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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by Ddak daddy 2016. 2. 6.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이진호



필립 얀시 지음
요단

 

 

 



구약성경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 어떤 가감이나 꾸밈도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열정적인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 등골이 오싹한 강간과 사지를 절단하는 끔직한 이야기, 노예(종)들을 사고 파는 사실적인 묘사, 명예롭고도 솔직한 이야기와 잔인한 모반의 전쟁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어느 것도 산뜻하거나 질서 정연하지 못하다. 솔로몬과 삼손 같은 실패자들이 초자연적인 선물(은사)을 받는가 하면, 욥처럼 정말 선한 사람이 재난을 당하기도 한다. 당신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장면을 접할 때마다 움찔하거나 어쨌든 그 장면의 일부분이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릴지 모른다. 놀랍게도 구약성경은 이러한 반응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대를 예상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책에 이것들을 포함시키신다.
캐슬린 노리스는 그녀의 책 「놀라운 은혜」에서 이 문제에 대한 건전한 시각을 제시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결핍감을 느끼고 “더 이상의 것”, 영적인 집, 곧 믿음의 공동체를 강하게 소망한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읽다 말고 집어 던져 버린다. 나에게 있어, 이런 장면은 고무적이며, 훌륭한 출발점이자, 성경에 계시되신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언약의 표징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부정적이고 복수와 폭력으로 가득한 것이라며 쉽게 던져 버린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오락으로서의 폭력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같은 기준에서 거부하며 일간신문을 펼치거나 뉴스를 볼 때마다 기도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실제 생활에서, 성경은 신성한 것과 속된 것과 관련하여 인간을 신선하고 온전하며 정직하게 투영하는 것 같다. 성경은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그것을 믿고, 성경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토마스 머튼이 성경 일반에 대해 한 말은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에 적용된다.

한 마디로, 성경이 우리에게 편안할 정도로 친숙해지기 전에는 성경에는 친숙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성경에 질문을 던지길 그만두고 성경으로부터 질문을 받는가? 이제 성경과 더 이상 싸우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성경을 이해하는 일은 싸움이며, 싸움이어야 한다. 성경 이해는 단순히 참고서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적나라한 추문과 모순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단지 성경에 놀라지 않는 법을 배웠다는 이유로, 성경을 대할 때 어려움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너무 쉽게 확신치 않도록 하자.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은 빠르게 감퇴하고 있으며 대중 문화에서는 사실상 고사되어 버렸다. 통속적인 코미디에서 제이 르노는 십계명 중 하나를 대보라면서 방청객의 성경 지식을 테스트했다.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더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다. 모두들 웃었지만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의 80퍼센트가 십계명을 믿는다고 대답했지만, 네 계명 이상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국 성인의 50퍼센트가 성경의 첫 권이 창세기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14퍼센트는 잔다르크가 노아의 아내라고 대답했다(Joan of Arc,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성녀 잔다르크를 말한다. 이름 중 ‘Arc’는 방주란 뜻의 A자와 발음이 같아서 사람들이 이를 ‘방주의 조앤’으로 간주하고 노아의 아내로 착각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편집자주).

  언젠가 어떤 정부가 구약을 성경에서 빼버리려 했다. 독일의 나치는 이 “유대인의 책”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으면, 그 결과 구약성경에 대한 연구는 독일 신학교와 저널에서 사라져 버렸다. 1940년 나치의 권력이 절정에 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는 과감하게 시편에 관한 책을 출판했으며, 그로 인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문에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기도서를 주석하고 있다고 확신에 찬 논증을 했다. 본회퍼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셨으며, 비록 히브리 정경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책은 전혀 인용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게다가, 구약성경의 상당 부분이 분명하게 또는 암시적으로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께서 읽으셨고 사용하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요, 그분이 암송하신 시편이며, 그분이 부르셨던 노래요, 그분이 어린 시절 잠자리에 들면서 들었던 이야기요, 그분이 상고하셨던 예언들이다. 예수께서는 히브리 성경의 “일점 일획”을 존중하셨다. 구약성경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예수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마틴 루터는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약속 편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은 후에 이 편지가 개봉되게 하셨고, 직접 이 편지를 읽으셨으며, 복음서 전반에 걸쳐 이 편지를 선포하셨다”고 했다.

엘레인 스토키에 따르면, “어서 말해 봐.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라는 질문은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가 병원에서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 달려가서 물은 것이다. 영리하게도 여자아이는 동생이 방금 천국에서 왔으니까 분명히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런데 아기는 꼴꼴 소리만 내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게 아닌가!
구약성경은 어린 소녀의 질문에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신약성경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대답이다.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지만 인간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많은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셨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길키 교수는 복음주의 기독교에 이단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 예수를 선호하여 아버지 하나님, 창조자, 곧 모든 인간 역사와 인간 공동체의 보존자이시자 통치자요, 개개인의 영혼과 그들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등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1970년대 신은 죽었다는 조류가 극에 달했을 때 휘튼 칼리지의 채플 시간에 들은 메시지가 생각난다. 로버트 웨버 교수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 3계명에 대해 설교했다. 웨버 교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계명을 ‘맹세의 금지’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 의리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것으로 확대했다. 긍정문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살아라”는 것이었다. 이 계명을 구약적 환경에서 더 깊이 연구할수록 웨버 교수의 말에 더 깊이 동의하게 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사는 방법은 유대인들의 위대한 유산인 구약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청교도 학자 페리 밀러가 말했듯이, 당신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면 당신에게 있어 그분은 더 이상 말해서 안 될 만큼 신성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히브리인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 가며 그들의 삶의 모든 부분은 이 이야기의 메아리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사랑의 이야기였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크거나 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덴마크 기독교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의 어려운 부분들과 씨름하는 독자에게 두 자기 제안을 한다. 첫째, 그는 성경을 연애편지처럼 읽으라고 말한다. 성경의 언어와 문화와 그 밖의 장벽들과 씨름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중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라.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에는 모호한 구절들이 너무나 많아서 전체가 거의 수수께끼 같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해하기 쉬운 모든 구절들을 완전히 따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장애물을 볼뿐이라고 대답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쓰고 계시는 역사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생명을 건진 두 히브리 산파의 이름을 적고 있지만 애굽을 통치했던 바로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는다(이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규명하려고 애를 쓴다). 세상의 역사가들은 오므리왕이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작 열왕기상은 그에 대해 단 여덟절만 할애한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크기나 힘이나 부에 감명을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이며, 그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영웅들은 힘이나 부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영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유대인들을 박해한 많은 폭군들 가운데 하나님 느부갓네살이 불로 세 젊은이를 위협하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은 아옵소서(단 3:17-18)

