 그 명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마태는 예수의 애굽 피난과 귀국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이 또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은 본래 연약한 민족이었으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큰 백성이 되었듯이, 예수의 삶이 그러했고 또한 예수께서 이를 영적 이스라엘이 그런 과정을 밟게 되리라는 점을 마태는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o{pw" plhrwqh'/호포스 플레로데)는 상용구를 통하여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 진보주의 주석 ◈
1. 헤롯의 죽음(19절)
헤롯은 B.C.4년에 죽었다. 이것은 마태의 글에서 인용한 연대 표시이다. 일반 역사의 연대를 만든 이는 6세기초 어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s)라는 사람이다. 그는 예수 탄생의 시기를 로마시가 세워진 지 753년 후라고 잘못 추정했다. 그러나 헤롯은 그 사건의 4년 전이나 로마시 건설 후 749년에 죽었다. 그러므로 그가 B.C.4년에 죽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앞단락 16절의 사건을 정확한 것으로 여긴다면 예수 탄생의 시기는 B.C. 4년-헤롯이 죽은 해-에서 B.C.9년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W.F.Albright).
2. 요셉 가족의 귀환(20-22절)
본 단락에서도 앞의 애굽 피난 설화와 마찬가지로 신적 개입과 돌보심에 의해 요셉 가족이 애굽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20절의 '이스라엘 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여기서도 편집자는 모세설화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설화에서 어구도 빌려오고 있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출4:19절(칠십인역)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마태에서는 출4:19의 '다'(all)라는 표현 대신에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라는 복수 형태만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초점을 헤롯으로 집중시키려는 편집자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R.G.Gundry, E.Schweitzer). '목숨을 노리는'이란 표현은 셈어적 표현으로써 구약의 표현을 빌려 왔음을 알 수 있다(R.H.Gundry). 앞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로서보다는 '아기의 모친'으로 언급되고 이으며 그 모친의 언급 앞에 '아기'의 언급이 있다. 이것은 구약 모세설화의 내용과는 상이한 표현으로써 동정녀 탄생의 임마누엘 아기 예수가 그 중요성에 있어서 모세를 능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R.H.Gundry). 또한 출애굽기의 '돌아간다'는 표현 대신에 '들어오니라'는 표현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목적지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여기서도 신적 명령에 대한 요셉의 순종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R.H.Gundry). 헤롯의 사망 이후 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 중에서 유대를 통치하는 아켈라오가 가장 흉폭한 자였다. 그래서 요셉 가족의 거주지는 갈릴리 지역으로 바뀌게 되는데, 마태의 편집자는 여기서도 천사의 지시를 삽입하여 예수에 대한 신적 돌보심을 강조하고 있다. 갈릴리는 아켈라오보다는 덜 흉악한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고 있었다(R.H.Gundry).
3. 나사렛 사람(23절)
본 절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나사레 사람'이라는 명칭는 신약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다. 먼저 그에 대하여 호 나자레노스(oJ Nazarhnov")라는 표현으로 마가에서 4번, 누가에서 2번 언급되고 있다. 예수에 관한 표현으로는 호 나조라이오스(oJ Nazarhnov")이다. 이 표현은 마2:23;26:71;눅18:37;요18:5,7;19:9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7번 사용된다. 그러나 본 절의 '선지자로'(diva tw'n profhtwn디아 톤 프로페톤)가 나타내듯이 편집자는 구약의 어느 구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에 관하여는 히브리 문자의 특성상 다양한 의견들이 주장되고 있다. 가장 먼저 '나사렛 사람'과 연결할 수 있는 구약의 단어는 삿13:7의 '나실인'이다. 여기서 나실인의 히브리어 네지르(ryzIn])는 '나사렛'이란 단어의 모체로 추정 가능하다. 그러나 히브리어 자음 rzn로써 표출될 수 있는 구약의 뜻은 매우 다양하다. '여호와'로 읽힐 수도 있고, 또한 '거룩한'을 붙여 읽으면 '나사렛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란 의미가 된다. 어떤 이는 '파수꾼'을 선호하고(W.F.Albright). 혹자는 '새싹'(W.C.Allen)을 선호한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결말은 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마태의 편집자가 기독교적 전승의 배경 속에서 구약의 인용문을 통해서 예수의 지위를 높이려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E.Schweitzer).
