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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마이어 주석 시리즈 마태복음 성경공부

by Ddak daddy 2017. 9. 28.








편집자 서문
추천사 조병수 박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총장 및 신약학 교수)
    신현우 박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한글 번역본 발행에 대한 축하문
역자 서문
짧은 안내서

1과 예수님의 계보(1:1-17)
2과 예수님의 탄생(1:18-25)
3과 이방인이 메시아 탄생을 경배하러 오다(2:1-12)
4과 왕의 추적과 애굽으로의 도주(2:13-23)
5과 세례자 요한(3:1-12)
6과 예수님의 세례(3:13-17)
7과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4:1-11)
8과 예수님의 첫 사역(4:12-22)
9과 예수님 첫 사역의 요약(4:23-25)
10과 복 있다고 하심(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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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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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과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투쟁(26:36-46)
106과 체포(26:47-56)
107과 공회 앞에서의 심문(26:57-68)
108과 베드로의 부인(26:69-75)
109과 유다의 최후(27:3-10)
110과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27:11-30)
111과 처형(27:31-56)
112과 무덤에 안장함(27:57-66)
113과 예수님의 부활(28:1-15)
114과 선교 명령(28:16-20)



목차 

 

짧은 안내서 

 

제1부 도입: 예수님의 탄생, 소년 시절과 세례(1:1-4:11) 

1. 마태복음서 제목(1:1) 

2. 예수님의 유래 (1:2-17) 

3. 예수님의 탄생(1:18-25) 

4. 이방인이 메시아 탄생을 경배하다(2:1-12) 

5. 왕의 추적과 애굽으로의 도주(2:13-23) 

6. 세례자 요한(3:1-12) 

7. 예수님의 세례(3:13-17) 

8.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4:1-11) 

 

제2부  예수님 초기 사역(4:12-11:1) 

제3부  이스라엘을 얻기 위한 투쟁(11:2-16:20) 

제4부  수난(16:21-27:66) 

제5부  부활(28:1-20) 

 

역자의 말 

 

 

 

짧은 안내서 

 

1. 마태복음은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쓰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가장 오래된 교회 문서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125년경에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소아시아의 비숍인 파피아스는 마태가  복음서를 히브리어 기록했다고 진술했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유대인들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했다는 의미이다. 180년경에 리용의 비숍인 이레네우스도 이와 같은 것을 보도한다. 그 외에도 가장 오래된 복음서 서문(약 160-180년경)과 오리게네스는 230년경에 마태복음의 출처가 유대라고 했다.  

그런데 복음서 자체도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그리스도 교회에서 발생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마태복음의 필체에는 셈족 언어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로마인들을 위해 쓰인)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을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단지 마태만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 외에는 여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참고: 마 17:24 이하). 단지 마태만 유대인의 맹세 형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23:16 이하), 유대 그리스도인만 여기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구약을 자주 인용함으로써 구약과의 연관성을 매우 강조하는데, 이것은 독자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만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에 대해 설명하고 또한 당시의 유대교 교사들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은 마태복음이 유대 그리스도인을 위해 쓰였다는 주장을 강화해준다.  

 

2. 마태복음은 또한 복음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본다. 고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증언한다: 파피아스, 이레네우스, 가장 오래된 복음서 서론, 무라토리 정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순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복음서가 오래된 순서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서가 진짜 유대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쓰였다면 이것은 기록연대에 대한 하나의 힌트가 된다. 왜냐하면 66-73에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전쟁 이후에는 기껏해야 갈릴리에 유대인 교회가 약간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마태가 이들을 위해 복음서를 작성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 복음서는 66년 이전에 쓰였다고 본다. 이레네우스는 자신도 소아시아 출신인데, 사도 요한의 직제자들이 남긴 믿을만한 소식을 인용해서 마태복음서가 쓰인 정확한 날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였다. 베드로는 64년에 순교하였고, 사도 바울은 61-63년에 로마에서 활동하였으므로(행 28:30), 우리는 마태복음이 쓰인 날짜를 약 60년으로 잡는다. 

마태복음서가 쓰인 당시에 성전이 있었으므로(12:5 이하; 17:24 이하; 23: 16 이하), 마태복음서가 이러한 교회사의 증거가 옳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서는 70년 이후에 쓰일 수 없다. 또한 첫 복음서가 첫 교회가 있는 이스라엘 땅에서 쓰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두 문서설 비판: 서문 끝을 참조할 것). 

 

3. 따라서 이 복음서 저자는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사도 마태이다. 고대교회에서 이와는 달리 주장한 적이 없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초대교회가 목격자이면서도 사도와 같이 권위 있는 사람이 직접 쓴 것이 아닌 문서를 복음서로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마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주석서의 9:9 이하와 10:3의 설명을 참조하라. 

 

4. 복음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1) 마태는 당시의 유대교와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의 복음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알림으로 해서 교회를 변호하면서도 유대인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2) 이러한 이유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해 가르치신 것을 특별히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3)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구약과 연결짓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는 자주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사역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는 것을 가리켰다. 

4) 이렇게 해서 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이 세대(아이온)가 끝날 때까지(마 28:20) 구속사를 펼쳐간다. 마태는 우리에게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5) 무엇보다 마태는 자신이 교사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교사와 성경의 가르침은 그에게 중차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이 구약을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단지 교사만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 즉 전체의 구속사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참조: 11:29; 13:52; 23:8 이하; 23:34; 28:20).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도 교사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6)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셨으며 또한 누구 신지를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족보와 탄생 이야기, 예수님의 어릴 때의 환경과 유대인의 종교적 당파와의 논쟁과 부활 기사를 보도한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알 수 있으므로, 마태는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대적으로 많이 기록한다(참조: 13:49-50; 51-52; 16:17 이하; 17:24 이하; 18장과 23장; 28:16 이하). 

7) 마태가 이방인 선교에 관심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복음서 기자 중에 그가 이방인 선교를 가장 중요시 사람이다. 사람들이 마 28:18 이하를 선교명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유가 있다. 초대교회의 어느 기록에 의하면, 마태는 그의 생애 말기에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마태의 넓은 안목은, 유대 그리스도인이 좁은 사람이었다는 선입견을 제거해 준다. 이들은 변화되어 좁은 유대주의를 극복했다. 마태는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을 변화시켜 새롭게 만드신 좋은 예의 하나이다. 마태복음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서가 된 것은 복음서 내용 때문이다. 

 

* 자료 비판 

 

독일 국가신학대학에서는 오랫동안 두자료설을 신봉해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마태는 마가복음과 큐(Q: 예수님의 말씀 어록집)을 보고 베껴 써서 마태복음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F. 바우어, Th. 짠, A 쉴라터와 같은 학자는 마태복음이 먼저 쓰였으며 마가복음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마태복음이 먼저 쓰였고, 마가복음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두자료설은 학설로는 가치가 없다. 이렇게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마태와 마가가 같은 사건을 설명할 때에 마태가 항상 짧게 설명한 데에서 나타난다. 마태가 마가복음을 베껴 썼다면, 왜 그 많은 것을 생략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역자의 말1) 

 

Edition C 주석서(앞으로 마이어 주석이라고 한다) 독일 복음주의(보수적)권에서 가장 애용되는 주석서이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가 발행인으로서 그는 네 복음서를 주석했으며 다른 책들은 보수파 루터교 학자들과 복음주의권 학자들이 주석했다. 주석서의 특징은 성경영감론에 입각해서 학문적으로 주석함과 동시에 성도의 믿음 생활에 직접 연관되도록 한 것이다. 

 

주석서, 특히 독일 주석서는 원래 읽기가 어렵다. 그러나 본 시리즈는 평신도를 위해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이다. 필자가 느낀 본 시리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정통적 성령 영감론을 따른다. 

2) 절마다 자세히 주석했다. 

3) 기독교 2000년간의 전통이 숨쉬고 있는 학문적 주석이다. 최근까지의 학문 결과를 반영함. 

4) 경건한 학자들이 주석했다. 주석가들은 신학박사이면서도 전부 목회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5) 말씀에 입각하여 실제적으로 어떻게 영적 생활을 해야할지를 분명하게 지도한다. 저자들은 학문적인 용어를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를 사용했다.  

6) 최대한 읽기 쉽게 번역했다. 번역본을 많은 사람들이 검토해서 불분명한 부분을 수정했다. 

 

마태복음 주석은 독일어로 1000쪽이나 된다. 분량이 비교적 방대하지만 저자 마이어 박사는 매우 밀도있게 표현하였다. 즉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필요하지 않은 말이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글의 단점은, 특히 독일 글을 잘 접하지 않는 독자에게는, 가끔 문장 사이의 연결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경우에는 역자가 괄호로 보충 설명을 했다. 저자는 관련 성구를 괄호에 넣어 표기를 했는데, 그 외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거의 역자의 보충 설명이다. 혹시 통일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시 읽으면서 앞뒤 문장과의 연결점을 잘 찾아보기 바란다. 평신도에게 생소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중요한 성구, 긴 설명이 필요한 것은 역자가 각주에서 설명했다. 원래 주석서에는 각주가 없다. 또한 오해가 될법한 단어나 문장은 괄호로 독일어 원문을 실었다. 

 어려운 부분은 단락 끝에 역자가 번역자 정리 표시하고 중요한 부분을 요약했다. 

 

역자는 이 번역본을 토대로 설교를 썼다. 설교는 번역본을 좀 더 자세히 해설을 한 것이므로, 주석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역자의 설교를 참조하기 바란다. 설교에서 때로는 주석의 복잡한 부분을 간소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간혹 독자가 생각하기에 저자가 너무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은 이유가 는데, 주로 독일 신학계를 점령한 성경비평학자들의 이론을 반박하기 때문에 그렇다. 

예: 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3:13). 저자가 이란 말을 하는 이유는, 비평학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될 수 있는 한 개역개정을 사용했는데, 문장의 어미가 맞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표현을 바꾼 경우와, 필요에 따라 원문과 가깝게 직역한 경우도 있다. 

 

독자는 본 주석서를 다음과 같이 이용하면 좋다: 

1) 교회에서 설교를 듣기 전에, 혹은 듣고 나서, 관련 본문을 찾아서 읽어볼 것. 그러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2) 평소에 생각이 날 때마다, 혹은 의문되는 구절이 있으면 관련 구절의 주석을 찾아서 읽어볼 것. 이러한 방법으로 그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둘 것. 

3) 한 권을 선택해서 나름 대로 정리해가며 죽 읽을 것. 결코 지루하지 않다! 

4) 구역 예배에 사용할 것. 저자는 각 단락 마다 끝 부분에 구역 성경공부를 위해 자세한 지침을 마련했다. 

 

 

필자는 현재까지 독일에 30여년 살면서 선교와 목회, 신학 사역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올바른 성경이해를 위해 힘써 왔지만, 그간 잘못 배운 것들이 많아서 혼동 속에서 큰 고충을 겪었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에 본 주석서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퍼탈 주석서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 주석서를 연구하면서 성경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말씀의 정확성도 신뢰하게 되었다. 이 주석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주석에는 구구절절이 주석자들의 거룩함이 묻어나온다. 이들이 나의 신앙의 선배가 되었다. 

 

부퍼탈 주석서의 약점은  구절의 정확한 해석보다는 말씀의 깊이를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데에 더 치중 것이다. 말씀의 한없는 깊이를 보고 경탄하게 되는 장점이 있지만,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각 구절의 정확한 해석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정확한 해석이 더 중요한 한국 독자를 위해 필자는 그 이후에 나온 학문적인 마이어 주석을 번역했다.  

 

그러나 마이어 주석은 학문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의 경건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실제적인 영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즉, 적용 면에서도 탁월하다. 이 주석서를 읽으면, 종교개혁 이후 근 600년 역사의 독일 성도의 경건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독자는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 말씀인지도 깨닫게 된다.  

 

한국에 이러한 책들이 한국에 소개되지 못한 이유는, 독일 신학이 성경비판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성경비판으로 독일 신학자들이 전 세계 기독교에 대단한 악 영향을 끼쳤으므로, 진지한 학자들은 독일 신학에 별 관심이 없다. 그 결과 끊임없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교회를 지켜온 놀라운 학자들이 있다는 것이 간과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성경비판을 반대하기 때문에 독일 국가대학에서 교수로 채용하지 않으므로 독일 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간 독일에 많은 탁월한 보수적 학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의 글이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늦게나마 이들이 집필한 주석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은 크게 기쁜 일이다. 

 

역자는 이 주석서가 한국 교회에 크게 이바지할 것을 믿는다. 일반적으로 열심이 많은 한국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서 말씀대로 산다면,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에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본다.  

 

 

 

유럽개혁신학원 원장 송다니엘 목사. 

 

마태가 전한 복음 

 

 

원시교회는 단지 하나의 복음밖에는 모른다. 그런데 이 복음은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가 전한 복음, 마가가 전한 복음 등으로 불러야 한다. 우리가 마태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약식 명칭이다. 필자도 약식 명칭을 사용한다. 

 

 

제1부  도입: 예수님의 탄생, 소년 시절과 세례(1:1-4:11) 

 

1. 마태복음의 제목(1:1) 

 

마태가 복음서를 집필했을 때에는 마태복음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복음서를 1절과 같이 명명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기술한 ) 2). 

 

 짧은 제목은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된 것이며 의미심장한 말이다. 역사책3)  역사 기술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4)  5:15)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마태가 이 표현을 복음서의 시작에 사용했다는 것은, 자기가 쓴 책이 창세기와 같이 성경이다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되어 기록했음을 증거한다(참조: 딤후 3:16; 벧후 1:19 이하). 