위대한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예언자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추상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계시하신다. 그분은 단순히 명령하고 복종을 기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해 움직이고 영향을 받으시며 그에 따라 반응하기도 하신다. 사건들과 인간의 행동은 그분에게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진노를 일으킨다. 인간의 행동은 그분을 움직이거나 그분께 영향을 미치거나 그분을 슬프게 하거나 그 반대로 그분을 즐겁고 기쁘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능력과 지혜의 존엄으로 세상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건들에 친밀하게 반응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친밀하고 인격적으로 표현하시기 위해 다른 어떤 그림 언어보다 “자녀”와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선택하신다. 구약성경은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로 넘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구애하시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홀딱 빠진 연인처럼, 당신의 백성에게 홀딱 빠지신다. 그들이 그분을 무시할 때, 그분은 연인에게 차인 사람처럼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다. 세대를 이어온 은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 곧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연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홀딱 빠진 부모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혼자서 걸음마를 하라며 이제 막 돌이 지난 딸을 으른다. “아가야, 이리 온! 그래 넌 할 수 있어! 자 옳지! 아빠 여기 있다. 이리 온!” 남자 친구에 얼이 빠져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사는 십대 소녀를 생각해 보라. 이상의 두 장면을 생각해 보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쪽에는 당신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것이 구약성경의 메시지이다.

현대 과학자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까지도 “인간 중심 원리”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보일 만큼 너무나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인간 중심 원리’보다 훨씬 더 큰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신들을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하고 그들의 행동이 땅위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모든 종교의 흐름을 뒤집어 버리신다. 신이 울면 땅에 비가 내린다. 신이 노하면 번개가 친다. 구약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하며, 욥기가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절망에 빠진 여인이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다. 낙심한 노인이 하나님을 저주하길 거부하자 그 영향이 전 우주에 미친다.

캐슬린 노리스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곳에서 수도사들은 매일 시편을 노래하여 한 달에 150편의 시편 전체를 한 번씩 노래한다. 처음에 노리스는 시편들 사이의 불협화음이 혼란스럽고 귀에 거슬렸다. 어떤 시편들은 경건한 위로를 표현하는가 하면 어떤 시편들은 하나님의 부재와 불공정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편들을 노래하는 수도사들과 다른 방문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각각의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시편의 말씀에 그들 각자가 공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각의 시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한 면을 반영했으며,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사람들은 필요한 메시지를 감지한다.
내가 보기에, 이 시대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서신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진리를 등한시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라난 내가 그린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전적으로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바울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보기 힘들다. 바울은 기적적인 회심과 수많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개입을 경험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을 제외하고, 분명히 그는 고상하고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쉬운 시대에, 적어도 나보다는 쉬운 시대에 살았다. 일단 바울이 무엇인가를 지적으로 이해하면, 그의 감정들이 그의 이해를 잘 뒷받침해 주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바울을 닮는 것이(그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독려했다) 예수를 닮는 것보다 결코 단순하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바울의 본보기에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면들을 많이 찾아냈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는 우리 교회 강단에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방향 감각의 상실, 혼란, 분노, 절망, 고통을 발견했다. 우리는 너무나 빨리 영적 승리라는 “더 고상한” 경험으로 옮겨갔다. 놀랍게도, 이러한 “문제 투성이의” 시편들은 신약성경이-특히 예수께서-가장 자주 인용하는 시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상설교의 불가능한 이상들과 서신서의 자증적(自證的)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하라”는 식의 어조와 오랫동안 씨름했다. 잠언과 전도서 같은 책에서는 확연히 다른 접근을 발견했다. 이런 책들은 온건한 “중용”의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돈을 벌되 너무 많이 벌지 말고, 즐기되 쾌락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실 이런 것들이 부모가 자녀를 훈련시키면서 항상 사용하는 원칙들이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세 살 짜리 아이를 산상설교의 원칙에 맞춰 기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장인은 암과 신경퇴화로 인해 더 이상 성경을 가르칠 수 없게 되셨다. 그런데도 매일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셨으며 자신이 수년간 사역했던 모든 사람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기도하셨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전심으로 믿으셨으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안내서인 로마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면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몇몇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셨다. 그분의 상황에서 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분은 도뇨관을 통해 소변을 보셨다.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셨다. 잇몸이 오그라들어 틀니도 거의 착용할 수 없었고, 찾아온 사람들은 그분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항상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해야 했다. 손을 떠셨고 물건도 자주 놓치셨다. 당신의 몸이 당신을 배반하기 때문에 물 한 잔을 마시거나 코를 풀기 위해서도 도움을 구해야 한다면, 기쁨과 승리의 마음을 계속 간직하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 2년 동안, 장인의 세계는 싱글 침대가 놓인 방으로, 다시 병원 침대로 좁혀졌지만 그분은 그곳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셨다. 거기서 더 이상 펜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자신과 하나님과의 씨름을 일기로 기록하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그 노트는 내 무릎 위에 있다. 뒤쪽을 들춰보니 그분이 열심히 기도해주셨던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명단만도 무려 열일곱 페이지나 된다. 그분의 가족들(여기에는 아내의 이름 외에 내 이름도 있다), 남미의 인디언들, 그분이 많은 성경공부반에서 가르쳤던 학생들, 그분이 가르친 선교사들, 그분이 사역한 교회의 교인들, 과부들, 이웃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다. 여기 저기에 커피며 음식이며 눈물 자국들이 선명하다.
이번에는 앞쪽을 들춰보니 그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일기가 나타난다. 그 일기는 모두 열아홉 페이지인데, 뒤로 갈수록 글씨체가 나빠지는 것에서 그분의 병세가 악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분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거기에 간단한 주석을 달았다. 몇몇 경우에서는 자신의 몸상태를 기록해 놓으셨다. 등이 쑤시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기력은 쇠해가고, 탈수 증세가 심해진다. 마지막 장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8월 7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이었다. 그 마지막 한 해 동안 그분은 글씨조차 쓸 수 없으셨던 것이다.