◈ 보수주의 주석 ◈
1. 주의 사자의 귀환 지시(19,20절)
꿈을 통한 게시는 마태 기록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마태복음의 3번째 현몽 기록은 애굽으로 피신한 요셉 일가의 귀환에 관계되며, 그것은 또한 구약 예언의 성취를 함축하고 있다(출11:1). 20절은 출4:19을 인용하고 있는데, 구약적인 문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다(R.Gundry, B.Murray). 본 절이 '목숨을 찾던 자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①출4:19과 비교하여 위험이 제거되었음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A.Williams, E.Schweitzer, Bengel, Lenski, Gundry, Bruce, Hill, Davics). ②헤롯과 공모한 사람들을 가리킨다(Clarke, Turner, D.Carson).
2. 요셉의 귀환(21,22절)
요셉은 지시에 따라 곧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다. 예수의 애굽 체류 기간은 보통 3년 정도로 본다(Arabic Gospel of the Infancy 9-26). 한편 오리겐(Origen)은 예수가 사생아로 성장하여 애굽의 마술을 배워서 돌아왔다고 하나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헤롯이 사망한 후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 삼분되어 통치되었다. 아켈라오는 유다와 사마리아,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 그리고 빌립은 요단 동편의 분봉왕으로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E.Lohse, B.Reicke). 그러나 아켈라오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를 반대하는 시민당(Burgerpartei)의 소요가 일어나기까지 하였다(B.Reicke). 그러므로 요셉은 아켈라오의 통치 지역이 아닌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지역으로 들어온 듯하다.
3. 나사렛 사람(23절)
요셉은 갈릴리 지방에서도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정착하였다. 요셉은 그곳이 자기의 가족이 거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행동은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이해 구약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누가에 의하면 나사렛은 원래 요셉이 살던 곳이다(눅1:26,27). 그런데 마태는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따라서 혹자는 마태가 요셉의 고향이 나사렛인 것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한다(Plummer, Bruce). 본문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R.Brown). 마태는 이 호칭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해석하기 매우 힘들다. 이것이 함축된 미드라쉬, 즉 '나사렛'의 3자음 "rxn"가 시11:1의 '줄기'를 연상케 한다는 견해(E.Ellis, E.A.Evans)가 있으나, 만약 그렇다면 인용 부호가 있어야 한다. 본문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①나사렛인(Nazwrai'o"나조라이오스)과 나실인(Naziri'o"나지라이오스)을 연결시켜 그리스도를 제2의 삼손 또는 특별한 최고의 나실인으로 보는 것이다(J.Calvin, Loisy, Baengel, Stendahl, E.Schweitzer, Zuckschwerdt). 사실 예수는 나실인보다 더 헌신된 분이다(L.Barbieri). ②본문은 일반적 형태인 '나자레노스'(Nazarhnov")보다 '나조라이오스'를 굳이 사용하는데(Bonnard, Brown, Albright & Mann). 그것은 갈릴리의 아람어 형태이다. 당시의 나사렛은 멸시를 당하는 곳이었다(요1:46;7:42,52).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경멸과 놀림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메시야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시22:6-8,13;69:8,20;21;사11:1;49:7;53:2,3;단9:26)의 성취(8:20;11:16,19;15:7,8)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23절의 '선지자'가 복수형인 것도 특정 예언이 아닌 구약 전체 예언(시22:사53)의성취를 가리킨다(Olshausen Carr, Gundry, B.Murray). 