마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함으로써, 마태복음이 구약을 연결해서 쓰고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강조했다.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하는데, 구약에 따르면 그분은 세상의 마지막에 오실 구속자요 구원자이시다. 마태는 이것으로써 구약이 기대하고 예비하라고 가르친 그분,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 5:39를 보라!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소개함으로써 이 복음서를 또 한 번 구약과 연결한다. 단순하게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이기 때문에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므로, 이곳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윗의 아들 예수님에게 주어진 메시아적 칭호로 자주 사용되었 때문이다(마 9:27; 12,23; 15:22; 21:9,15; 22:42 이하). 그러므로 마태는 두 개의 메시아 칭호를 연결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라엘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시아 칭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이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창 12:3; 18:18; 22:18; 참조: 26:4; 28:14; 행 3:25; 갈 3:8 이하). 그러므로 마태가 벌써 제목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밝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한 약속된 축복(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전체 복음서의 구상이 그 윤곽을 드러냈다. 즉, 이 복음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열방의 구원인 예수님에 대해 보도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일관성 있게 예수님의 선교명령까지 보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우리는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말을, 기원의 책(가정의 족보라는 의미에서 기원)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맥과 복음서 전체의 구상으로 볼 때에, 이 번역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창 5:1을 보자. 그곳에서는 아담의 역사6)라고 한다(참조: 창 2:4; 6:9; 10:1; 11:10, 27; 37:2). 마태는 예수님의 역사를, 사도 바울이 롬 5:12 이하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서로 대치한 것과 같이, 둘째 아담의 역사로 본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적어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마태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지 짚고 넘어가자. 여기에서 역사라는 말을 무슨 의미에서 사용했을까? 전체 28장은 예수님 생애 전체를 기술하지 않는다. 즉, 마태는 선별적으로 기술한다. 고대 교부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정확하게 사건의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먼저 범위를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했다. 아무튼, 복음서 예수님 말씀 모음집 이상의 것이다. 마태가 보도하는 것은 신빙성이 있고 영감 되었다. 그 외에도 그는 목격자이다. 예수님은 원시교회의 (경배와) 예배 중심이 되셨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지상에서 활동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분이었다. 성경비판학에서 지상의 예수와 승귀된 예수님을 구분하는데, 이곳에서는 지상의 예수님은 누구인지 잘 알 수 없다고 하거나 그가 누구였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탄생과 부활 사이의 예수님 역사에 세계사의 전환점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구속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마태는 그의 예수님 역사 통해 우리를 바로 이러한 전환점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번역자 정리 

 

1절은 2-17절과 관계 없이 마태복음 전체의 제목으로 본다. 그러므로 1절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책이라고 번역한다.이 짧은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믿는 백성을 위해 약속된 복의 근원이다.  

다윗의 아들이란 메시아 칭호이다. 마태복음 시작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 역사(탄생  죽으심  부활  승천)은 구속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2. 예수님의 유래 (1:2-17) 

 

일반적으로  본문을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유래(Abstammung)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7).  

 

 이유는 예수님의 가족 계보가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부분적으로는, 단지 매우 중요한 인물만 언급했을 뿐이다. ...의 아들, 혹은 낳다라는 말도 꼭 좁은 의미에서의 아버지  아들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후손임을 나타낸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벌써 1절에서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아들, 혹은 아브라함의 아들 불렀다. 예수님과 그들 간의 사이에는 거의 1000년, 2000년의 격차가 있다. 

 

 어려운 문제는, 마태의 가족 계보와 누가의 것(3:23-38)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누가는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아담 및 하나님으로까지 올라간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내려온다. 밑으로 내려오는 족보는 전형적으로 히브리적이다(참조: 창 5:10; 11:10; 대상 1-8). 이것을 통해 볼 때에, 마태복음이 히브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와 누가의 계보에서 17명의 이름이 공통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숫자상으로 마태 계보의 40% 해당한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두 계보가 거의 같다. 이것은 룻 4:17-22와 대상 2:3 이하 가족계보를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부터는 계보가 갈라지는데, 마태는 대상 3:10 이하 따른다. 이곳에서는 일단 스알디엘까지 열거하는데, 몇 명은 생략되었다. 그다음에 그는 스룹바벨을 언급했는데, 그는 에스라 3:2,8; 5:2에 따라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한다. 여기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서 마태와 누가는 서로 만난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갈라진다. 바벨론 포로부터 요셉의 시기까지 이해하기가 가장 어렵다.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누가는 다윗 이후 나단을 통해 계속 내려가는데, 대상 3:5에 따르면 밧세바의 아들도 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다.  

 

계보에 나타난 이 상이점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다. 아마도 대상 3:19 에스라 3:2,8; 5:2에서 볼 수 있는 인척 결혼(신 25:5 이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태가 누가가 서로 다른 목록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보를 통해 예수님의 조상을  사람도 빠짐없이 열거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 계보에 속한다는 사실은 신약에 분명하게 증거되었고,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다. 

 

가족 계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번의 분기점인데, 이것은 6절의 다윗에서와 11-12절의 바빌론 포로에서이다. 이렇게 해서 계보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마태는 17절에서 이것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계보의 첫 부분은 2-6까지이다. 마태가 누가처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미 창 12:1-3의 아브라함 약속에서 인류 전체를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님 계보에 나오는 자매들을 통해 메시아가 인류 전체에 관계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부분에서 자매 3명이 나오는데, 이는 다말과 라합, 룻이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는 둘째 부분에서 마리아는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한다. 자매 이름이 유대인 족보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복음서가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세 가지 점은 배울 수 있다: 

 

첫째로, 이 세 명의 자매는 죄를 지은 여자들이다. 다말은 (목적이 이해할만할지라도) 창녀 행위를 했고(창 38:13), 라합은 그가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창녀였다(수 2:1 이하;  11:31; 약 2:25). 룻이, 밤에 술을 마시고 타작마당에 누워있는 보아스에게 간 것은 윤리적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다(룻 3:6 이하).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했다(삼하 11-12). 마리아는 (전혀 잘못이 없음에도) 유대인으로부터 간음녀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참고: 마 1:18 이하).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죄로 물든 자매들의 후손이었다. 그분은 죄로 연속된 인간의 계보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자매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그분의 구속의 계획에 포함하셨다! 

 

둘째로,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자매는 모두 이방인이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사람이었다. 밧세바는 대상 3:5에 따르면 이스라엘 여자 같은데, 헷 사람 우리아와 결혼했으므로 헷 사람으로 간주된다(삼하 11:3; 23:29). 가나안 족속은 창 10:6에 따르면, 함족이고, 모압 족속은 창 19:37에 따르면 셈족이며, 헷 족속은 창 10:15에 따르면 함족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분의 기원에 따르면 창 10장의 민족계보로부터 볼 때에 여러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고 있다. 단지 야벳 사람만 없을 뿐이다(창 10:2 이하). 이렇게 볼 때, 또다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의미가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셋째로, 모든 다섯 자매는 자기 아들의 합법성의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다말은 그의 아들이 유다로부터 온 것임을 표적을 통하여 증명해야 했다(창 38:24 이하). 라합과 같은 창녀는 일반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법적인 아들을 낳지 못한다(참조: 호 1:2; 3:1; 신 23:18). 룻은 아들이 없었으나 기업 무를 자가 거부하는 수치를 겪어야만 했다(신 25:5 이하;  3:12-13). (간음녀)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은 투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왕상 1-2). 마리아는 요셉이 그녀의 첫 아들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했다(마 1:18 이하).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변호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마태의 계보를 깊이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라든가 중요하지 않다 주장은   없는 일이다. 

 

계보의 둘째 부분은 6-11까지이다. 바벨론 포로 유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회당과 율법사(서기관)가 생겼다. 그때부터 새로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이 형성되어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배 이래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요 1:49; 19:19), 다윗 혈통을 가진 왕은 사라졌었다. 이 계보를   이름이 좀 특이하게 보이는데, 좀 더 좋은 사본에는 7절에 아사 대신, 아삽이라고 쓰여있다8)(대상 3:10). 10절에도 좀 더 좋은 사본에 암몬(대상 3:14) 대신 아모스라고 되어 있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즉, 마태는 아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시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고, 아모스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가 이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대상 3장과 비교할 때, 3명의 왕의 이름이 누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요아스, 아마시아, 아사리아 왕이다. 마태는 아하시아를 웃시야라고 하는데, 웃시아의 다른 이름은 보통 아사리아라고 하며, 이는 한참 후대의 왕이다 (왕하 14:21-22; 15:1 이하; 대상 3:10 이하; 대하 26:1 이하).  

 

계보의 셋째 부분에서 (둘째 계보의 마지막에 있었던) 여고냐(요야긴)    나오는데, 이번에는 셋째 부분의 첫 인물로 등장한다(12). 역사의 무대에서 빨리 사라진 스룹바벨이 왜 진짜 하나님의 (반지로 된 도장)이었는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졌다(학개 2:239);  4:6 이하). 여고냐는 구약에서는 요야긴, 혹은 고냐라고 하며, 원래는 요시아의 손자이다(참조: 왕하 24:6 이하; 25:27 이하;  22:24 이하). 또 그의 아버지 요야김이 누락되었다. 그러나  부분의 중심은 16절에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곳에서는 이제 더이상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1892년 시나이의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된 아람어 사본10)인, 소위 시나이 아람 사본에서만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관련된 전 문장을 다음과 같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낳았다. 이것을 볼 때. 시나이 아람 사본에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고, 낳았다 표현으로써, 단지 요셉이 법적인 아버지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이것으로써, 모든 사본이 요셉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모든 마태복음 사본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낳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이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눅 1-2; 요 1:14-18; 갈 4:4; 히 7:3; 계 12:1 이하.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마태가 18절 이하에서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약혼녀이면서도 부인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법적으로 자기 아들이 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법적으로 본다면, 요셉이 온전히 예수님의 아버지이다. 그 결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된다. 그분이 이적으로 탄생했다고 해서 그분을 다윗의 계보에서 제외할  없다(롬 1:3). 자연과 기적, 역사와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이곳에서 하나로 만난다. 

 

17절은 별도로 고찰해야 한다. 마태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조상을 열거한 바에 따르면, 42대(3x14)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3은 3위인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는데, 마태는 복음서 마지막에, 즉 28:19의 선교명령에서 이 숫자를 다시 한 번 사용했다. 즉, 마태는 이 복음서를 삼위로 둘러쌈으로써 자기가 지금 거룩한 문서(성경)를 집필했음을 선포하였다. 14는 신성한 수(완전수)인 7이 두 개가 들어있다. 7은, 하나님의 영의 숫자이다(슥 4:10; 계 1:4; 5:6). 7은 창조의 마감의 자이다(창 2:2-3). 7은  창조의 완성의 숫자이며(히 4:4 이하), 이스라엘 축제일의 숫자이며(출 12:15; 신 15:1; 왕상 8:65),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숫자이다(계 5:1,5; 8:2; 10:3; 15:1,7). 마태는 숫자 3에 벌써 성령님을 고려했으므로, 7을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완성의 숫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14(2x7)에서 2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2는 이스라엘과 이방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벌써 1절에서 다윗과 아브라함에서 2라는 숫자의 중요성을 나타냈다. 그 외에 이스라엘과 열방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한 곳은 다음과 같다: 롬 1:16; 고전 1:24; 갈 2:9; 엡 2:11 이하;  7. 정리하면, 마태는 3x14 = 3x7x2의 관계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을 위한 자신의 구속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숫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지혜서 전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에 지나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되며, 단지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한도 내에서만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경우는 마 17 외에도 요 21:11; 계 13:18, 그리고 다니엘, 스가랴와 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도 숫자가 나오는데, 이 경우에도 우리는 성경이 지시하는 한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번역자 정리 

 

마이어 박사는 1절은 마태복음 전체의 제목으로 보았으므로 이에 따르면, 마태복음의 본 내용은 2절부터 시작한다. 2-17의 제목은 예수님의 유례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먼저 계보가 족보로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족보에서는 의도적으로 일부의 조상 이름을 제외시킬 수 없다. 또한 유대인의 족보에서는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더우기 자신들이 간음남, 간음녀의 후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라도 밝히지 않는다(6절: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솔로몬을 낳고). 또한 족보에는 이방 여인들이 등장할 리가 없다. 이방인 창녀도 거룩한 족보에 들어 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왕들의 계보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누가 보더라도  불완전한 계보가 족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 유대인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인 이 계보를 마태는 무슨 목적으로 나열했을까? 그는 지혜서 전통을 통해 수자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는 17절에서 인공적으로 계보를 3x14로 만들어 계보를 설명하면서 독자에게 3과 14라는 수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3은 삼위일체의 수자로서 이것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복음서 마지막에도 선교명령에서 이 수자를 다시 한 번 사용하여 복음서를 삼위 하나님으로 둘러쌈으로서 마태복음서가 거룩한 문서(성경)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14는 7x2로서 7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완성을 나타내며, 2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3x14(3x7x2)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구속 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완성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 독자는 이러한 표현 방법에 익숙했으므로 예수님의 유례를 이러한 방법으로 설명한 것으로부터 쉽게 메시지를 찾을 수 있었다고 본다. 

 

 

성경공부(1:1-17) 

 

1. 준비 

 

1)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마태복음에 1:1-17이 없다면 무엇이 결여되었을까? 