장인은 이 마지막 몇 년 동안 믿음의 위기를 겪으셨으며,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셨다. 과거에는 그분을 만족시켰던 대답들이 더 이상 그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영적 신념을 잃었다. 점점 불안해지며, 초조해지고, 두려워지면서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고통스런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에 직면해서는 “잘 끝내길” 바라셨으며 계속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거듭거듭 자신을 실망시키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우셨다.
그 무엇도 장인을 지탱시켜 줄 수 없을 때, 그분이 구약성경에서 발견한, 흔들리지만 바위처럼 굳건한 믿음이 그를 지탱시켜 주었다. 의심이 가장 극심했던 순간조차도, 그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들도 똑같은 마귀와 싸웠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으셨다. 그는 여호와의 팔이 길어서 모든 것이 잘 되고 행복할 때뿐 아니라 특히 고통의 순간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감싸주신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 어두운 날들 동안, 헌터 노우드 그분이 의지할 구약성경이 있었던 것이 기쁘기만 하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나는 일찍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잡지의 저널리스트로 일을 시작했다. 그 때문에 20대 초반에는 고통의 문제에 끌리게 되었다. 다양한 시사거리들을 찾아 다리품을 팔고 다니는 동안 어느새 인생이 비극적으로 망가져버린 많은 사람들의 침상 곁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여자 친구를 구하려다 회색곰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한 10대 소년, 마운트 레이니어(워싱턴주 캐스케이드 산맥의 최고봉, 4392미터-역자 주)의 눈보라 속에서 아이들을 온몸으로 감싼 채 얼어죽은 아버지, 어린 시절의 학대에 대한 보복으로 범죄자의 인생을 산 사람. 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드라마같은 실화” 시리즈에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기고했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자신들이 겪은 비극으로 인해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모두들 교회에 대해서도 아주 좋지 않게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문안을 와서는 저마다의 이론을 늘어놓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벌하고 계십니다.”, “아니에요, 당신을 괴롭히는 건 사단이에요!”, “아니에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당신을 직접 선택하신 겁니다.”, “하나님 때문도 사단 때문도 아니에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연일 뿐이에요.”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다. “고통에 관한 이론들이라는 게 나를 혼란스럽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제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원했던 것은 확신과 위로였어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더해 주었답니다.”

구약성경에서, 욥과 그 친구들 같은 신실한 신자들은 고난이 닥칠 때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당연히 번영과 건강으로 상주시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 믿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임한 일련의 재난들을 감수하게 된 데는 욥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난을 당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던진 질문이었으며, 한 사람의 고전적인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욥기는 사실 고난의 문제에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초점을 맞춘다. 욥기는 우리가 해답을 가장 애타게 원하는 질문들을 훌륭하게 던지며, 그런 다음 고난의 문제 전체를 보는 색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대부분의 구약성경처럼, 욥기도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해답을 거부함으로써 처음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과 언뜻언뜻 보이는 소망으로 특징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만족시킨다.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

존 칼빈의 설교 700개 중 159개는 욥기에 대한 것이다. 그 정도로 칼빈은 욥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칼빈 이후의 역사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점점 더 긴박한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시켰을 뿐 아니라 근세 사람들의 경우는 욥기가 무색할 정도다. 부당한 고난의 모티프는 고난에 찌든 20세기 사람들에게 특히 적절해 보인다. 알다시피,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여러 차례의 대량학살을 경험했다. 그 결과 인생의 완전히 파탄난 가운데 슬픔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온화한 욥의 모습은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이다.

자신을 아는 욥이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갑작스런 재난을 당할 만한 짓을 결코 한 적이 없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어디서나 뜻하지 않은 고난의 현장을 목격한다.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 아프리카의 기아, 모슬렘 국가에 투옥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 아직도 욥의 친구들이 제시한 깔끔한 공식을 지지하는 사람들도-기독교 방송들이 암시하듯이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많다-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연히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 대륙인 아프리카가 가장 굶주린 반면에, 가장 적극적인 비기독교 지역인 아라비아해 근처는 가장 부유한 지역이라는 사실이다.(로버트 슐러는 「적극적 사고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성경」을 편집하면서 욥기에서는 조명할 구절을 열네 개밖에 찾지 못했다.)

케이크는 달걀, 밀가루, 우유, 쇼트닝 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는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저 이러한 재료들을 사용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욥기는 다양한 고난에 “관한” 것이 아니며 단지 저자가 전체적인 구성에서 그러한 재료들을 사용할 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욥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며, 시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도록 선택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반응은 고난받는 사람뿐 아니라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욥기의 저자는 타고난 극작가이다. 두 장에 걸쳐 배우의 연기(움직임)를 배분한 후에, 재빨리 보다 자연스런 대화 형태로 옮겨간다. 막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 다음,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은 연극 안에 갇혀서 관객인 우리가 즐기고 있는 전지적 관점을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추리극”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의 해답을 알고 있지만 무대 위의 탐정은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천상에서 진행된 시나리오를 알지 못하는 욥이 드라마의 요소에 걸려든다. 그는 고난에 사로잡힌 채 무대 위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는 기왓장으로 상처를 긁으며, 통렬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질문들은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던지는 질문이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은 내게 뭘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어떤 주석가들은 욥기가 3장에서 시작되길 더 바란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면서 1-2장을 다소 의외인 것으로 취급한다. 소설가 버지니아울프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어젯밤에 욥기를 읽었는데, 하나님께서 잘 하신 거 같지가 않아”라고 했다. 욥기의 프롤로그는 하나님이 사단과 내기 비슷한 것을 하셨음을 보여준다. 양쪽에는 베팅할 것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룰을 정하신다. 불쌍한 욥은 두 헤비급 선수 사이의 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끔찍한 시련을 겪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욥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최초의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이번에는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 살면서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의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복을 부어주셨다. 욥은 말 그대로 생지옥에 살면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에게는 저주가 쏟아지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사단과 하나님 사이의 내기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 때문이라며 하나님의 성품에 공격을 가한다. 사단의 말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하시기 때문이 아니며,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거기에 대한 대가가 있거나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매수당했기 때문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사단이 보기에, 하나님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면 선거에 이길 수 없는 정치인이나 “들러붙는 여자”는 있으나 헌신적인 아내는 없는 마피아와 비슷하다. 어떤 성직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농부가 버터와 치즈 때문에 자기 소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욥이 믿음의 버팀목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보일 반응에 따라 사단의 주장의 진위가 판가름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복 주시지 않으면, 부자인 욥은 잃을 것이 많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뢰할 것인가?
욥기는 순전함이라는 문제를 축으로 돌아간다. 욥은 하나님의 순전함이 시험당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부당하게 다루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욥의 모든 법적인 소송(항변)은 1-2장에서 제시된 보다 큰 재판의 상황, 즉 욥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라는 상황 속에서 제기된다. 하나님께서는. 헨델의 가사 한 줄이 말하듯이, “돈이나 협박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을 찾으신다. 우리는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욥이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씩 잃을 때 그의 순전함에 금이 가지 않는지 지켜본다.