어떤 사본에도 이 절이 단수로 기록된 곳은 없다. ③히브리어로 '싹,순,줄기'를 뜻하는 단어 '나차르'(rxn사11:1)는 탈굼이나 랍비 문학, 사해 문서에서 메시야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Gundry). 그러므로 마태가 예수를 사11:1과 연결시켜 이스라엘의 싹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다(Jerome, De Wette, Vincent, R.Tasker). ④또한 사49:6의 '보전된'(네치례,yrYxn])이란 말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열방들을 구원할 보전자임을 암시한다(B.Murray). 위의 견해들은 어느 한 가지를 취사 선택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주석연구 ◈
계시와 꿈의 세계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과 그분의 뜻을 드러내신다. 이러한 계시는 창조물과 역사와 인간의 양심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계시자로서 다양한 계시의 도구들을 사용하시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인간의 수면 중에 나타나는 꿈이다. ①꿈(Dream)은 수면 중에 일어나는 시각적 심상으로 대로는 청각, 미각, 후각, 운동 감각에 관여하는 것도 있다. 보통 꿈이라고 할 때는 수면 중에 일어난 체험이 깨어난 후에도 회상되는 것을 말한다. 수면 상태에 들어가면 뇌수의 활동상태가 각성시의 것과 달라지는데, 이때 일어나는 표상의 과정을 '꿈의식'이라 하면, 깨어난 후의 회상되는 것을 꿈의 내용이라 한다. ②생리학적인 면에서 꿈이란 수면 과정과 더불어 중추신경 내부의 흥분성이 저하되기 때문에 뇌속의 여러 영역에 생기는 흥분이 넓게 전달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전면적으로 통리화된 뇌의 활동 상태가 점점 해체되어 일어나는 표상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깊이의 수면 상태에서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수면의 깊이에 따라서 꿈의 내용이 각성시의 의식 내용과 거리가 생기고 정돈된 꿈으로 회상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③꿈의 심리적 특성으로서 가장 특이한 점은 꿈꾸는 나는 나이면서도 현실의 나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꿈의 비논리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꿈은 시각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불합리하고 근거없는 괴기한 것일 때가 많다. 꿈의 표상은 융합, 치환, 상징, 현상화 등의 메카니즘이 작용하여 그 내용을 한층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꿈 속의 표상 과정이 대개 시각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꿈을 시각적 사고라고 하며 꿈 속에서 하는 사고 내용을 꿈의 사상이라 한다. 그리고 내용은 수면적의 상황과 수면 중에 일어나는 내외의 자극에 의한 심리적 신체적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꿈에 대한 고대인들의 사고(2:19-23)
◈ 세계배경 문화사 ◈
꿈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련의 생각이나 영상들'이다. 고대인들은 이 꿈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살펴보자.
근동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밤에 잠을 자면서 보게 되는 환상을 꿈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으로부터 전달되는 계시로 여겼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꿈에 관한 책'을 편찬할 정도로 꿈을 중요시했다. 당시 일반인들은 두렵고 무서운 꿈을 꾸었을 때, 이를 술사와 악한 영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꿈을 통해 어떤 도움이나 계시를 받기 위해 인위적으로 꿈을 꾼 예도 있다. 가령 바빌로니아의 탐무즈(Tammuz)와 우가리트의 케렛(Keret)등의 꿈이 바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에서는 고의로 꿈을 꾸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마음으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이러한 꿈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신적 계시로서의 꿈이고, 둘째는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꿈이며, 셋째는 앞날의 사건이나 일을 미리 보여주는 꿈이다.