2) 우리는 보통 지루하게 느끼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은 질문만 하고 그냥 넘어간다: 이 족보에서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인가? 

3) 성경공부의 제목을 제안해본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전환점이시다. 

 

2. 실시 

 

1) 구속사는 예수님을 목적으로 진행한다. 

복음서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기록되었다. 마태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감되었다.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향해 달린다: 그분은 구약이 예언하신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재앙의 역사를 이제 바꾸는 구원의 역사가 기록된다.  

2) 예수님은 죄로 얼룩진 조상의 후손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는 죄인으로의 혐의가 있거나, 아니면 어떤 이는 사람의 의심을 받는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유대인에게는 마리아가 미심쩍다. 그런데 이 여성들에 의해 여러 민족이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죄 역사의 목적지이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은 죄사함이 중심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3) 예수님으로부터 구속사의 완성이 시작된다. 17절의 숫자 2,3,7은 하나님께서 행동하신다는 것이 나타난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한다. 이것은 동정녀 탄생이다. 예수님 안에서 둘째 아담의 역사가 시작한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과 여성들을 통해서, 그리고 17절의 2라는 숫자를 통해 마태는 이방인 선교를 암시한다. 우리는 바로 이 선교를 통해 믿음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선교의 동역자인가? 

 

 

 

3. 예수님의 탄생(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구절을 읽는 유대인은 대단히 큰 거침 돌을 극복해야 한다. 설령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면 믿지도 않고 기록하지도 않는다. 남자와 관계하지 않은 여자가 성령님을 통해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을 뿐 아니라, (신화적인 생각을 하는 고대사람과는 달리 오랫동안) 현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도록 길러진 유대인에게는(고전 1:22)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8절의 나심 우리는 다시금 역사 번역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원문에는 1절에서 사용된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마태는 앞에서 기원에 대해 설명했고, 이제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서 벌써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마태가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요셉을 그의 아버지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정혼이라는 말은 의미적으로 약혼보다는 더 좋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약혼이라는 말은 당시의 정혼 만큼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혼이라는 말은, 유대 법으로는 결혼계약서를 체결했다는 의미이다. 단지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면 결혼이 완성된다(참조: 20:24). 그러므로 요셉은 벌써 그녀의 남편이라고 했다. 당시에 유대 처녀는 14살에 결혼했는데, 마리아도 당시 그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동거하다는 말은 동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20, 24절을 볼 때,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마리아는 아직 요셉의 집에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셉이 자기가 그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정혼자들의 성관계도 하나님 뜻에 반하는 음란한 일임을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며, 그가 실제로 마리아와 동침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태는 즉시 우리에게 임신한 이유를 알려준다: 성령님에 의해서. 그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는 눅 1:26 이하에서 이것을 설명한다. 이것으로 볼 때, 마태는 이 사건을 매우 간단하게 설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역시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임신하게 되었는지를 알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마리아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때, 어떠한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추측컨데, 그녀는 제사장 가문인 레위족속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눅 1:36에 따르면, 제사장 아내인 엘리사벳이 그녀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눅 3의 계보는 마이아의 계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말과 같이 음란한 행동을 한 것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참조: 창 38:24)! 제사장의 딸이 더구나 정혼까지 했는데 임신했다! 신 20:20-21에 따르면, 처녀가 아닌 상태에서 결혼한 자매가 이 사실이 적발되면 돌에 맞아 죽게 된다. 그리고 레 21:9에 따르면, 제사장의 딸은 허락되지 않은 성관계를 했을 경우에는 화형에 처해져야 했다. 마리아는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을까? 그녀는 공개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비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심술궂은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요셉이 얼마나 실망할까? 마태는 예수님 이야기를 다란 긴장과 함께 설명하기 시작한다.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는 이제 요셉에 조명을 맞춘다. 누가는 마리아를 부각했다(눅 1:26 이하; 39 이하; 2:16, 19, 34f, 48, 51).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요셉이 결혼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므로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다. 마태는 그를 의로운 자라고 칭함과 동시에, 의로운 자에게는 그가 알고있는 하나님 말씀과 삶이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그는 마리아를 수치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했다. 설사 마리아가 돌로 사형을 당하지 않을지라도  당시 간음은 사형에 해당했다(요 8:3 이하;  20:10)  사람에게 정죄당해 일생 낙인 찍힌 채로 살아야 했다. 

의로운 자라는 개념은, 바리새파나 에센파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참조: 눅 1:6; 2:25; 23:50; 행 10:22).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뜻(계명)에 따른 삶을 의미한다. 요셉은 이유를 밝히지 않고(드러내게 아니하고) 끊고자 했다. 끊는다는 말은 신 24:1 이하 따른 이혼장을 통한 이혼이다. 언제 이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혼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진행될 수 없으므로, 이유를 밝히지 않고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아무튼 요셉은 자기가 먼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떻게 될른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다. 요셉은 그 당시까지는 마리아의 임신 사실은 알았지만 그 임신의 원인은 몰랐으므로 아마도 다른 남자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상당히 놀랍다. 아내에게 당한 남편이 아내를 보호하려고 했다!  

마리아도 보통 소녀는 아니다. 그녀는 사실 전모를 요셉에게 알이자 않았을 것이다. 즉, 그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겼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혼인을 보호해주실 것을 믿는 커다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20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신약에서도 주의 천사가 나타난다(히 1:14). 요셉은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를 통해 3번이나 인도를 받는다(1:20; 2:13, 19). 그러나 성령강림절 이후로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님을 통해 인도받으므로 우리는 범상을 넘어 선 현상이나 꿈에 대해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사도 바울이 고후 11:14에서 경고한 것을 보라).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다윗의자손, 요셉아라고 부른다. 이 말을 통해 요셉에게 다윗 가문에 주어진 약속을 기억시키며, 이 약속이 이제 성취된 것임을 암시한다(삼하 7:12f; 시 89:4f; 사 9:5f; 11:1 이하; 55:3; 렘 23:5; 33:15 이하;  34:23 이하; 37:24; 호 3:5; 암 9:11; 슥 12:10).  

 천사는 명령을 주시는 하나님과 같은 방법으로 요셉에게 말한다: 먼저 위로의 말을 하고  두려워 말라  그리고 지시를 한다. 요셉에게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한다. 그녀가 임신한 것은 그녀의 과오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기적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러한 기적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롬 4:17) 사실을 부인해야 하며,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해야 한다. 창 1-2장의 창조의 기적은 하나님 말씀인 하나님의 들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똑같은 기적이다(요 1:14 이하;  8:3; 갈 4:4; 빌 2:5 이하;  1:15 이하; 2:9). 

 

 

이제 요셉에게 하나의 표적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그것을 통해 그가 진짜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고 마리아가 진짜 성령님을 통해 임신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사 7:14의 표적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이름 예수라고 결정하셨다. 눅 1:31에 따르면, 마리아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각자 같은 목적을 향하여 인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행 10장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이나, 행 9:10 이하에서 사도 바울과 아나니아에게 나타난 환상과 같다. 예수 히브리어로 예슈아로서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예호슈아(= 여호수아)라는 옛날 이름 대신 쓰인 것이다(느 3:19; 시락 51:10; 골 4:11). 그런데 탈무드는 예수라는 이름을 기피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을 배척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수아/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가 도우신다 의미이다. 요셉이 아기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가 당시의 법에 따라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창 21:3; 사 8:11 이하;  1:4,6,9). 그 천사는 벌써 예수님의 임무를 설명해준다: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다. 이것으로써 여호와가 도우신다라는 이름이 해석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당시의 메시아 기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모든 유대인의 당파는, 메시아가 로마인을 몰아내고, 불신자를 벌하시고,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것을 기대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다(행 1:6). 그런데 천사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의 임무는 이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구절과 연관시켰다: 시 130:8; 사 53:1 이하;  31:33 이하;  34-36.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는 일은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부활 이후에, 그리고 재림 이후에 예수님은 권력의 문제를(악한자/ 불신자 처벌) 해결하실 것이다. 이것으로써 즉각적으로 일반적인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와 충돌이 발생했다. 그의 백성 누구인가? 먼저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백성  백성이 아닌 것, 즉 모든 이방인으로 확대 적용되었다(마 28:18 이하;  9:24 이하;계 7). 

 

 

22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모든 일이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모든 가족 역사와 특히 18-21에서 술된  의미한다. 여기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감당해야 할 고난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명 기적이나 해방 기적이다. 기적이 요셉과 마리아를 (메시아의 부모가 된다는) 교만이 아니라 수치로 인도하였다. 

 

신약에서 일어나는 일은, 구약에서 예고된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주께서 선지자로(를 통해) 하신 말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지자는 단지 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통해서라고 한다. 사 7:14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약의 영감과 구약의 신적인 권위는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딤후 3:16; 벧후 1:19-21).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전달자(성경의 인간 저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본문의 처녀라는 말은, 유대인이 사 7:14에 나오는 젊은 여자 실제로 동정녀의 의미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원전 3세기에 번역된 그리스 구약성경(70인역)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을 위해 당시의 공용어로 번역된 것으로서,) 마태복음보다 약 300년 전에 쓰였는데, 그때 젊은 여자 이미 동정녀 번역했다. 그러므로 사 7:14는 동정녀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  7:14(„...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같은 분인가?  만약, 마태가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그는 사 7:14의 앞 부분만 인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마태는 임마누엘과 예수님이 같은 인물이라는 깨달았다. 그는 임마누엘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를 위해 번역까지 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교부들의 글에 따르면, 마태는 원래 히브리어(아람어)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 마태복음의 필치가 독특한 것(히브리어의 일반적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라도 이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짐작할 수 있다: 마태는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사 7:14와 8:8,10에 나오는 임마누엘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11).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분과 그분의 사역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예수님이 비록 직접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예언된 임마누엘이다. 우리는 이 사실 통해 한 걸을 더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여호와)이 도우신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도우신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동시에 예수님(= 여호와가 도우신다)이다.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는 요셉의 순종을 보도하는데, 이것을 극도로 간결하게 한다. 성경은 원래 이와같이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 심리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그가 순종한 행위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그가 ... 행하여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결심, 실행,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 마리아를 (나쁜 소문으로부터)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 하나님의 뜻에 머리를 숙이는 것, (메시아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 마리아는 이제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다윗의 가족이 되었다. 물론 요셉은 아들을 낳기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녀 상태의 몸을 그분 장막(요 1:14)과 자신의 성전(고전 6:19)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에서 나온 요셉의 행위였다. 마리아는 그 이후 요셉에게 4명의 아들과 적어도 2명의 딸을 낳아주었다(마 12:46 이하; 13:55-56). 이 모든 것은 천사가 고지한 대로 이루어졌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경공부(1:18-25) 

 

1. 준비 

 

1) 우리가 요셉과 마리아의 처지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을까? 

2)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 예수님의 사명과 활동은 무엇인가? 

3) 좀 더 시간이 있으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둘러싸고 일어난 토론들을 살펴보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거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검토해보자. 

4) 성경공부의 제목을 제안해본다: 이적으로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놀라운 사명. 

 

2. 실시 

 

1) 예수님 탄생의 이적 

유대인으로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신약에서 성취되어 증거되었다. 이적이 일어난 경과는 자세하게 보도되지 않는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창조되었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 창조의 시작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난다. 

2) 이적은 두 사람의 순종과 결합하여 있다. 

성경에서의 이적은 교만이 아닌 겸손과 사역으로 인도한다. 마리아는 말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요셉의 말 없는 고통과 순종은 그의 성경지식과 그의 삶이 일치함을 보여준다. 드디어 하나님은 천사의 고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순종한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3) 예수님의 놀라운 사명 

일반적인 유대인의 기대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먼저 권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주요 사명은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 되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주는 유일한 위로는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 = 여호와가 도우신다. 이것은 깊은 의미에서 임마누엘이다. 

 

 

 

4. 이방인이 메시아 탄생을 경배하다(2:1-12) 

 

 사건은 두 가지 강조하는데, 첫째로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시라는 것과,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위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께서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눅 2:1 이하  배경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마태는 2:19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난가셨다가) 나중에 나사렛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마태는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정확한 지역 이름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갈릴리에도 스불 지파에 속한(수 19:15) 나사렛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베들레헴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800미터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근처에는 라헬의 무덤이 있다(창 35:19). 베들레헴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주하여 다윗 자손인 보아스와 결혼한 곳이다(룻기 1-4). 그곳은 또한 다윗이 성장한 곳이다(삼상 16:1 이하; 17:15). 미가서 5:1 이하 따르면 유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 11:1의 진술과 일치한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신다는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날짜까지 언급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 탄생하셨다(눅 1:5). 그는 헤롯 대왕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기원전 37-4 사이에 다윗에 다스렸던 영토에 거의 먹는 지역을 다스린 왕이다. 대왕이라는 말은,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으로서, 그가 대형 건축물을 세웠으며, 로마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그는 항구와 바닷가에 큰 도시 가이사랴와 갈릴리 호숫가에 디베리아를 짓고, 또한 로마 신과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몇 개의 사원을 건축했다. 헤롯 양식의 건물은 아테네, 스파르타, 두로, 시돈, 비블로스, 베리투스, 다메섹, 안디옥에도 있었다. 그는 또한 여러 요새를 지었다. 예루살렘에 안토니아와 또 하나의 요새를 짓고, 또한 마케루스, 헤로데이온, 마사다 등에도 요새를 지었다. 무엇보다도 헤롯 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증축한 사람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곳도 헤롯이 지은 것이다.  