인간은 참으로 자유한가? 사단은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우리는 내려갈(타락할) 자유가 있다. 사단 자신, 아담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이.... 그러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올라갈, 하나님을 믿을 자유와 능력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처럼 믿음도 환경과 처지의 산물인가?
현대 행동주의자(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이나 동물의 행동만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 역자주) 에드워드 윌슨은 테레사 수녀의 선행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섬김과 불멸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서 안전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상급을 받으리라고 믿으면서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윌슨과 기타 진화론적 심리학자들은 순수한 이타주의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욥기의 통찰과 시대 초월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빌닷과 엘리바스와 소발의 논증을 현대적인 사고에 비추어 조명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 고난을 주시는가? 병상에 누워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라. 욥의 친구들이 가장 강하게 단언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들이 번성케 하시며 악한 사람들이 넘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기독교 방송을 볼 때마다 듣는다.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들은 욥이 그 무엇도 순리대로 되지 않을 때조차 잃지 않았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엘리바스가 했던 것처럼 세 친구들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식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증을 거듭 말하는 어떤 “영”의 은밀한 환상에 호소하며 심지어 욥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이적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내비친다(욥 4:12-17; 5:8-10).

욥의 말에는 고통과 절망과 분노에 대한 심오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비웃음을 거의 참을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께 강하게 항의하면서 거의 신성모독에까지 이른다. 그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인내심 많은 ” 이 성자의 몇몇 인용문에 귀기울여 보자.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적이 평안하게 하옵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욥 10:18-19)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욥 14:18-1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욥 16:9)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욥 19:7)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욥 26-27)

첫째,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는 아내의 충고를 결코 따르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공정함과 선하심과 사랑과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하나님께 등을 돌리길 거부한다. 그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로다”(한글 개역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단호하게 말한다(욥 13:15). 욥이 하나님의 공의를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은 끈질기게 거부한다. 욥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눈부신 소망과 믿음의 빛이 그를 비춘다.
욥은 모든 증거가 그 반대라고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고뇌에 찬 역설을 안고 사는 쪽을 택한다.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논리는 이렇다.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러므로 너 욥은 유죄이다. 욥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불의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말이 안 되는 다른 공식에 이른다.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나는 무죄이다(순전하다). 최고의 히브리 전통 속에서, 욥은 이 세 가지 진리가 아무리 서로 모순되어 보이더라도 세 진리 모두를 강하게 붙잡는다.
욥은 지금 하나님이 아무리 멀리 있거나 심지어 사디스트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희망을 포기하느니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본능적으로 믿는다. 그는 인격적인 우주에 대한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비인격적인 우주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고통이 쾌락보다 못하다거나 욥의 행복한 삶이 그의 비극적인 삶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욥은 수많은 것이 자신의 신념을 반증함에도 불구하고 공의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굳게 붙잡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다른 대안들은 더 나빠 보이기 때문이다.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최악의 절망은 의미 없이 고난당하는 것이며, 욥의 경험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고 결론 내렸다. 욥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설명,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의미를 요구했으며,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주실 수 있다.
욥은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전혀 없고 오히려 반대 증거가 많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킴으로써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주장한다. 그 존엄이 모든 면에서 공격당하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프로테스탄트라는 단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욥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경건한 교리에 굴복하는 대신 개인적인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다른 사람들이 따를 길을 닦는다.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 섰고, 마틴 루터는 교회의 권위에 맞섰다. 욥은 교리가 자신의 개인적인 권리를 억압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욥기가 스스로 평범하고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2500년간 무엇인가를 가르쳐 왔다면, 그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무지 속에서 방황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받아들이기보다는 의   문을 제기하는 반응이 그들이게 더 낫다-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의롭다. 설명할 수 없는 불의에 직면했을 때, 단념하는 것보다 분개하는 것이 더 낫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화번호부 한 쪽을 읽었더라도 욥이 순순히 동의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욥의 의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계시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린다. 욥은 말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이 회개와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와 더불어, 1장부터 계속되어 온 긴장이 마침내 해소된다.
욥기의 내기는 욥의 믿음을 다루었다. 믿음을 지켜야 할 모든 이기적인 이유가 사라졌을 때에도, 인간은 믿음을 놓지 않을 것인가? 사단은 그가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여기에 내기를 건다(욥 1:11). 그런데 그가 내기에 진다. 욥의 인격을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훈계를 마치신 후에 욥에게 후한 상을 주시고 그를 이전보다 두 배나 번성케 하신다. 욥의 친구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결함 있는 개념에도 맞는 판결이다. 고통은? 하나님께서는 고통도 쉽게 고치실 수 있다. 더 많은 약대와 소는? 문제없다. 어떤 사람들은 욥이 그저 잠시 시련을 겪은 후에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욥의 회복된 재산에 대한 좋은 소식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욥기의 전체적인 요점은 상급이 아니라 믿음이 욥기의 주요 강조점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욥의 물질적 번영과 심지어 그의 건강까지도 욥기에 담겨있는 우주적 문제들에 비하면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욥은 고난의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위기를 맞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욥에게 일어났던 그런 극한적인 재난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적인 사고, 말기의 질병, 또는 실직 등에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나님 저한테 무슨 감정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나요?”
이런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질병, 우리의 외모, 가난, 불운-을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러한 환경을 바꿔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아름답거나 잘 생겼다면 모든 일이 잘 될 텐데. 내게 돈이 조금만 더 있거나 적어도 좋은 직장이 있다면, 나의 성적 요구가 다소간 바뀌거나 적어도 감소한다면, 하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욥은 우리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바로 믿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라고 가르쳐 준다.
비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제한된 시각에 갇히고 말 것이다. 욥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그분을 적으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 대담하게 물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 10:3). 1-2장에서 막 뒤의 시각을 욥이 쫓겨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높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의 반응에 자신의 평판이 좌우되도록 허락하셨다. 욥이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거의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그를 보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대보다 더 가까이 계셨던 적은 없었다.

욥에게 있어 믿음의 싸움터는 소유와 가족과 건강의 상실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이와는 다른 싸움에 직면할 수 있다. 사업이 실패, 삐걱거리는 결혼 생활, 성적인 경향, 사람들을 쫓아버리는 얼굴이나 외모 등. 우리 자신의 시련은 천상에서 벌어지는 우주적 내기(싸움)의 부산물이 아닐 것이다. 여하튼, 욥기의 메시지는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반응이 실제로 차이를 낳는다고 믿는 강인하고 뚜렷한 믿음을 요구한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며 욥을 조롱했다(욥 22:1-3). 마지막에, 엘리바스는 욥을 통하여 제물은 드리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고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욥의 믿음은 하나님께 사단에 대한 큰 승리를 안겨다 주었는데, 사단은 모든 인간의 경험에 의문을 제기했었다.

이처럼 베일에 감춰진 힌트들은 욥기의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욥은 믿음이라는 가장 가는 줄에 매달림으로써 이 땅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남 선녀들에게 우주의 구속에 참여하는 영예를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욥이 그렇게도 자세히 묘사한 이 세상의 고통과 불공평을 뒤바꾸는 일을 돕도록 허락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 대한 욥의 불평에 동의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락을 뒤바꾸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다.