동양
한국의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꿈은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깊이 지배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좌우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아이를 가진 여자들은 꿈에 대해 상당히 큰 관심을 두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한국에는 산신(産神) 할미가 있어서 꿈을 통해 아들과 딸을 점지해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꿈을 앞일을 보여주는 징조로 여겨졌다. 그래서 백제가 망할 때 계백 장군이 황산벌 싸움에 가기 전날 밤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인도에 전해 내려오는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라는 문서에도 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서양
고대 서양에서는 꿈에 관한 문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서사시 「오딧세이」(Odyssey)에 보면 꿈을 진실된 꿈과 허황된 꿈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일리아드」(Illiade)에서는 아가멤논이라는 자가 꿈을 통해 제우스 신의 명령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스인인 플루타르크는 "꿈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A.D.2세기 말에는 아테미도루(Athemidorus)가 꿈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여 전문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고대 희랍에서는 꿈이 치료와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병자들은 사제들이 지시한 신전으로 가서 꿈을 꾸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Parva naturalia」에서 "외적인 대상들은 신체 내에 잠시 멈추거나, 남아 있기도 하면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고 말하며 꿈을 감각 인식적 차원에서 설명했다. 한편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43)는 꿈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성경적 접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한 위로와 권고, 삶의 인도와 책망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계시를 전달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 시대의 꿈은 객관적 특별 계시의 한 방법일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의 꿈과 이상은 비록 그것이 놀라운 체험이라 해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국한된 것이며, 그 진실성과 해석은 성경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꿈이 성경 말씀에 적합한가 그리고 성경 말씀에 벗어나지 않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꿈에 대해 너무 무시하고 경시하는 태도도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제한된 사단의 권세(2:19-23)
우리는 가끔 회의에 잠길 때가 있다. 우리 주변에서 사단의 권세가 왕 노릇하여 의롭고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는 예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도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하고 변방 나사렛으로 가게 되었다. 이는 헤롯 왕가의 권세가 워낙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 대해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1. 번성하고 심화되는 악의 세력
헤롯 대왕이 죽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태는 전보다 더 악화되어 있었다. 헤롯의 아들 삼 형제가 유대를 삼분하여 다스렸는데 베들레헴 지역은 '헤롯아켈라오'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포악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였다.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유명한 유대인들을 3,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래서 요셉은 비교적 온건한 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로 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악의 권세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종교, 문화, 윤리, 도덕은 역사가 진행될수록 타락하고 악한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24:3-12; 딤후3:1-5).
2. 악의 권세에 대한 성도의 자세
요셉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순종하여 갈릴리로 피했다. 베들레헴으로 가면 유대 왕족을 멸하려는 헤롯의 손에 예수를 희생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극렬히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우선 피해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게 대해야 한다. 주님도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10:23)고 하셨다. 그리고 사단의 권세는 영원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진리를 굳게 믿어야 한다. 요셉이 갈릴리 나사렛으로 간 것이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결과가 됨을 보라. '나사렛'이란 '나자르'라는 말과 같은데 이는 '가지'라는 뜻이다. 즉 '이새의 가지에 새로운 싹'이 난다는 메시야의 예언을 하나님이 끝내 이루신 것이다. 예수는 다윗 왕가 사람이라는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 된 것이다. 이처럼 사단의 권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갈릴리 나사렛 사람(2:19-23)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지역적으로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아기 예수의 고향이 된 갈릴리의 나사렛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예이다. 예수는 천사의 지시에 의해 나사렛에 간 후 그곳에서 줄곧 성장하여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1. 멸시받던 지역인 나사렛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해 있는 지방이다. 이 지방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하여 이스라엘 북쪽 변경에 속하는 해안 지방이다. 그러므로 외세의 침공에 가장 많은 피해를 당했고, 그 회복도 가장 느린 변방 지역인 것이다. 그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내륙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을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4:15)라고 경원했으며 그 본 동네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멸시한 것이다.
2. 개방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러므로 갈릴리인들은 내륙 지방의 사람들보다 외국의 사상과 문물에 일찍 눈을 떴다. 따라서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보다 외국의 소식과 사상을 먼저 접하게 되었고, 개방된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두말없이 생업을 포기하고 따르는 적극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수의 제자 중 가룟 출신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다.
3. 갈릴리 나사렛 예수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서도 미미한 동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릴리 나사렛을 고향으로 선택한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비천하고 약하며 멸시받는 소외된 자들의 동류가 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전1:27,28)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은 우리같은 비천한 죄인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호혜요, 사랑의 표시요 긍휼인 것이다. 그 이름 앞에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은 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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