 영특하고 용감한 왕의 지배 이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엄청난 죄가 쌓여있고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헤롯은 혈통으로 볼 때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돔의 후손인 이두메아 사람이었다. 이들은 불과 몇 십 년 전에 마카비 및 하스몬 왕조의 요한 1세 히르칸(135-104)에 의해 강제로 할례를 당했다. 헤롯은 하스몬 왕조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으므로 왕이 된 인물이다.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먼저 기원전 37년에 하스몬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의 딸인 미인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했다. 헤롯은 마리암네 형제인 아리스토불 3세를 먼저 대제사장에 임명했다가 기원전 35년에 익사시켰다. 기원전 29년에는 엄청난 질투심이 발동하여 마리암네를 사형시켰고, 그다음 해에는 그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를, 기원전 25년에는 하스몬 왕조에서 남아 있는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헤롯은 마리암네를 왕비로 가지고 있을 때에도 다른 여자를 가졌으며, 마리암네 외에 모두 9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의 가족 사이에는 불신과 증오가 계속 증가했다. 그는 죽기 전에 마리암네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 그리고 또 하나의 아들인 안티파터를 사형시켰다. 그는 큰 고통 가운데서 죽었는데, 죽기 바로 며칠 전에 몇 명의 바리새인을 죽였다. 이들이 성전의 성소에 세워진 황금 독수리를 쳐서 넘어뜨린 것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대 백성은 헤롯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유대인보다는 그리스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헤롯은 약속된 메시아적 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 태어났을까?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으므로, 0년은 아니다. 기원전 7년에 마술사를 유대로 인도했던 특별한 별자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원전 7-5 년 사이에 탄생하셨다고 추측한다(마 2:16). 이로써 예수님은 수난 전에 40세가 안 되셨다고 하는 요 8:57의 진술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라,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동방이라는 말은 아라비아를 의미한다. 민 23:7에 따르면, 발람은 동방 유프라데스  연변에서 왔으며, 사 2:6에 따르면, 동방에서(= 바빌론) 점술을 치며, 계 16:12에 따르면, 유프라테스 강과  뜨는 곳(= 동방)의 왕들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방 바빌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방문객들은 마고스(마술사)이다. 동방박사나 거룩한 세 왕들(역자 주: 가톨릭에서 사용)이라는 번역은 잘못되었다. 마고스 페르시아나 바빌론의 사제들을 일컫는데, 이들은 점성술가이며 고대 바빌론의 점성술을 이어받아 연구하는 자들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좇지 않는 자를 별자리의 지배를 받는자라고 하였다. 예수님 시절에는 이미 이 명칭이 멸시를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성가는 황제의 고문으로까지 올라갔다(마술사 엘루마는 구브로 총독 서기오와 가까운 사이였다: 행 13:6,8).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마 2:1 이하에서 일어난 일은 매우 독특한 사건이며, 이러한 것은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사건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그들의 질문은 당시의 예루살렘의 분위기에서는 마치 벼락 떨어진 것과 같았다. 기원전 7년은 밝은 그 별이 나타난 그 해였는데, 바로.그때에 헤롯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을 살해시켰다. 이는 그들이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3부터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헤롯 가에는 어두운 구름이 덮쳤다. 그러므로 점성가들의 출현은 극도로 의심이 많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수호하고자 했던 헤롯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이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점성가들은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기만 해도 당연히 대답이 나오리라고 확신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확신이 차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내적 확신만으로는 충분한 믿음의 기초가 되지 않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신이 강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점성가들의 잘못된 신앙을 사용하여 그들을 그리스도로 이끄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비록 잘못된 믿음으로 출발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올바른 믿음으로 바뀔 수 있다. 이 사람들은 길고 험한 여행을 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표적을 주셨다는 루터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해서 온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 밝혀진 대로 기원전 7년의 별자리의 12 동물 띠(역자 주: 동양의 12 동물의 띠와 비슷하다)에 따르면 물고기 해인데, 이때는 목성과 토성이 특별한 자리에 들어온 때였다. 케플러가 제일 먼저 이것을 계산해냈다. 목성은 세계를 다스리는 자의 별이며, 토성은 유대인의 별이다. 점성가들이 토성을 유대인의 별이라고 명명한 것은, 아마도 기원전 600년부터 유대인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 있을 때에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다니엘 1-6장을 참조할 것). 예를 들어 바빌론에서는 바빌론 탈무드가 생기고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그곳의 양대 강(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는 아디아베네 왕가가 유대교로 개종했다. 66년에는 아르메니아의 왕이며 점성가인 티리다테스가 네로 왕을 경배하기 위해 로마로 왔다. 그 이유는 서쪽에서 그에게 별들이 세계의 지배자인 네로 왕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 점성가들이 혹시 구약을 알고 있었더라면, 창 49:10과 민 24:17이 그들의 생각을 확증했을 것이다. 후자에서는 야곱의 별이라고 분명히 가리킨다. 배하러 왔다 표현은 정치적인 경배와 종교적인 경배 두 가지로 사용된다. 이마도 이 점성가들에게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었을 것이다.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경악)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경악한 이유를 설명했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놀랐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에서는 또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2:16 이하). 헤롯 왕이 점성가들을 그렇게 신뢰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메시아가 곧 오시리라고 믿다. 다른 이유는 헤롯가를 향한 몇 가지 신탁이 이미 그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헤롯 왕은 유대인의 예언을 존중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소집했는데, 이것은 공회 소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라고 물었다. 헤롯은 자기 경쟁자(자기의 왕위를 노리는 자)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알아내려고 했다.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대답은 분명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들은 두 곳에서 증거 본문을 찾았다. 인용 구절은 미가서 5:2에서 시작하여 삼하 5:2로 넘어갔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받은 약속은 그때까지도 백성에게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미 5:2에는 베들레헴 다음에 에브라다라는 말이 있다. 창 35:19와 룻 4:11에 따르면, 이것은 베들레헴의 다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는 좀 더 자세히 유대 땅이라고 언급하는 대신, 에브라다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다른 지역의 베들레헴과 혼동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서기관들은 결코 (작지) 않다라는 말을 첨가한 후에 그 이유를 설명했다12).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면, 그곳은 결코 작은 (의미가 없는)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은 구약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유대 고을 중에라고 하지 않고 유다의 제후 중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래 히브리어(아람어)로 쓰인 마태복음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실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미가서 본문대로 유대 지파 중에라고 쓰였을 것이다. 목자, 또는 먹이다라는 말은 왕에 대한 구약의 명칭이다. 이것은 동시에 왕에 대한 책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삼하 7:7; 렘 3:15; 23:2 이하;  34:2 이하;  5:3; 7:14).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에서 선지자는 미가 선지자를 말하며, 이것은 마 1:22의 표현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개자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헤롯 왕을 두려워해서 그랬을까? 혹은 점성가들의 말을 듣고 행동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교만했을까? 아는 것만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 왕은 가만히(몰래) 행동한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이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점성가들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 메시아가 어디에서 났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헤롯은 그 위험한 경쟁자를 몰래 죽이기 위해 점성가들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아이들을 죽이게 되는데, 지금은 그러한 의도는 없었다. 단지 예수님만 죽이려고 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라고 한 것은 물론 거짓이다. 헤롯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거짓 표현의 대가로 알려졌다. 거짓과 살인은 사단이 일하는 방식이다(요 8:44). 그러나 그와 같은 악인도 결국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다. 헤롯 덕택에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탄생 초기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분 자신이 생명이며 생경을 가져다주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요 1:4; 4:14; 10:10). 그분이 아기로 누워있는 곳까지도 수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것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게 어떻게 대항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겔 34; 미 3; 렘 23; 마 21:33 이하)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점성가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헤롯으로부터 별다른 요구사항을 받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이방 점성가들의 이러한 진전되는 믿음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별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 별이 바로 베들레헴 위에 서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베들레헴에  때에 사라졌던 별이 구름으로부터 다시 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리스 본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해보자: 그들은 큰 기쁨으로 격렬하게 기뻐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목적을 드디어 찾은 것과 같았다는 표현이다. 죽이려고 하는 헤롯 왕과 자기 몸을 사리는 유대 지도자들은 멀리에서부터 메시아를 찾아온 이방인과 얼마나 큰 비교가 되는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요셉이 등장하지 않고 아기의 모친 마리아의 이름만 나온다. 요셉이 아버지라고 불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기적에 의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들이 새로 태어난 아이와 그 어머니를 두 눈으로 본 순간에 그 별이 그들에게 준 메시지가 성취되었다. 그들이 어렵게 찾은 집이 너무 허술하고 부모가 단순한 평민이라는 데에 실망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엎드려 기에게 경배했다. 동방 사람들의 경배는, 무릎을 꿇거나 배와 이마를 땅에 대고 앞으로 눕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는 표시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자의 대표격인 목자들(눅 2:8 이하)과 이방인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요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벌써 여기에 앞으로의 예수님의 인생이 암시되어 있다. 

 

점성가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보배합은 보배가 들어 있는 통을 말한다. 이 보배는 왕에게 드리는 선물로서 황금과 향기가 나는 향품인 유향과 몰약이다(창 43:11; 왕상 10:2; 삼상 10:27). 동시에 이 세 가지는 메시아 시대를 위한 선물이다(시 45:9; 72:10-11, 15; 애 3:6; 사 60:6). 이 물건들이 등장하는 시편과 아가서는 당시에도 메시아적으로 이해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점성가들을 통해 구약 예언의 일부가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러마 몰약은 동시에 예언적인 선물이다. 즉, 그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알려준다(요 19:39).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신다. 여기에는 요셉의 경우와는 달리, 주의 천사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친근감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점성가들에게는 좀 더 거리를 두고 계신다. 우리는 신자로서 꿈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점성술은 더욱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에 대해 벵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적인 수단을 사용할 줄 아는 자는 특별한 것을 찾지 않는다. 이것에서 말하는 다른 길은, 아마도 베들레헴의 오른쪽으로 가서 기드론 계곡을 넘어간 후에 사해에 이르는 요단 강 쪽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그들은 다시 역사의 시각으로부터 사라졌다. 이렇게 끝이 짧은 것은, 마태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호하셨다. 그분은 점성가의 경배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시며, 진실로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 된다(창 49:10)는 것을 확증하셨다.  

 

 

성경공부(2:1-12) 

 

1. 준비 

 

1) 기도와 서로 간의 대화를 위해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가 점성가로부터 개인적으로 배울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헤롯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가? 

2) 기도와 대화를 위해 메모할 것은: 복음서의 시작에서(1:1-2:12)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은 무엇인가?  

3) 성경연구를 위해 알아볼 것은: 구약에서 이방인을 긍정적으로 소개한 대목을 찾아보라(예를 들어: 이드로, 요나가 탄 배의 선장, 니느웨 왕, 헷 사람 우리야, 나아만 장군...). 

4) 제목을 제안한다: 뜻밖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배자. 

 

 

2. 실시 

 

1) (메시아를 영접하는 데에) 실패한 왕. 

헤롯 왕의 인생을 간단하게 묘사할 것  예수님과 반대 상으로서의 헤롯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실패한다: 이기심, 불신, 권력욕, 간교한 술책, 살인욕과 복수욕   왕의 행동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절한다는 징조인가? 수난의 그림자가 구유에 비취고 있다. 

2) 뜻밖에 나타난 경배자 

바빌론에서 온 점성가를  하나님은 잘못된 경배자들에게도 역사하신다  그들은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을 찾는 그들을 목적으로 이끄신다  그러나 확신은 단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베들레헴에 대한 예언)  그들이 예수님은 찾은 기쁨   사건은 마리아와 요셉을 위로했다  점성가들의 예언적인 선물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  이러한 경배자가 올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주위에도 뜻하지 않게 이러한 경배자가 있는가?  이것은 선교하라는 표시이다.  

3) 마땅히 경배해야 할 자가 경배자가 되지 못하다. 

대제사장과 율법사들은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헤롯을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만했을까?  아는 것 하나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도 이렇게 의미 없는 경배자에 속하는가?  

 

 

 

5. 왕의 추적과 애굽으로의 도주(2:13-23) 

 

2장 후반부는 폭력적인 현재의 유대 왕이 합법적인 래의 유대 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에 관해 보도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년기 일부분을 애굽에서 보내셔야 했다.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둘째 모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 손으로 메시아를 지켜주시는 동안에 헤롯은 죽는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모든 적의 저항 가운데서도 성취된다. (하나님 나라!)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이곳의 사건 묘사에서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한다 현재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본문은 헤롯이 실제로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점성가들이 자기 몰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헤롯이 알기도 전에(그가 악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지시하신다. 애굽으로 피하라 지시는, 애굽이 이스라엘의 노예 주인이었을 뿐 아니라, 피난처였음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한다(창 12:10 이하; 42:1 이하; 43:1 이하; 46:1 이하; 왕상 11:40; 사 31:1 이하; 36:6; 렘 26:21 이하; 41:16f; 42:1 이하; 43:1 이하; 44:1 이하). 애굽은 말세에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사 19:19 이하;  15:10). 헤롯이 지배하고 있을 당시에는 애굽인과 헤롯 사이가 좋지 않았고, 거리상으로 베들레헴에서 직선거리 100킬로미터 떨어졌으므로, 애굽은 피난처로 안성맞춤이었다.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요셉은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결심을 하고 바로 그날 밤에 애굽으로 피신했다. 14절은 13절의 천사의 명령은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이것은 요셉이 즉각 순종했다는 것 강조한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갔다. 다시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 메시아에 대항하여 싸우는 헤롯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나님은 또한 그분의 사역에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요셉은 신약 전체에서 가장 귀중한 믿음과 동역의 사람  중의 하나이다.  