욥보다 이 세상의 고통과 불의(불공정)를 잘 표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고통 뒤에는 희미하게 비취는 진리가 있다. 욥은-그리고 당신과 나는 -순종을 통해 그 고난을 뒤바꾸는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 욥은 믿음의 드라마를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격려나 위로의 표시도 없이 고난을 당한다. 욥이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연 속의 피조물의 경이로움을 묘사하셨으나 구분을 가장 감동시킨 경이로운 피조물은 바로 욥 자신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욥기가 성경에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고난을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신비롭게도,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문제를 결코 설명하지 않으셨으며, 욥에게 1-2장에 기록된 내기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으셨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욥의 믿음이었다. 욥은 모든 것이 잘못된 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뢰할 것인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왜?”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에 더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난이 생기면, 그 자체로는 나쁘지만, 그 고난이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

쓰고도 단 인생: 신명기

1989년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 작은 나라들이 소련의 오랜 망령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자유를 얻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명령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정책을 강요하지 않았다. 국기를 어떻게 디자인하며, 군대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외교 정책은 어떻게 펴나가며, 국경 분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간단히 말해,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각 나라의 성공과 실패는 냉전의 해빙기에 어떤 지도자가 나타나느냐에 달려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본능적으로 하벨에게 국운을 맡겼다. 그는 정치적 이견 때문에 수년을 감옥에서 보낸 극작가였다. 하벨은 정치에 전혀 경험이 없었으며 관심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 힘든 과제를 수락했다. 그는 국민들과의 결속을 위해 하나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전통이 되었다. 매주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시청자들의 전화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새 정부가 어떻게 일할 것인지 설명했으며, 예산안을 재검토했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새 법안들을 논의했으며, 도덕성과 책임감에 대한 강연도 했다. 때에 따라 설교가요, 응원단장이요, 역사가요, 스포츠 감독이 되는 이 극작가는 모든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기 있는 쇼를 진행하는 텔레비전 스타가 되었다. 하벨은 진실된 웅변과 인격의 힘으로 체코 국민들이 슬로바키아와의 고통스런 분리를 견뎌내게 했으며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켰다. 그는 자신이 제멋대로인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서 행동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부모 같다고 말했다.

그 날 현장에서, 모세는 자신이 참으로 어느 편이지 깨달았다.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을 부를 때 경멸하는 말로 “먼지투성이들”이라는 뜻의 하피루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애굽인이 죽으면 물론 누군가가 반드시 돌아본다. 그러나 하피루가 죽으면 누가 돌아보는가? 내가 돌아보겠어. 모세는 결심했다. 그들은 노예들일지 모르지만 나의 동족이야. 누구도 그들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어.
모세는 바로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으며 학대받는 동족들 편에 섰다. 바로는 반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쨌든 모세의 종족에게 유아살해를 명령한 것은 바로였다. 바로는 모세라는 협잡꾼 왕자에게 사형 집행 영장을 발부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에 강하게 반발했다. 첫째, 자신의 신뢰성이 문제였다. 히브리인들이 40년간 동족을 떠난 도망자는 차치하고라도 자신들의 원수에게 훈련받은 자를 어떻게 믿겠는가? 게다가 히브리인들과 바로 양쪽 모두를 움직이게 하려면 말 잘하는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왜 말더듬이를 선택하시는가? 모세는 간청했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그러나 모세는 떨거나 무 불꽃 가운데서 들려오는 몇 마디 말씀에 입을 다물었다. 바로를 설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소심한 목자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려고 선택하신 최초의 중재자가 되었으며, 아울러 성경에서 최초로 이적을 행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처음에 보였던 두려움이 기우가 아니었음이 입증되었다. 애굽은 히브리인들을 더욱 탄압하여 작업량을 배로 늘렸다. 그러자 히브리인들은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을 버렸다.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이나 자신들을 떠나 계셨던 하나님이 갑자기 돌아와 바로와 그의 군대와 싸우기로 결정하셨다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딱 한 번 이 못된 성질이 강하게 되살아나 하나님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모세는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바위를 쳤다. 그는 목말라 투덜대는 자들에게 소리쳤다. “너희가 물을 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물을 주리라!”(민 20:10 참조). 이 실수로 그가 평생 꿈꿔왔던 소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한 순간 모세는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지금 요단 동편 높은 바위에 서서 근심에 찬 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모세는 긴 연설(설교)을 했다. 연설은 모두 세 개였다. 모세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분개하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중요한 메시지를 모두 전했다. 그 메시지는 “기억하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의 연설들을 통해 ‘역사 기억하기’라는 위대한 전통을 세웠으며, 이것은 유대인으로 알려진 그의 백성이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되었다. “결코 잊지 말라!”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거를 증거하고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존중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수백 년간의 노예 생활, 열가지 재앙, 홍해의 기적, 주변 민족들에 대한 승리-을 보면서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처럼 잘난 체하며 과거를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애굽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잊는다고? 그들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다시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과거를 회상시키는 일은 매일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1-18)

그러나 곧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부모의 역할을 그만 두실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을 처음 먹는 날에, 만나가 그칠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고 자신의 곡식을 심어야 할 것이다.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을 하며, 왕을 세울 것이다. 번성하고 살찔 것이다. 막강한 애굽에게 주신 교훈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군대와 병거를 의지할 것이다. 자신들이 가난한 자요,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차별할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을 잊을 것이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6-12)

모세가 잘 알고 있었듯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만나는 가장 큰 위험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그는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의 성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벌로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배회했다. 그의 삶에서 모든 중요한 몰락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힘을 사용했을 때-애굽인을 죽였을 때, 광야에서 반석을 쳤을 때-찾아왔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배푸시되(신 7:7-9)

그는 지금 메시지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약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애굽에 내려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14-15, 21-22)

갑자기 모세는 혼자서 히브리인들의 멸망을 막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셨다. 모세는 돌판을 바닥에 던져 산산이 부숴버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거기 엎드린 채 40일 밤낮을 보냈다.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과 보낸 날들과 같이 그는 하루하루를 참회하며 보냈다. 그는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저러다 모세가 죽지나 않을까, 자신들이 이제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약해진 모세를 하루 종일 가만히 둘러싸고 있었다. 모세가 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았다면, 저들은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하게 놔두지 않았다. 그는 따졌고, 간청했으며, 애걸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자부심과 평판에 호소했다. 다른 사람들을 살려두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취하라고 간청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들을 상기시켰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마침내 하나님께서 마음이 누그러지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시겠다는 데 동의하시며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주셨다. 그들의 번영과 생존은 바로 이 계약에 달려 있었다. 모세는 이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말했다. 이스라엘 여자들은 아기를 많이 낳게 될 것이며, 그들의 추수는 풍성할 것이며, 소떼와 양떼는 배가 될 것이다. 모세는 특별난 약속까지 포함시켰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신 7:15). 이스라엘이 이러한 복을 받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만 요구하셨다. 계약에 제시된 언약의 협정에 따르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40년간이나 배회한 망명자들과 전례없는 관계를 맺으셨다. 모세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가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을 적이 있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2-34).

마틴 루터 킹은 마지막 연설에서 모세를 암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산꼭대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둘러보니 약속의 땅이 보였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여러분에게 오늘밤에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도 오늘밤이 기쁩니다... 내 눈은 주님의 영광이 임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 연설 후 모텔로 돌아간 그는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노래를 가르친 바로 그 날에 느보산에 올라 실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고 눈 닿는 곳까지 사방을 바라보았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랐다. 약속의 땅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경계선에서 죽었다.
신명기는 이런 찬사를 덧붙인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0-12).
그는 이스라엘의 설교자요, 역사가요, 군인이요, 선지자요, 재판관이요, 정치가요, 제사장이었다. 수천 년 후에,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은 모세의 기여를 상세히 적었다.

모세는 성경 역사상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능력 있는 영웅이었다. 그가 이룬 엄청난 일과 그의 광범위한 경험은 우리의 찬사와 존경과 경외심을 자아낸다. 모세는 혼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람이었다. 그의 출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나타난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가 유대 전통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 정의에 대한 그의 열정, 민족 해방을 위한 그의 투쟁, 그이 승리와 실망들, 그의 시적인 영감, 전술가와 천재적인 조직가로서의 능력, 그와 하나님 그리고 그와 그분의 백성과의 복잡한 관계, 요구와 약속, 그의 책망과 축복, 그의 폭발하는 분노, 그이 침묵, 율법과 긍휼을, 권세와 온전함을 조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보라. 그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그렇게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무한하며 시대를 초월하여 미치고 있다. 율법에는 그의 이름이 붙으며, 탈무드는 율법의 주석에 불과하며 카발라(히브리 신비종교)는 율법이 침묵하는 것을 전할뿐이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9-14)

진토, 하피루, “먼지투성이들”은 히브리인들을 가리키던 옛날 애굽의 속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토(티끌)임을 기억하신다. 모세가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쳤듯이, 악은 막을 수 없으며 형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의식적으로 잊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며, 크고 무서운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하나님, 티끌 같은 자들까지도-특히 티끌 같은 자들을-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 시편

물론 시편은 아버지께서 흘려 쓰신 메모보다 틀이 훨씬 많이 갖추어져 있다. 시편은 하나의 공통된 정황,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에서 나왔다. 그리고 시인들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때로는 고도의 구조를 갖춘 시로 표현했다. 지금 시편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시인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한다. 마치 단편적인 메모를 기록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라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 이처럼 특별한 고뇌를 느꼈을까? 내 입에서 이런 찬양이 터져 나왔을까? 그리고 나 자신이 내 앞에 있는 시편을 기도하게 될지 모를 상황을 생각해 본다. 유혹에 직면할 때, 성공을 축하할 때, 원한을 품을 때,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등, 이 시편은 어떤 상황에서 내 삶에 가장 잘 적용될까?

성경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시편은 개개인이 살아가는 영적 삶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관한 복합적인 기록을 제공한다. 나는 지식을 얻으려는 학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를 원하는 순례자로서 시편을 접한다. 첫째이자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과의 진실되고 간절하며 한결같은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잘 보여준다.

성소의 유린에 대한 시편 74편의 탄식은(“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내게 있어 국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위한 기도가 되었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1992년 초 로스엔젤레스 폭동은 그 다음 날 아침 수도사들의 합창으로 들은 시편 55편 말씀에(“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대한 새로운 정황을 제시했다. 발칸 반도의 내전 기사를 읽으면서 시편 79편을(“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들을 때 종교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정당화되는 종족주의와 폭력이 이 땅에 계속 미치는 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시편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1977년 냉전이 극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아나톨리 스카란스키라는 뛰어난 젊은 수학자이자 체스 플레에이어가 이스라엘 이민을 거듭 시도했다는 혐의로 KGB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소련의 굴락(정치, 사상범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13년을 보냈다. 스카란스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50편의 시편 모두를(히브리어로) 읽고 연구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 일을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점점 내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밝은 소망으로 바뀌고 있어요.”
스카란스키는 시편을 너무나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간수가 시편(책)을 빼앗자 눈 위에 누워 간수가 시편을 돌려줄 때까지 움직이길 거부했다. 13년 동안, 그의 아내는 세계를 돌면서 남편의 석방 운동을 벌였다.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서 명예 학위를 받으면서 대학의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토플 감옥의 외로운 감방에 다윗의 시편과 함께 갇힌 채, 아나톨리는 수천 년 전 이스라엘 왕이 쏟아낸 말에 자신의 가장 깊은 내적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캐슬린 노리스는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이혼, 별거, 사별, 무능력 등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주부들-을 상담하는 수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수녀는 교회가 자주 짓누르려고 애쓰는 수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수녀는 교회가 자주 짓누르려고 애쓰는 분노를 표현하는 유익한 패턴을 시편이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몇몇 영적 조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시편기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노를 그럴듯하게 설명해 버리거나 고통에 대해 추상적인 조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생생하고 요란하게 표현하며, 자신들의 감정을 주로 하나님께 쏟아낸다.
150편의 시편은 진행중인 영적 치유의 모자이크화를 제시하다. 의심, 편집증(망상증), 경솔함, 비열함, 기쁨, 증오, 즐거움, 찬양, 복수, 배신 등, 이 모든 것을 시편에서 찾을 수 있다. 한때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무익한 혼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을 건강의 표시로 본다. 시편에서 배운 것은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어놓아도 좋다는 것이다. 나의 실패를 싸매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이러한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는 게 더 낫다. 그분께만 치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꼭 필요한 말씀들을 줌으로써 찬양이 부족한 문화의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러한 말씀들 속에 들어가 시편의 내용이 우리의 내적인 태도를 재조정하게 하는 것뿐이다. 본회퍼는 시편은 하나님의 언어 훈련 과정이라고 말한다. 유아들이 부모로부터 모국어를 배우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에서 기도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경배(예배)란 우리가 몰두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전략이다. 경배란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마련하는 시간과 장소이다. 이것은 그분이 시간과 장소를 한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중요시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일을 정기적으로 중단하지 않으면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그분께 나아갈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최근의 시편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은 소수의 시편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인정한다. 시편의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피터슨에 따르면, 이러한 두 범주는 우리가 속하는 두 개의 큰 상황에 상응한다. 그 두 개의 상황(조건)이란 절망과 행복이다. 나로서는 직접 조사를 해보진 않았지만 보통 기독교 서점의 경우는 그 반대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 서점에 진열된 책과 액자와 선물 상품 중 적어도 70퍼센트는 우리의 행복을 말해주는 반면에 우리의 절망을 말해주는 것을 훨씬 적다.
다윗 왕은 백성들에게 슬퍼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했다(삼하 1:18). 시편의 애가는 푸념하는 것이나 불평하는 것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우리는 자신이 거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푸념한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믿는 것에 대해 슬퍼한다. 욥처럼, 시편기자들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보이든 간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굳게 믿었고 공의를 부르짖어 구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슬퍼했다. 그 결과로 나온 시편들은 이들이 영원한 믿음과 일상적인 경험을 재결합하도록 도와주었다.