 

 모세는 굽으로부터 도주했다(출 2:15). 둘째 모세인 예수님은 애굽으로 도주하셨다. 탈무드 예수님이 애굽에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는 애굽의 마술의 표시를 그의 몸에 새겨서 (이스라엘에) 가져왔다 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한다. 예수님은 도주로 말미암아 두 대륙의 시민이 되셨다. 그분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이었으며 유럽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기독교를 유럽의 수출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주지해야 한다. 구원은 어떠한 종족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에게서 온다(요 4:22). 예수님과 요셉, 마리아는 이집트에 얼마나 계셨을까? 헤롯은 기원전 4세기에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최고로 잡아서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사이, 즉 최대한 4년간 그곳에서 계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 아들을 망명자로서 고난을 겪게 하셨을까? 이것은, 그의 아들이 진실로 우리의 구속주요 화해자가 되시기 위해서는(참고: 사 53:3 이하;  8:3-4; 고후 8:9; 히 2:14 이하; 4:15-16; 5:8 이하), 세상의 모든 병과 고난을 겪으시고 그것을 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악이 성숙해질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마 13: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를 넘지 못한다(욥 1:12; 2:6).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 가족은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속에서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낮아지는 길에서, 세상 권력자들을 통한 박해 속에서 예수님은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교회의 모범이요 원형(原型)이 되셨다(마 16:24 이하13); 고후 4:7 이하14);  12:13 이하). 

 

요셉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 믿음이란 또한 기다리는 것이다. 2:13의 말씀(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에 따르면 요셉은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즉, 하나님께서 날짜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몇 년이 지나갔다. 우리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그러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7)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가? 

 

마태는 또다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았다.  약속은 1:22와 같은 형태로 이것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호 11:1; 참고: 민 23:22; 24:8). 이 인용 구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미를 준다: 먼저, 마태에게는 예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 것과 같은 똑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 둘째로는, 예수님은 전체 이스라엘의 화신(化身)이시다.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대표자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예언한 것이 그분에게서 성취된다. 셋째로, 마태는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을 미래에 적용했다. 호 11:1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전형적(유형학적)이다. 즉, 그 당시에 성취된 것이 말세에 새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성취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신약이 어떻게 구약을 해석하는지에 대해 귀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즉, 신약은 구약을 예언적이고 유형학적으로 이해한다(롬 15:4; 고전 10:6,11). 이러한 예언적-유형학적 관점은 다시금 구속사의 전망을 넓혀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바로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체류하신 것을 통해 한 걸음 더 진척되었다.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점성가들을 속이려고 했던 헤롯은 자신이 속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자기 성찰로 이끄시려는 경고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심히 노하였다.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행동과는(행 5:38-39) 대조적이다. 이렇게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자는 결국 멸망할 뿐이다. 그는 사람을 보냈다. 즉, 자기에게 충성스러운 군인들을 보낸 것이다.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  살부터 그 아래로 모두 살해했다. 이 살해 사건은 다른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기 가족을 많이 죽이고 무수한 정적을 살해한 헤롯의 말기 행적과, 또한 그의 성격에 꼭 들어맞는다. 헤롯은 점성가들로부터 들은 날짜를 잘 계산해서 행동에 옮겼다(7절). 그는 예수님을 꼭 죽이기 위해 기간을 앞뒤로 넉넉하게 잡았다. 그런데 왜  살부터 그 아래로였을까? 유대인은 그 해가 이미 시작한 해는 1년으로 계산한다(역자 주: 한국인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점성가들은 그 별을 일  이상 전부터 관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점성가들은 기원전 6년에 헤롯에게 왔고, 예수님도 그때에 탄생했을 것이다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 때를 기원전 7-5년 사이로 넉넉하게 예측하 것이 좋겠다. 많은 가족이 (아무 죄도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 잔인한 사건 속에서도 마태는 구속사적인 성취를 본다. 렘 31:15의 이 인용은 새 언약을 약속하신 것과 같은 장에 나온다. 그곳에서  언약의 말씀이 오기 전에 15절의 고통스러운 기간이 먼저 올 것이라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속에는 유아 살인이라는 고통이 앞선 것이다. 라마 예루살렘 동북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라마는 라헬이  곳이며, 베들레헴 지역에 속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녀의 비석이 있었다(참조: 35:19-20; 마 23:29). 따라서 렘 31:15는 슬퍼하여 통곡하는 소리 들리는 장소를 묘사하고 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라는 상징적 표현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현재 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미리) 느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참고: 요 8:56). 렘 31:15는 예레미아 시대에 이미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그 말씀은 또 한 번 성취되었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 모든 폭군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폭군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폭군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도구 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헤롯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눈에 띈다. 이미 죽은 자를 평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20절은 13절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시고 그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신다. 유대인은 지금 그 땅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하지 않고 옛 이름인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이렇게 세상의 권세는 지나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했던 군주가 오늘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리 앞에 산과 같이 큰 환란이 우뚝 서 있고, 이것은 이길 수도, 견딜 수도 없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한 마디면 이것이 마치 허깨비처럼 모두 사라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며(시 2:4). 참고 구절: 출 4:19; 시 118:9;; 146:3; 사 51:12; 렘 17:5. 

 

21절은 다시 14절에 상응한다. 그는 이스라엘 땅으로 왔다. 직역하면 그는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이다. 즉, 요셉은 애굽의 하천에 있는 경계선을 넘어섰다: 요셉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그분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그는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들었다. 헤롯의 사후 후계자 문제를 놓고 싸움이 있었다. 결국 로마는 아켈라오가 유대를, 그의 형제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레아를, 그리고 또 다른 형제 빌립이 트라코니티스와 북동쪽의 땅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참조: 눅 3:1). 요셉은 여행 중에 이 결정을 들은 것 같다. 그 결과 요셉은 거기(유다)로 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당시의 보도를 읽은 사람은 그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유대인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어 아켈라오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진정했으나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 롯과 닮은 데가 너무 많았 때문이다. 그는 너무 잔인했으므로 약 10년 후에(기원후 6년에) 로마에 의해 폐위되어 귀양갔다. 이런 가운 요셉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 매우 훌륭한 점이다. 그가 꿈에 지시함을 받 다음에 비로소 갈릴리 지방으로 갔다. 그는 유다에 속하지 않는 가자와 아스칼론 지역의 해안도로를 따라(참고: 행 8:26) 유다를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아켈라오는 법적으로는  아니라 한 단계 낮은 에트나르크였다. 마태가 이곳에서 법적인 용어와 달리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왕이라고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그가 갈릴리 지방으로 피했다는 말은, 요셉이 갈릴리에 살던 적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그가 지금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피하여 가능한 한 빨리 갈릴리로 향했다는 말이다. 다시(참조: 눅 2:4) 그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았다. (그런데 마태는 단순히 나사렛이라고 하지 않고) 나사렛이란 동네(도시) 데, 이  표현이 좀 특이하다. 그러나 이로써 마태는 벌써 그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이제 그 의미를 해설한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셈족 언어를 아는 유대인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서가 원래 히브리어로 쓰였다는 하나의 암시가 된다. 왜냐하면 마 2:23은 사 11:1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새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가지 히브리어로 nezer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단지 자음만 사용하므로 나자렛인에서 인과 모음을 제거하면 n-z-r로 표기하는데, 이것은 사 11:1의 가지이다16)(참고: 사 53:2; 렘 23:517); 33:15; 슥 3:8; 6:12). 나실인(참고 민 6:1 이하; 삿 13:5)을 암시한다는 이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유대인은 나자렛인을 nozri라고 했다. 끝에 붙은 i를 제거하면 다시 자음 n-z-r만 남는데, 이것은 사 11:1의 가지와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어 형태인 나사렛인(역자 주: nazoraios)과 히브리어-아람어 형태인 nozri  11:1을 가리킨다. 또한 예슈아 하-노즈리(Jeshua ha-nozri) 예수님의 유대식 이름이다. 아마도 요 19:19에  3개국 언어로 쓰인 십자가의 명패에도 이렇게 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다. 마태는 선지자들(복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사야 11:1; 53:2외에도 예레미아(23:5; 33:15)와 스가랴(3:8; 6:12)도 가지 대해 예언했기 때문이다. 마태는 벌써 4번이나 이렇게 성취된 것을 보았다. 나사렛은 기원후 4년까지 유대에 속한 마을이었다. 복음서가 언급하기 전에는 그 마을이 다른 곳에서 언급된 적이 없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팔레스타인 마을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로써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대한 보도를 끝맺는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사셨다: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시면서 성장하였고, 수공업자로서 생활비를 셨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운동이 시작할 때 비로소 그분은 은둔의 삶으로부터 나오셨다. 그러므로 이제 마태는 30년을 뛰어넘어서 다음 장에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성경공부(2:13-23) 

 

1. 준비 

 

1) 이곳에는 많은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므로, 연대별로 사건을 정리해보는 것이 좋겠다. 

2) 함께 생각해보자: 이 단락은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아주시는가를 말하고 있는가? 

3) 제목을 제안하면: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진행된다. 

 

2. 실시 

 

1) 위험 속에 사는 삶. 

 

예수님과 그의 가족은 앞에서도 위험에 처했다. 혹시 점성가들의 실수로 자기들이 있는 곳이 탄로 날 수도 있었다  헤롯의 살해 계획  애굽으로의 위험한 길과 도주  외국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  아켈라오에 의한 새로운 위험  드디어 나사렛에 도착하다  우리도 자신이 걸어온 위험에 대해 생각해보자. 

 

2) 감당할 수 없이 강한 적.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지만 수공업자에 불과했다  그는 애굽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으며, 단지 하나의 유대인 불과하였다  그에게 힘이 될만한 친구도 없었다  그런데 헤롯 대왕 그의 적이었다   적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유아 살인 사건에서 드러났다  아켈라오도 왕이었고 잔인한 적이 될 소지가 있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에 이와 같은 것을 체험하지 않는지 생각해보라. 

 

3)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된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에게 길을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요셉의 가정을 도주 과정에서, 그리고 외국 땅에서 보호하신다  폭군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계획과 목표는 수포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그분이 첫 모세를 애굽에서 보호하셨듯이, 두 번째 모세인 예수님도 보호하셨다.  

 

 

 

6. 세례자 요한(3:1-12)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 사역을 예수님 사역의 시작에 위치시킨다. 그중에 누가는 가장 자세하게 보도하는데, 그는 요한의 탄생과 어린아이 시절까지 보도하며, 그의 설교도 상세하게 기록한다. 그 대신 마태는 유일하게도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에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한다. 

 

 명의 복음서 기자 모두는 세례 요한이 아직 옛 언약에 속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연결하는 자이며, 동시에 옛 언약에서는 가장 큰 자였다(마 11:11). 세례자의 구속사적인 임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맞도록 준비시키는 일이며, 예수님이 은둔생활로부터 공적인 메시아적 삶으로 전환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1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때에라는 말은 예수님 가족이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마태가 보도하려는 사건이 일어난 때를 말한다. 눅 3:1-2에 따라서 우리는 그때 언제인지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기원후 28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33-35세였다. 

 

세례자가 등장한다(이르러). 즉, 그도 은둔생활로부터 나왔다. 이 표현은 눅 1:80과 연관되어 있다. 세례자는 흔히 주장하듯 에센파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은 세례자 요한으로 소개된다. 유대인 전통에서도 그를 이렇게 부른다. 요한네스(요하난 = 하나님은 은혜롭다)는 흔한 이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특이한 점은 그의 세례 행위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룬다. 마태는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그의 메시지를 소개한다. 요한은 설교자 등장한다. 마가, 누가, 요한, 그리고 유대인 요세푸스도 이렇게 소개한다. 이 명칭은 우리로 하여금 사 40:3-4를 기억나게 한다. 그가 등장하는 장소는 유대 광야라고 한다. 성경 여러 곳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곳은 요단  아래 지역으로서, 아마도 예루살렘 여울(얕은 시내)이 동편 요단으로 흐르는 곳에 가까운 장소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일 것이다(참조: 요 1:28; 3:22-23; 4:1 이하). 그러므로 이곳은 적막한 곳이면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와 가깝기 때문에 (요한의 사역지로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곳은 동쪽으로부터 나와서 요단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작은  시내들이 있는 곳인데, 6개의 셈 중에서 5개는 일  내내 흐르고 있었다. 

 

광야라는 말은 독자에게 어떤 특별한 기억을 일깨운다. 호 2: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또 한 번 광야로 이끄신다(참고: 렘 2:2-3; 호 13:5). 그 광야에서는 모세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기적이 다시 일어난다. 이사야 40장도 구원의 길이 광야를 통한다고 예언했다. 다윗은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 마카비 가는 승리를 거두었다(역자 주: 외경 마카비서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이 구원의 시대를 광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연관시켰다. 이마도 이러한 이유로 에센파나 은둔자들이 광야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행 22:38의 거짓 메시아도 아마도 같은 이유로 4000명의 폭도를 광야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요단  아랫부분에 맞닿은 유대 광야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하 2:6 이하에 따르면 바로 여기에서 엘리야 하늘로 올라갔다. 요한이 바로 이곳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그가 엘리야 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그가 말 3:23 약속된 엘리야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18). 우리는 이곳에서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놀랍게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마 5:18). 

 

 

마태는 단 한 문장으로 요한의 설교를 요약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하라(방향을 바꾸어라) 이스라엘이 정도를 벗어났을 때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였다(예: 사 6:10; 렘 36:7; 겔 33:11 이하; 호 14:2; 욜 2:13-14; 말 3:24; 욘 3:8). 이것으로 우리는 다시금 구약이 신약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지자적 메시지의 특징인 약속과 성취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메시지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 방향을 바꾸어라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님께 돌리고 죄의 길을 떠나라! 의미이다. 그런데 지금은 요한이 다른 새로운 이유를 들고 있다: 천국이 가까웠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이 가까워졌다.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온다. 그런데 이것이 왜 우리들의 방향전환, 회개를 요구하는가? 왜냐하면 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정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례자의 메시지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기쁜 소식과 심판 예고이다. 마 4:17에 따르면 예수님의 메시지도 이와 똑같다. 이것은 같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바실레이아 투 테우)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하늘의 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되어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 이름을 하늘(복수) 표시하는데, 이는 그들이 출 20:7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를 꺼리 때문이다.  용어 사용만 보더라도 마태복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 지배는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모든 다른 나라와 정치 권세를 대신한다(참고: 단 2:44-45; 7:14 이하).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는 로마인을 쫓아내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회구조의 변혁이나 헤롯 당원을 제거하자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가지만 강조한다: 죄가 사라져야 한다! 마 1:21에서와 같이 여기 죄 문제에 인류 핵심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마음을 가다듬어 새롭게 들어야 한다.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는 세례자의 특징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그것은 마태가 세례자를 사 40:3의 인물과 비교하는 것과 그의 선지자적 의상과 음식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 1:23에 따르면, 세례자 자신이 사 40:3에서 말한 선지자라고 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세례자이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고 외치는 회개의 요구를 통해 그는 주님의 길의 예비자가 되었다. 사 40장은 당시 유대인에게 메시아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그 세례자는 메시아 시대가 동터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참고: 눅 1:17,76,79; 요 1:8,15,20). 그는 왜 자신이 말 4:5에 예언된 다시 올 엘리야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사 40:3에 등장하는 외치는 자의 역할이 엘리야 역할보다는 더 낮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사명을 마치기 전에는 사 40:3의 역할 이상을 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을 꺼렸다. 그가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완수한 후에야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판단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진짜로 다시 올 엘리야이다(마 11:14; 17:10 이하). 그런데 이사야는 벌써 세 번째 인용되었다(1:22 이하; 2:23). 신약은 제1 이사야와 소위 제2 이사야(40장 이하)의 구별을 모른다. 예수님과 신약 전체는 단지 하나의 이사야 선지자 외에는 모른다. 

 

그런데 요한이 다시 올 엘리야라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4절의 허리의 가죽 띠 왕하 1:8에 묘사된 엘리야  연상시킨다. 원래 동방에서 혁대 아름답게 장식된다. 그러나 가죽 띠는 선지자의 소박함을 표현한다. 약대 털옷 마찬가지이다. 털로 만든 옷은 참회자와 가난한 자의 옷이다. 낙타 털은 특별히 질기므로 오래 보존된다(슥 13:4). 그의 음식도 돈으로 사야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그를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존했다. 왕상 17:3에 따르면 엘리야 요한이 있었던 곳과 멀지 않은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살았는데, 이점에서도 요한은 엘리야 닮은 점이 있었다. 눅 7:33에 따르면, 세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음식물로 취하지 않았다. 메뚜기  11:21-22에 따르면 허락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음식으로 구워먹기도 한다. 야생 꿀(석청) 요단 강변에 특별히 풍성했다고 한다. 삿 14:8-9에 등장하는 나실인 삼손을 참조하라(다음의 곳도 마찬가지이다: 출 3:8; 신 8:8; 32:13; 잠 24:13; 사 7:15). 마지막으로 우리는 렘 35장에 나오는 레갑족속들이 술과 집과 농사를 포기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성경 전체는 소박한 삶을 가르치고 있고(verkuenden), 화려함과 과식을 죄로 보고 있다. 인색함과 문화에서 오는 사치에 대해 성경은 경고를 보낸다.  

 

5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세례자가 사람들에게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 갔다. 마태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요단 강 사방(전체 요단 강 지역)이라는 말은 행정적, 정치적 용어이다.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사방(행 1:8)이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잘 알려졌는지를 말해준다. 예루살렘 예수님께는 문을 닫고, 요한에게는 문을 열었다!(참고 마 23:37). 우리는 여기에서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참고 2:25,38). 탈무드에서 제일 오래된 기록과 그 당시의 다른 유대인 문헌은, 사람들이 얼마나 애타게 메시아를 기다렸는지를 증거한다. 바리새인과 에센파, 열심당원들, 혹은 시골의 단순한 사람들도 모두 메시아를 대망했다.  

 

 

그들은 세례자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11절에 따르면, 그들은 회개 세례를 받았다. 즉 성령님이 임하시는 세례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준비시키는 세례이다(참고:  19:1 이하). 지금 여기에서 세례를 받는 자는 그것으로써 죄를 떠나려는 결심을 알리는 것이다. 죄 고백은 세례에 앞선다. 요단 강에서 세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만 장군은 깨끗해지기 위해(왕하 5:10,14) 요단 강에서 일곱 번이나 몸을 씻어야 했다. 흐르는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을 씻는 것이 아니다. 세례자에 의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백성에게 정결한 물을 뿌리신다고 말하며, 회개 시편은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위해 기도한다(참고: 사 4:4; 겔 36:25; 슥 13:1; 시 51:4,9). 그러나 죄로부터 최종적인 정결함, 구속받음은 단지 예수님의 피로써만 가능하다(참조: 행 22:16; 고전 1:30; 6:11; 히 10:22; 계 1:5; 7:14). 그러므로 우리가 구속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한다. 

 

세례자 요한이 행한 것 중에 어떤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교육을 통해 미리 준비시키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죄 고백은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참조: 출 32:30 이하; 레 4-5장; 단 9:4 이하; 시 32:51). 제사장은 거룩한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했다(출 29,4; 30:17 이하; 40:31-32; 레 8:6; 16:4). 이방인이 참회하고 유대인이 되고자 할 때에는 침례를 받아야 했다. 에센파 사람들이 정결 목욕을 하루에 몇 번씩 하는 것은 잘 알려졌다. 그럼에도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이스라엘 전체가 정결케 되기 위해 요단 강가에서 받는 세례는 벌써 새로운 약속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놀랍게도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그들도 죄를 고백하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나중에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듣게 되는데, 예수님의 교회에 많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사두개인이 포함됨) 들어왔다(행 6:7; 15:5). 그런데 에센파 사람들이 오지 않았는데,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이 기거하는 곳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세례 요한이 에센파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들이 오지 않았을까? 우리는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에센파들은, 그들이 예정론을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회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도 그들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해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로 불러낸다. 그러나 세례자와 예수님은 훈련을 위해 세상으로 보내신다(참고: 요 17:11; 14-15). 

 

바리새인은 특별한 공동체 회원이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을 매우 정확하게 연구하여 그것을 진지하게 삶에 적용한다. 이들을 종교적 엘리트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기에 간편하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사대 종교단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열심당) 가운데서 로마군과의 처절한 전투와 성전파괴 이후에 살아남은 유일한 단체이다. 오늘날 유대교는 바리새파에 그 근원을 두는데, 이것은 그들이 탈무드와 다른 문서에 대단한 학식과 지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사두개파와는 달리,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는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온다고 믿는다(행 23:6-8). 또 한가지 특징은 바리새인은 구전도 구속력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두개인이 세습적인 혈통적 귀족인 반면에 바리새인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시절부터 천막 제조업자였다(행 18:3; 빌 3:5-6). 이들은 회당을 관리하고 선교를 감당한 사람들이었다(마 23:6,15).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모든 당파 중에서 바리새파가 가장 가까웠으며, 우리는 그들이 몇 번 어린 교회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행 5:34 이하; 23:9-10). 그들은 짐작건대, 시리아인으로부터 종교적으로 박해받  생겨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들은 경건한 자, 혹은 하시딤으로 불렸으며, 오랫동안 독립 전쟁에서 마카비 가를 지원했다(마카비전서 2:42 이하). 후에 이들은 마카비 로부터 독립하여 알렉산드리아 여왕(기원전 76-67) 이래로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당이 되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은 무시무시한 고소이다. 아브라함,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다. 창세기 3장의 ,  사탄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이것으로써 세례자는 예수께서 후에 말씀하실 것을 지금 말한 것이다(마 12:34; 23:33; 요 8:44; 참조: 호 11:1; 렘 31:9). 요한도 사탄의 자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지도자들은 거짓 교사와 죄인으로 판정받았다. 그들은 앞으로 올 진노, 즉 최후의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신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곳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세례자는 불의와 악이 패배하고 영원히 벌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피할 길을 제시하거나 뒷문을 가르쳐 준다. 요한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을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멸망 받을 죄인이다. 그들에게는 피하 길로는 단 하나의 좁은 길밖에 없는데, 이것은 진정한 회심(방향전환)이다. 진정한 회심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구절에서 설명한다.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진정한 회심에 속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 합당한 열매이다. 이 열매는 인간의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 관계한다. 서양 사람은 지성을 다른 것보다 앞세우는데, 성경은 이러한 것을 모른다. 믿음과 회심은 생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입술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처해 있는 하나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결심한 다음에도 과거의 삶을 계속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우리를 심각하게 괴롭히는 문제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과거의 삶을 벗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돌아가심이 여기에 대한 대답을 준다: 하나님 아들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성령님만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의 모든 자기 정당화를 무너뜨린다.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는 성경 구절까지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죄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창 17:5; 사 41:8; 51:2; 63:16). 이것으로써 그는 결정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외적인 소속이나 전통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루어진 회심만이 이것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요한의 가르침은 자기 이후에 오시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가르치신 믿음의 이스라엘과 같은 것이다(참조: 요 8:33 이하; 롬 2:17 이하; 4:11 이하).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육신의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무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롬 4:17). 요한은 이것을 말하면서 주위에 널려있는 돌들 가르쳤을 것이다.  아이 히브리어로 매우 비슷하게 발음된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회개 설교가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는 10절에 다시 한 번 나타난다: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 나무가 벌써 뽑혀서 뿌리가 밖으로 나왔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심판이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와 나무의 상징은 계속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좋은 열매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구나 이해할 수 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자주 하나님께서 심으신 식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예: 시 1:1; 사 5:1 이하; 렘 1:10; 마 7:19; 13:40; 눅 13:6 이하; 요 15:6; 딛 3:14). 찍어 불에 던지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교제에서 제외하는 것과 고통스러운 벌을 의미한다. 아마도 불의 상징은, 옛날에 아이들을 우상에게 바치기 위해 태운(왕하 23:10; 대하 28:3; 렘 7:31; 19:6,13) 예루살렘 근교의 힌놈 골짜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사람을 태우는 곳은 토페트(Thopheth: 불 장소)라고 불렸다. 왕하 23:10에 따르면, 요시아 왕은 이 장소를 부정하게 했다. 그 후에 이곳에서 쓰레기와 짐승의 체를 태웠다. 요한의 메시지에 이스라엘 예언의 매우 강력하고 무서운 힘이 다시 타났다19). 그런데 이와 함께 그는 전혀 새로운 내용도 전했다: 메시아가 가까웠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오시는 이 바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자를 보듯이 묘사했다. 이 표현은 극도로 압축되어 있고, 구약 말씀을 생생하게 살린다. 겔 36:25 이하에 따라서 먼저 물로 깨끗함을 받은 후에야 영이 주어진다고 한 것 같이 이곳에서도 그렇게 된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단지 준비시킬 뿐이다. 유대인의 귀에는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리니라는 말은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뒤에 오는 사람이라는 말은 랍비의 제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자는 그의 선생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마 10:24). 그런데 요한과 예수님의 경우는 반대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벌써 요단 강 계셨는가? (그래서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셨는가?) 아무튼 13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요한에게 자신을 이셨다. 그런데 오실 자  깊은 의미를 가지 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신 18:15; 시 118:26; 단 7:13에 따르면 오실 자 표현되었 때문이다! 간결하게 말하면, 요한은 곧 자신의 사역을 이어서 완성하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다. 요한이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강한 자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암시하고 있다(참조: 시 24:8; 31:3; 71:3; 렘 20:7; 11:32, 18; 마 12:38 이하). 그러므로 앞으로 오실 더 강한 자는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의 신을 벗기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신이란 샌들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벗기는 것은 하인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메시아의 사역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다음의 선지서에 약속된 것, 즉 말세에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사 11:1 이하; 32:15; 44:3; 겔 36:26 이하; 욜 3:1 이하; 슥 12:10. 그런데 요한은 불로 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불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10절이나 12절의 불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정결하게 하는 것과 (금속을 불로) 정련하는 것이 명백하다(사 6:5 이하;  13:9; 말 3:3; 행 2:3; 말 9:49).  1:2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렇게 정화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사명을 수행하신 후에 세상의 심판자로서 사명을 수행하신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곳에 나오는 표현과 개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라는 (곡식을 까부는) 기구는 끝이 몇 가닥으로 갈라졌는데, 이것은 탈곡된 짚은 위로 던져서 바람과 무게로 인해 탈곡된 짚과 곡식을 분리하는 기구이다. 이것을 곡식을 까분다 한다. 가장 가벼운 것은 바람에 날아가고, 약간 무거운 짚은 다른 곳으로 모이고, 무거운 곡식알은 짚을 던진 바로 그곳에 떨어진다. 곡식을 까분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던져서 알곡과 짚은 분리하는 일이다. 메시아는 심판관으로서 이렇게 분리하는 일을 하신다(참고: 마 25:31 이하). 알곡은 마 13:8; 13:24 이하, 36 이하에 있는대로 구원받은 자를 말하며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쭉정이 회심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서 무서운 심판을 받을 자이다. 꺼지지 않는 불 우리로 하여금 10절과 사 34:10; 66:15 이하, 24; 렘 7:20을 연상케 한다. 