다윗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자기 백성에서 슬퍼하는 법을 가르친 왕이 공적 고백에 관한 최고의 찬송시와 멋진 찬양의 노랫말도 지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은 여느 사람 못지 않게 흠이 많았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알려지게 되었다(행 13:22). 존 칼빈은 이렇게 썼다. “다윗은 작은 거울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울 속에서 당신의 계속적인 은혜의 길을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 다윗의 영적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다윗의 것으로 알려진 73편의 시편들이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다. 그 중 특히 몇 편은 그 시편이 기록되던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 서론적 언급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편에서 다윗의 영적 일기를 먼저 읽은 다음 어떤 “외적인” 사건들이 다윗으로 하여금 “내적”인 시편을 쓰게 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이처럼 방향을 재설정하는 매일의 과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시편은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진짜 자리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지침이 되었다. 나는 히브리 시인들이 진정으로 드린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다른 어떤 책보다 시편을 많이 인용하면서 이렇게 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도 시편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언어로 보고 시편에 의지하면서 같은 일을 하셨다.
확신컨대 시편을 내 자신의 기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평생의 헌신이 필요할 것이다. 시편에서 긴급함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주림의 모습을 보지만 나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시편기자들은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하나님을 갈망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멋진 아름다움”을 꿈꾸며 밤에도 깨어 있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천 년을 보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보내길 더 좋아했다. 이러한 시인들이 입학한 곳은 믿음의 대학이었다. 반면에 나 자신은 유치원생과 더 비슷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이제 다시 시편을 읽기 시작했으니 어떤 시편은 닳아서 헤어질 것이다.

  저주시편은 악에 대한 적절하고 “의로운 분노”를 표현한다.
「미국 정신의 몰락」의 저자인 고 알랜 브룸) 교수는 시카고 대학 학부생들에게 악인을 정의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학생도 악인을 정의하지 못했다. “악”이 그들의 마 속에 하나의 범주로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브룸 교수는 악을 인식하고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매우 위험한 신호라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해 동안 도심의 저소득층을 위한 공영주택 공급 계획에 참여했던 아내 자넷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아내는 만연한 악을 매일 보았다. 갱들이 행인을 향해 자동 권총을 난사하고, 경찰들이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죄한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며, 강도들이 연금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나오는 노인들을 덮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온 아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어떤 건물 관리인이 한 노인 아파트의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만능키로 과부의 아파트를 열고 들어가 주인을 때리고 돈을 훔치곤 했다. 모두들 범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신분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시청 주택과 책임자는 그 관리인의 전보나 해고를 교묘하게 미루고 있었다. 그날 알랜 브룸이 내 아내에게 악인을 정의해보라고 요구했다면 생생한 묘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주시편을 읽으면서 가끔씩 텔레비전에 보도되는 희생자 가족들의 증언을 생각해 보라. 음주 운전자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가 법정에 서서 온몸을 떨면서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이야기한다. 또는 O. J. 심슨에 대한 민사 재판에서 골드만의 가족이 심슨을 상대로 했던 증언들을 생각해 보라.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시편을 묵상하면서 저주시편 뒤에 있는 감정들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저주시편들은 나치 통치하에 살고 있는 전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고뇌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로운 분노”라는 설명은 저주시편 뒤에 있는 동기들을 밝혀줄지 모르지만 저주시편이 낳는 모든 문제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아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는 했지만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시 109:10) 또는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9)고 중얼거리며 집 주위를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캐슬린 노리스는 「수도사의 삶」이라는 책에서는 저주시편과 씨름했지만 나중에 나온 「놀라운 은혜」라는 책에서는 저주시편과 화해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저주시편을 써보라고 했다고 말한다. 형들(오빠들)과 누나들(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은 저주에 타고난 달란트가 있다.

어린 남자아이가 “못된 괴물”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는 먼저 아버지가 자기에게 소리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아이가 시에서 보인 반응은 여동생을 계단에 집어던지고, 그런 다음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과, 마침내는 온 동네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집에 앉아 혼자 중얼거린다.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매주일에 한 번씩 하는 일이 있다. 집 뒤 언덕을 오랫동안 걸으면서 나를 부당하게 대해 내가 품었던 화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오해를 샀던 일들을 자세히 말씀드리면서 나의 깊은 감정들을 하나님께 내어놓는다(어쨌든 하나님은 그 감정들을 아시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 자체가 치료 효과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대체로 언덕을 내려 올 때면 방금 큰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전과는 달리, 몸 속의 가시처럼 부당함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그 부당함을 누군가에게-하나님에게-큰 소리로 표현했다. 때때로 이렇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간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의 이기심, 남을 판단하는 마음, 좁은 시각,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은혜와 용서로 대하는 나의 결점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저주시편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라... 이것은 보살피셔야 하는 전능자 앞에 억눌린 울분을 표출하는 카타르시스가 결코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치된 분노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음으로써 우리의 불의한 원수와 복수심에 불타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시며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맞대게 한다는 것이다. 증오는 우리 마음 어두운 곳에 숨어 어둠의 체계로부터 양분을 받아 자라나서 모든 것을 지옥 같은 자신의 배타심으로 물들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의 빛 가운데서, 증오는 물러가고 용서의 기적을 맺는 씨앗이 뿌려진다.