 

세례자 요한은 몇 개의 표현으로 우리를 압도하는 그림을 그려 주었다. 듣는 자는 자신의 앞날의 운명에 대해 극도로 큰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도 가까워진다. 설교는 전체가 구원받은 자에게는 왕국을 주시고 동시에 심판을 눈에 확연하게 드러내시는 메시아를 드러내고 있다. 그분은 잠시 후면 바로 오실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공부(3:1-12) 

 

1. 준비 

 

1) 사전의 도움을 받아 다음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다: 하나님의 지배, 바리새인, 사두개인. 

2)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세례자에게 특별한 점이 어디에 있는가? 예를 들어 구약과 다른 점은? 

3) 이 본문을 가지고 묵상하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자: 하나님의 어떤 약속이 이곳에서 성취되었는가? 

4) 다음과 같은 제목이 어떨까: 새 언약의 입구에서. 

 

2. 실시 

 

1) 새 언약의 입구에는 회개의 외침이 있다. 

성경에는 광야가 구원의 장소이다  세례자를 소개하는데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이 그의 설교이다  이스라엘은 회심해야 한다  구약은 세례자에게도 성취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회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새 언약의 입구에는 기쁜 소식이 있다. 

이스라엘은 몇백 년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지배가 무슨 의미인가?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제일 처음 말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분명해진다: 인간사에서 혁명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이다. 

3) 새 언약의 입구에는 정결함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고상한 자들에 대한 끔찍한 심판의 말씀(바로 바리새인들!)  요단 강에서 죄를 들추는 일과 죄 고백이 일어난다  요단 강에서 물 세례를 통한 임시적 정결이 일어난다  최종적 정결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께서 하신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깨끗게 되었는가? 

4) 새 언약의 입구에는 구속자가 오신다는 소식이 있다. 

 

세례 요한의 모든 가르침은 예수님을 향해 있다  그가 예수님의 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했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보도록 했다  오실 구속자는 우리를 온전히 정결케 하신다  오실 구속자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다  오실 구속자는 결국 모든 세상 사람을 심판하시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구속자와 인격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는가?  

 

 

 

7. 예수님의 세례(3:13-17)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세례받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 은둔생활로부터 나오셔서  순간부터는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복음서가 일치하고 있다. 그분은 여기에서 자신의 삶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들었 것이다. 그분의 삶의 목적은 화해를 위한 죽음이었다(요 19:30). 이제 세례와 함께  수난의 길은 시작한다. 

 

13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오신다 말씀으로 볼 때, 그분은 그때까지 나사렛에서 사셨던 것 같다. 마 4:13이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당시 30대 중반이셨다. 당시에는 12살이면 바 미즈바(Bar Mizwa; 율법의 아들)가 되므로, 즉 율법을 행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나이이므로, 예수님은 20년 이상을 회당의 평범한 신도로 사셨을 것이다. 두 가지가 우리의 눈에 띄는데, 첫째는 예수님께서 미혼이셨다. 결혼은 경건한 유대인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고, 남자의 혼인 적령기는 18-20세였으므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셨다. 결혼하지 않는 유대인은 나실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나실인으로 생각하셨는가? 마 19:12에 따르면 그런  같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가 예수님에게 자신의 탄생과 하나님의 예고에 대해 알려주었 것이다. 둘째는, 그분은 종교적 단체의 회원이 되시지 않으셨다.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도 아니셨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면서 동시에 그러한 단체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으로서는) 분명히 범상한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이미 범상한 임무를 위해 (혼자서)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단지 마태복음만 이 대화를 기록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대화 없이 일어날 수가 없다(참조: 6-7). 대화 내용이 무엇인가? 말리다라는 표현은 자주 법적인 용어로 사용되는데, 어떤 행동이 규정을 어길 때 그것을 하지 말라 경우에 사용된다. 즉, 세례자는 그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저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입니다. 동시에 그는 이 말로써 자기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더 가깝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세례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에 대해 두 가지의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먼저는 세례자가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을 통해 마리아의 임신과 약속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눅 1:36, 39 이하). 다른 한 편으로는. 그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선지자였다.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이제 허락하라  예수님의 대답은 근본적으로는 세례자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각이 잘못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 대답은 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 의미로 들린다. 그렇다면 그분은 유례없이 뻔뻔스러운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인간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메시아로 부르심 받은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을  셨을 것이다(참고: 요 8:46; 18:38; 고후 5:21; 벧전 1:19; 2:22; 히 4:15).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의 이유를 설명하신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합당하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 특별한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요단 강의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개로 이끄시려고 하실 때,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벌써 여기에서 자신이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가셔야 한다는 사 53장을 생각하셔서, 본인이 죄 없는 자로서 죄인인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셨을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미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라는 말은 의롭다 말과 관계가 없다. 의라는 말은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한다(참조 마 5:17). 그분의 구원의 뜻은 바로 사 53장이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 뜻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세례자의 말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부터, 그리고 겸손한 순종으로부터 멀리하려는 시험과 같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받은 시험이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묘사는 간결하며 극적이다. 세례자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다. 예수님은 세례 후 요단 강에서 나오셨다. 보아라!20) 하늘이 열렸다.  1:32에 따르면, 세례자도 이것을 보았다. 하늘이란 성경적 표현이다. 하늘이란 말은 우리의 오관으로는 볼 수 없는 여러 층으로 된 초월적인 세계이다(참고: 왕상 8:27; 고후 12:2,4).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동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시고 초월적인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은, 그것으로써 부르심이나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참고: 겔 1:1; 행 10:11).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하나님의 영과 능력과 지혜로 무장시키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메시아에게 항상 함께 하신다는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다(사 11:2; 42:1). 그런데 비둘기 같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먼저, 분명한 것은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단지 비교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어떤 복음서 기자도 비둘기가 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눅 3:32는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과 같은 형태를 취하셨다고 한다. 즉, 성령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예수님께 임하셨다. 비둘기는 마 10:16에 따르면 정결의 상징이고, 레 12:6 이하에 따르면 정결제사를 위한 제물로 적당하다. 그 외에도 아 2:12를 유대교에서는 메시아적으로 이해하는데  아가서 전체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과 같이  비둘기를 성령님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창 1:2에서 성령님께서   운행하신다 말을 비둘기와 비교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태가 이곳에서 성령님을 비둘기와 비교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아 사역을 위해 (성령님으로) 무장시키신 다음에 17절에서 명을 주신다. 하늘에서 난 소리 아버지의 음성이다(참조: 계 21:3 이하; 신 4:12; 마 17:5; 요 12:28).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이 말씀은 메시아적으로 해석되는 시편 2장에 근거한다. 그런데 시 2:7의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을 여기에 없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세례 후에서야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은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라는 말은 창 22:221)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제물(독자 이삭)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하 것을 마지막 순간에 막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희생하는 대신에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기 아들을 희생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라는 말에는 선택된 자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 42:1에서  마음에 기뻐하는 택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기억하 된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42:1 연결하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 42:1 이하22)  53에 나오는 분과 같은 하나님의 종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을 속죄물로 드릴 메시아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 세례 때의 하나님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요)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종( 기뻐하는 자)이시다. 그분은 말세의 심판관으로서 모든 백성을 심판하실 메시아적 왕(세례 요한의 설교)이시며, 죄 없는 어린 양처럼 고난 당하시고 속죄하는 피로써 믿는 자들을 구속하시는 겸손한 하나님의 종(이사야의 예언)이시다. 구원자와 심판자, 이 두 가지가 11, 12절의 세례자의 선포에 들어있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음성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시편 2장과 이사야 42-53장의 약속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어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자기가 주신 약속을 기억시키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으로서는 자신이 대속죽음을 당하셔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세례는 바로 대속죽음의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사명을 영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성경공부(3:13-17) 

 

1. 준비 

 

1) 준비를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 17절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는가?  

3) 다음과 같은 제목을 제안해본다: 구속자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신다. 

 

2. 실시 

 

1) 준비 

예수님은 20년간 평범한 신자로서 회당에 다니셨으며 수공업자셨다  결혼을 하지 않으셨다  종교적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떠한 직업을 가지거나 활동도 하지 않으셨다  겸손, 기다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시는 것. 

2)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순종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자신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구실삼아 불순종하지 않으셨다  세례자를 통해서도 유혹받지 않으셨다  벌써 이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 가운데 자신을 두셨다(낮추심). 

3) 아버지를 통한 부르심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겸손함을 보시고서 사역에 부르셨다  사명과 함께 성령님으로 무장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도 사명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희생을 당하는 아들로서의 부르심이다  예수님은 물론 영원 전부터 아들이셨다  그분의 부르심은 동시에 사 42-53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이다  여기에는 속죄 희생, 화목을 위한 죽음과 말세의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속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도록 모든 인간에게 내어 놓으셨다.  

 

 

 

8. 마귀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4:1-11) 

 

 마귀의 시험은 실제 일어난 일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시험하셨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하나님은 마귀가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히 5:8의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셨다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운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서론을 매우 짧게 기술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시험도 매우 짧게 기술했다. 이것은 마태가 마가복음서를 베껴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23). 그런데 누가는 마태복음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은 이 세 복음서를 보충하려고 했으므로, 그는 예수님의 시험을 보도하지 않았다. 

 

1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때에라는 말은 앞에서도 나왔는데, 이것은 시간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막연한 표현이다. 그러나 막 1:12를 보면 이것이 세례를 받자마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야로 올라갔다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요단 강 흐르는 골짜기로부터 산 위에 펼쳐지는 광야와 같은 곳으로 올라가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요단 강 서편인지 아니면 동편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예수님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셨는데, 이것은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예수님께 계속 머무시는 바로 그 성령님에 의해 인도를 받으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인도에는 매우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한 것이다. 즉, 예수님은 스스로 만용으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3).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험에 들 수 있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우리에게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동시에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고, 시험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 고통과 슬픔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우리가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그림처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단도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사단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은 욥과 같다(참조: 약 5:11; 겔 14:14,20).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분은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다(히 4:15). 

 

마귀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대로 인격체이다. 그는 타락한 천사 무리를 통솔하고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한다. 아마도 그는 타락한 우두머리 천사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거짓말장이요 살인하는 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하와를 속여서 죄를 짓게 하고, 그녀와 아담에게 그 벌로써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귀의 적대자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수준에 있는 분이 아니라, 그의 창조주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그의 주인이시다. 전에는 그가 하나님을 기꺼이 섬겼지만, 이제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여 섬기고 있다. 마귀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받지 않겠냐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하신 이후로 마귀는 하나님 주변에서 겨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 대단한 분노로 잠깐 세상에서 활동할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야 지상에서 권력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런데, 예수님께 속하는 자는 예수님의 보호를 받는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마귀의 존재를 부인한다. 다음의 구절을 참고하라: 창 3; 삼하 19:23; 대상 21:10; 욥 1:6 이하; 요 8:37 이하; 고전 11:10; 고후 11:3; 12:7; 계 12:3 이하; 13; 20:1 이하.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십 낮과 사십 밤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 가서 머문 모세를 생각나게 한다(출 24:18; 34:28). 그리고 엘리야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시내 산으로 갔다(왕상 19:8). 예수님은 그곳에서 두 번째 모세(참조: 신 18:15)로서 직무 수행을 준비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신 것이 아닐까? 그분은 모세와 엘리야 마찬가지로 금식하셨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한다. 혹시 물은 마시지 않으셨을까? 그런데 모세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신 9:9). 또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기간도 40일 이었으며(욘 3:4,5, 7-8),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지상에 머무신 날과도(행 1:3),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과도(출 16:35), 다윗과 솔모몬이 다스린 기간과도(삼하 5:4; 왕상 11:42), 노아 홍수에 관련해서도(창 7:4,17), 부활절 전의 교회의 금식기간과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40은 회개와 근신, 계시의 기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40은 단순한 상징의 숫자 아니라 실제로 40을 의미한다. 금식에 관해서는 마 6:16 이하의 설명을 참조하라. 금식은 집중적인 기도를 가능케 한다. 

 

 

예수님은 주리셨다. 예수님은 초인이 아니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신을 가지셨다(요 4:6-7). 그분은 일용할 양식이 왜 필요한지를 알고 계셨고(참조:  6:11의 주기도문), 인간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아셨다(참조: 롬 13:14). 성경은 이렇게 현실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생을 위한 음식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한다.  

 

시험하는 자 사탄이다(막 1:13).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한다. 시험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하나는 긍정적 의미인 검사하다이며, 다른 하나는 죄에 빠뜨리기 위한 유혹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이다. 이곳에서는 후자의 의미이다(참고: 살전 3:5). 그는 예수께 다가왔다. 사탄이 갑자기 등장했는데, 이것은 창세기 3 장과 같이 비밀스러운 일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이) 단순하게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그가 예수님께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인류의 첫 인간이 시험을 당한 것과 같이 지금 두 번째 인간인 예수님도 그렇다! 마태복음 4장에서 창세기 3장에 일어난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롬 5:12 이하; 고전 15:45 이하). 예수님이 이곳에서 시험받으신 체험이 주기도문에 반영되어 있다(마 6:1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마 8:29의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기정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므로, 묘한 시험으로 그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고, 첫 인류의 부부를 자율적이 되어 높아지도록 유혹한 것과 같이(창 3:5), 하나님의 아들도 자신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능력을 사용(남용)하라는 것이다. 마귀가 반항자인 것과 같이 아들도 아버지에게 반항하라는 것이다. 사단의 시험은 빵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해 빵을 만들라는 것이 그의 시험이었다. 누가 이것을 악하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여기에는 최종 결과물인 빵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빵이 나오게 되는 원천이 문제이다. 원천이 악하면 가장 훌륭한 결과물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명백하게도 예수님의 반대상인 적그리스도는 빵을 만들고 경제적 부흥을 일으켜서 세상을 물질주의의 풍요 속에서 취해 살도록 하려고 한다(참고: 계 13:15-17; 17-18).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붙드신 것은 기록되었으되이다. 성경에 쓰인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 저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성경에서는 진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신다! 말씀은 역동적이다(살아서 움직인다)! 말씀대로 사는 자는 죽지 않는다. 요 6:63 말씀을 기억하라: 살리는 것은 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이요 생명이라.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으로 빵의 유혹을 물리치셨다(참고: 요 4:34).  

 

예수님은 신 8:3을 인용하셨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 네게 먹이신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을 하나님의 도움을 겸손하게 기다리라는 표시로 이해하셨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돕는 것을 포기하셨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은 매우 큰 영적인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 지식과 삶을 얻으려고 애쓴다. 스스로 모든 것을 만들어낸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스는 타락한 인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만심(Stolz)을 극복하셨다. 루터는 자만심을 죄의 뿌리라고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첫 인간이 패배한 시험을 이기셨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어떻게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전으로 데려갔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서 일어나는 일의 과정 묘사에 있어서는 눈에 띌 정도로 침묵한다(겔 8:3; 행 8:39; 고후 12:2-5). 이것은 성경이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순종으로 이끌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다(사 48:2; 52:1; 마 27:53; 계 11:2). 루터 성경에 성전 꼭대기라고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성전 위의 돌출부라고 번역하자. 그리스 성경에는 작은 날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탑 혹은 난간 모양으로 된 성벽의 돌출부일 것이다. 이것은 기드론 계곡 40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는 남동쪽의 성벽으로 추정된다. 

 

마귀는 성전에도 거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골방에도 들어 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로 데려갈 수 있었던 것은, 욥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그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는 것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이 그곳에 없었더라면 뛰어내리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그곳까지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사탄에 의해 휴거되어 그곳에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항상 선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붙드시므로 이제 마귀는 말씀으로 시험한다. 기록하였으되라고 말한 것, 즉 하나님의 최고의 은사인 말씀이 마귀에 의해 남용된 것은 진짜로 사탄 적이다. 이것은 실제로 이단들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마귀가 성경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시편 91:11-12보다 더 적합한 말씀은 없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요구도 저의가 있는 애매한 사탄적인 말이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분은 떨어져 죽을 것이고, 그러면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는 그의 사역을 완수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여 멸망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의 대적자인 토마스 뮌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실 경우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빵의 유혹은 자신을 돕는 기적이라면, 여기에서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성전 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자요, 메시아로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눈을 확신시키는 것이지 마음을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확신이 아니다. 시각의 확신인 것이다. 이것은 권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창 3장의 첫 사람과 같이 유혹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의 관계는 깨어진다. 그런데 시편 91:11-12 다음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14절). 열광주의자 니클라우스 쉬토르히(Niklaus Storch) 하나님께 억지를 쓰라고 했는데, 이것은 될 일이 아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러나 (...라는 말씀)도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문맥에서 벗어난, 독립적으로 해석한 성경 말씀에 대항하여 문맥을 올바로 연결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교회와 이단의 차이를 보여주는 본질적인 특징이다: 교회는 성경 전체를 (통일성있게)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지만, 이단은 말씀을 여기저기에서 추려내어서 모든 것을 상호연관성이 없는 독립된 말씀을 억지로 연결하여 그 토대 위에 이론은 세운다24).  

 

예수님께서 성경에 머무시고, 예를 들어 경험이나 인간의 논리로 근거대기를 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가 시험을 단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능력으로 이길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신 6:16을 인용하셨는데, 6장은 4-5절에 이스라엘의 (유명한) 신앙고백(쉐마)이 있는 곳이다: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기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분부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시 91:11-12 말씀을 성취시키라고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각하 위해 자기 소원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을 거부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험도 예수님의 순종과 겸손으로 말미암아 좌절하였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예수님을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감으로써, 그는 모세, 에스겔 요한을 매우 높은 산으로부터 굽어 보게 하셨던 하나님을 흉내냈25)(신 3:27; 34:1; 겔 40:2; 계 21:10). 아마도 이 일은 영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산인지는 모른다. 천하 만국  영광 소유하고 있다.  영광이란 그의 문화, 사람들,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업적, 그의 권능과 부유함 등이다. 이것을 소유하는 것은 욕망이 많은 사람의 최대의 꿈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하 만국,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고 반항하는 세상이다. 이곳에서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항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천하 만국이라는 개념에는 초월적인 세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참조: 엡 6:12; 골 1:13,16).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먼저, 이것은 사단이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임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신 것과, 그분이 순종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능 받으실 것과 같이(마 28:18; 빌 2:6-7; 히 1:2-4), 마귀는 이분께 지금  모든 것을 주겠다 한다. 둘째로는, 마귀가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그가 세상의 주관자이며, 인간의 타락을 통해 천하 만국 경영하고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 12:12에 따르면, 이 권한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한정되어 있다. 

 

마귀가 예수님께 세운 조건은 간단하지만 매우 명백했다: 만일 당신이 완전히 엎드리고 나를 경배하면. 하나님처럼 되고자(창 3:5) 하는 그의 권력 도취는 드디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의 피조물인 적그리스도도 역시 살후 2:4에 따르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사탄적인 자기 신격화일 뿐이며, 기껏해야 사탄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권능으로 사탄에게 명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왜냐하면 그분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 명령이 준엄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 마지막 유혹이 가장 어려운 유혹이었기 때문일까?  

 

 

예수님은 세 번 성경의 도움을 입어서 싸우셨다. 사탄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보이는 성구를 한 번 인용했다.   유혹에서는 예수님께서 신 6:13(참조: 신 5:9)를 인용하셨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구는 서로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이것은 모두 신명기에 있는데, 이것은 신명기가 예수님을   모세로 선포하기 때문에(신 18:15), 예수님은 신명기를 특별히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완성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 신실한 것이다. 동시에 생명력 있는 성경지식을 승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나중에 약 4:726) 가르칠 것이 예수님에게서 모범적으로 잘 드러났다. 

 

예수님은 사탄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사용하신다. 사탄은 고소자라는 의미이다. 그 고소자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인간도 미워한다. 예수님께 속하는 자는 더이상 고소자로부터 저주당하지 않는다(롬 8:33-34). 만약 예수님이 사탄에게 패배하셨더라면, 사탄은 예수님과 우리 모두의 고소자가 되었을 것이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패배자가 되어 물러난다. 사탄은 하나님이 경배되는 곳에서는 승리하지 못한다. 첫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천사가 와서 낙원을 폐쇄했다(창 3:24). 둘째 아담인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후에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셨다. 섬겼다는 말은, 왕상 19:5 이하의 엘리야 경우와 같이 음식과 음료를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참고: 8:2-3; 시 78:25; 눅 22:43). 

 

예수님은 이제 첫 전투를 치르셨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계속되는 믿음의 싸움으로 들어가셨다. 

 

 

성경공부(4:1-11) 

 

1. 준비 

 

1)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보자. 

2) 더 깊이 생각하기: 때에 따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까지도 유혹할 수 있는 악마의 시험 방법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3) 마 4:1-11과 창 3장의 악마의 유혹에 대해 생각해보라. 

4) 제목을 제안하면: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시다. 

 

2. 실시 

 

1) 시험의 중차대한 의미. 

 3장은 우리에게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둘째 아담으로서 구속자가 되어야 한다. 구속이 성취되었다는 말은 동시에 악마가 패배해서 세상의 마지막에는 그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시험에 대한 투쟁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결과는 결국 우리 개인 삶의 가능성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2) 여기에서 악마적인 시험의 본질에 대해 드러나는 것은: 

악마는 하나의 현실이다  악마는 우리가 언제 약하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  악마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도록 시험한다  그가 현혹하는 방법은 이미 옛날에 써먹은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위대하게 되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곤궁에 처했을 때에 스스로 도와야 하고, 명예도 구하여 권력욕을 채워야 한다  악마는 성경 말씀도 알아서 그것을 연관성에서 찢어내어 사용한다  결국 그가 쓴 마스크는 벗겨진다: 하나님을 흉내 내는 악마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며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고 한다. 

3) 예수님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이기게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도록 맡겼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붙들었고, 말씀은 그분을 붙잡았다  그분은 악마와 달리 늘 성경 말씀을 사용하셨고, 문맥에 맞는 연관성 속에서 사용하였다  그분은 자신을 찾지 않고 아버지를 찾았다  악마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우리도 이러한 보호 속에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순종심이 시험을 거쳐서 증명되자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승리를 위한 전권을 주셨다   승리는 둘째 아담(예수님)  아담이 망친 것을 정상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으로써 구속의 길은 열리고 우리도 악마를 이기는 길이 열린다: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사건이다! 

 

 

1)

 역자의 말 주석서를 일단 간단히 소개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쓴 것이다. 주석서가 책으로 발간될 때에 다시 쓰게 된다.

2)

 루터 번역에는 역사 책으로 번역되어 있고, 한글개역개정, 영어의 NIV, KJV에는 계보, 혹은 족보로 번역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개역개정).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NIV).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KJV). 마이어 박사도 역사책으로 번역한 것에 주의하라.

3)

 구약 학자 Zahn이 먼저 이 말을 창 5:1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책으로 번역했다. 

4)

 기원전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이 많았으므로, 70인역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구약을 인용할 때에 대부분 70인역에서 인용했다. 

5)

 „이것은 아담 계보(게네시스)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모양대로 지으시되

6)

 개역개정에는 계보 번역되어 있다. 

7)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1절과 연결시키므로,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족보) 해석하고 2-17을 족보의 내용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는 1절을 마태복음 전체 제목으로 보았으므로, 1절과 2-17을 분리하여 이 본문을 계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유례로 본다.

8)

 가장 좋은 사본에 속하는 P1, 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는 아사 대신 아삽으로 되어 있다. 네슬-알란트(NA28) 그리스어 성경에도 아삽으로 되어 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 아들 내 종 스룹바벨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곳에서 인장이라는 표현을 두고 주석가 사이에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유다에는 말기에 악한 왕들이 지배했으며, 유다는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했다. 그럼에도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은 취소되지 않고 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확약되었다. 이는 요야긴 왕의 손자였다. 하나님께서 다윗 자손(유다 왕들)의 악행을 심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금 메시아 약속을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소망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10)

 이곳에서 이미 1844년에 티쉔도르프가 귀중한 4세기 중엽의 시나이 코덱스(신약 전체) 발견했다. 

11)

 왜냐하면 이사야 시절에 이미 임마누엘이라는 아이들이 탄생했으므로,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언은 그것으로 마감되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  깊은 본래의 의미로 성취된 것이다. 예언은 2중으로, 3중으로 성취된다.

12)

 역자 : 미가서에는 결코라는 말이 없으나, 서기관들이 의미적으로 이해해서 이곳에 결코(우다모-)라는 표현을 삽입했다. 그리고 미가서의 작다라는 말을 지극히 작다(엘라히스테-) 말로 바꾸었다.  

13)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4)

 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5)

 헤롯은 별이 나타났을 당시, 즉 일년 전에 예수님이 태어났을 가능성도 고려에 넣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16)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쓰였으므로, 원래 마태복음에서 나사렛인이라는 히브리어는  11:1 nzr 같은 nzr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오셔서 나사렛인이 되신 것이  11:1 말씀이 성취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가 nzr이라는 예언은 이곳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있다.

17)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 일으킬 것이라“. 여기에서 가지를 나사렛인을 대입하면, 하나님께서 하한 의로운 나사렛인을 일으키신다는 의미이다.

18)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라고 하셨다: 엘리야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마 17:12)

19)

 선지자가 하는 일은 교회에 오랫동안 깃들어 있던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고 교회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20)

 그리스어 원문에는 idou(보아라!)라는 극적인 표현이 나타나 있다.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

  42: 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23)

 만약 마태가 마가를 베꼈다면, 마태가 날조하지 않은 한 내용을 줄일 수는 있어도 늘일 수는 없다. 마태의 내용이 마가의 내용보다 훨씬 길므로 마가복음서를 베낀 것이 아니다.

24)

 본문: Die Sekte löst einzelne Stellen heraus und baut alles auf diesen isolierten Stellen auf. 필자가 의역하면서 설명을 첨가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단적인 생각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명심하라. 정확한 본문 해석을 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빠져서 복음을 오해하기 쉽다.  

25)

 앞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휴거시켜서 성전을 데리고 갔듯이 이곳에서도 예수님을 영적으로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가능하다. 마귀가 이러한 권능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적(병 고침, 예언)을 매우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병을 고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 

26)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