지혜의 마지막: 전도서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서른 살에 죽든, 예순 살에 죽든, 열 살에 죽든 다를 게 없어. 어떤 경우든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이 계속해서 살 거고 세상은 예전처럼 돌아갈 테니까.” 도대체 무엇이 어떤 차이를 낳는다 말인가? 당신이 침대에서 일어나느냐 누워 있느냐, 인생을 사랑하느냐 증오하느냐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사르트르의 마티처럼 자신의 손을 찌르거나, 카뮈의 “이방인”처럼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어떤 사람에게 총을 쏘거나, 헤밍웨이 작품의 건달처럼 술집을 전전하며 싸움질을 해보라. 인간이란 수십억 년의 역사에서 작은 점 하나일 뿐이지 않는가?
이것이 현대 문학의 상황이었으며, 나는 한동안 그 속에서 뒹굴었다. 칼 융은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의 3분의 1이 “무감각하고 공허한 삶”이라고 밖에 규정할 수 없는 노이로제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무의미야말로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겪는 노이로제라고 했다. 그에 따르며, 사람들은 철학도 종교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헛되다라는 핵심어는 전도서에 35회 나타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전도서의 주제를 일깨워준다(이 단어가 전도서 외에는 욥기에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단어는 “부조리”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전도자를 괴롭히는 문제는 욥을 괴롭혔던 문제와 같은 것이었으며, 오늘날 공정한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며, 악한 자들은 번성하고 선한 자들은 고난을 당하며, 폭군들이 다스리며, 재난이 일어나고, 질병이 만연하며, 모두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인생은 불공정하다.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세상은 균형을 잃고 뒤틀려 있는 것 같다.
전도자는 신중하지 말라고 결론 내린다. 먹고 마시며 덧없는 행복의 순간을 잡아라. 이것 외에 삶의 요점이 무엇이겠는가? 땀은 당신이 흘리지만 모든 공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당신은 선하게 살려고 애쓰지만 악인들이 당신을 짓밟는다. 당신은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은 망나니 상속자에게 돌아간다. 당신은 즐거움을 구하지만 그 즐거움은 쓰라린 아픔으로 바뀐다. 게다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선하건 악하건 간에 모든 사람은 같은 결과를 맞는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우리가 행복하려고 태어난다는 모든 생각과 모순된다. 이 세상의 삶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단어는 하나뿐이다. 헛되다!

워터 퍼시의 에세이집 「병 속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일들을 예로 들면서 시작한다. 퍼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을 던진다.

  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이 다른 어느 도시 사람들보다 자살을 많이 하는가?(유럽에서 자살의 수도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다.)
  왜 당시 프랑스에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는 한 프랑스 카페에 앉아 인간 실존의 부조리와 20세기 삶의 역겨움에 대한 「구토」라는 책을 썼는가?
  왜 라치몬트에서 뉴욕으로 멋진 통근 열차를 타고 출근하는 남자, 그의 필요가 욕구가 모두 충족되고, 사랑스런 아내와 가족이 기다리는 좋은 가정이 있고, 좋은 직장이 있으며, 전례 없는 “문화와 여가를 즐기는” 남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쁘고 울적할 때가 많은가?

계속해서 퍼시는 정말은 궁핍한 환경보다는 풍족한 환경에서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솔제니친의 세 권 짜리 저서「수용소 군도」에서는 어떤 소외감이나 절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분노, 정의를 향한 열망, 그리고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뿐이다. 빅터 프랭클이 「그래도 나는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도서출판 열린 사회)에서 설명하듯이, 집단 수용소의 희생자들은(그도 이들 중 하나였다) 무의미에 굴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의미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만이 그들의 생명을 지탱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실존적 절망은 아우슈비츠나 시베리아의 지옥 같은 상황에서 싹트지 않았으며 오히려 파리의 카페, 코펜하겐이 커피숍, 비버리힐즈의 호화스런 궁전에서 싹텄다. 소설가 필립 로스는 냉전 시대에 동유럽을 여행한 후에 이렇게 썼다. “서방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지만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반면에 동유럽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으로 전도서와 같은 절망 책이 황금 시대에 나올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전도서와 욥기의 두드러진 차이를 생각해 보라. 둘은 똑같은 주제를-인생의 불공정함, 왜 고난이 존재하는가, 왜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며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가-많이 다루지만 그 음조는 너무나 다르지 않는가! 전도서는 무의미(헛됨)와 공허를 말하는 반면에 욥기는 배신과 열정을 알리며 공의를 부르짖는다. 욥은 하나님께 주먹을 휘두르며 그분에게 해명과 응답을 요구한다. 전도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리며 포도주 잔을 또 한 번 기울인다. 양쪽 모두 절망을 말한다. 한족은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한 고뇌에 빠져, 다른 한쪽은 폭음이라는 퇴폐적인 권태에 빠져서 말한다.
전도서의 음조는 풍족한 서방 국가들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웬델 베리는 성장일로에 있는 안락한 미국 사회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고 당연시한다. 사랑이 없는 결혼, 기쁨이 없는 섹스, 유쾌하지 않은 술자리, 적절한 의식이 없는 출생과 축하와 죽음, 의심이나 시련이 없는 믿음,    행함이 없는 신앙, 관용이 없는 예절 등...작고 유익이 없는 일에 대한 즐거움, 기쁨, 경이, 환희같은 인간적인 감정들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또는 세속적인 유럽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BMW와 볼보를 몰고 다니며, 식도락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섹스숍을 들락거리며, 멋진 삶을 추구한다. 식민 지배의 야심을 포기했던 그들이 최근의 국제적인 식량 위기나 기아에 대해서는 쥐꼬리만한 동정심을 보인다. 사람들은 그들을 약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심도 도덕성에 대해서도 어떤 열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욥을 더욱 격분시켰다.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욥 21:13-15)
  
전도자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체념적인 태도는 욥의 투쟁적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욥과는 달리 ,너무나 많은 시편기자들과도 달리, 전도자는 하나님과 열정적인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우상 숭배에 빠졌다. 그것은 이교도 신상들에 대한 우상숭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겨우 소수만이 교회에 출석할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신에 “삶의 질”을 추구하는 현대 서구 유럽에서 만연하는 그런 우상숭배였다. 또는 우리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보증된 권리가 있으며 어느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었다. 전도자는 이런 경고에 동의할 것이다. 너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다.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전도서에 대해 내가 “KGB 이중스파이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 냉전이 끝나기 몇 개월 전에, KGB의 요직에 있는 한 관리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저녁 뉴스에 나와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을 격찬했다. 그리고 그는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미국 정부로부터 버지니아의 넓은 땅을 받았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소련 대사관을 찾아 자신의 망명을 번복하고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찬사도 거짓말이었다고 했다.
많은 주석가들이 전도서를 상당히 괜찮은 작품으로 제시한다. 참된 신자인 저자는 결코 절망의 고통 가운데 있지 않으며 다만 세속적인 사람, “해 아래”(이 표현은 30회 사용된다) 사는 사람인 체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해 아래 사는 삶의 공허함을 보여주면서 독자를 이끌기 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그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이 줄곧 믿어 왔던 진리를 선포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변증가 프란시스 쉐퍼는 비슷한 접근을 완성했으며, 스스로 이것을 “사람들을 그들이 세운 전제의 논리적 극단으로 이끌기”라고 불렀다. 그는 논증을 위해 가장 유물론적인 가정까지-하나님은 없으며, 절대적인 것도 없다-채택한 다음 이런 생각이 자살과 무정부 상태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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