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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감자의 역사

by Ddak daddy 2021. 8. 3.

감자의 역사


 

감자는 3,500년 전부터 페루 등지에서 재배되었고, 두 경로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1556년에 출간된 '에스파냐 연대기'에 감자는 "밤맛 나는 속살을 가진 덩이줄기"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시에사라는 사람이 에스파냐에 감자 몇 알을 전했는데, 이것이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고 있던 클리시우스에게로 넘겨졌다. 1588년 1월 26일 그가 최초로 감자를 스케치했다. 한편 1573년 세비야 병원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수도사들이 감자밭을 일궜다는 기록도 있다. 그때부터 75년간 감자는 에스파냐에서 극빈자나 군인들만 먹는 식량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버지니아에 정착했던 영국의 식민통치자들은 신대륙 원정에 참가한 에스파냐의 모험가들에게서 감자를 얻어냈다. 1586년 토머스 해리웃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받던 롤리 경의 배를 얻어 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국의 식물학자들은 그로부터 감자를 전해 받았고 이후 빈민국이었던 아일랜드는 17세기 초부터 감자를 재배하여 식용으로 이용했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유럽의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감자를 '미천한 식품'이라 하여 오랫동안 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1770년 프랑스에 큰 기근이 일어나자 감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파르망티에는 감자는 식량 부족 시 유용한 식물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감자, 고구마, 돼지감자의 재배와 이용에 관하여'라는 책도 펴냈다. 파르망티에가 감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포로 생활을 할 때였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난 후 그는 귀국과 동시에 감자의 보급에 앞장섰다. 중요한 연회에서 그는 모든 요리에 감자를 사용했다. 심지어 술도 감자를 증류시켜 만든 것으로 대접했다. 1888년 파리 개선문 근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감자를 사용한 프랑스의 요리에 파르망티에식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감자가 뿌리 내리는데 막바지 진통을 겪었던 곳은 발칸반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인들은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비굴하게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저주받은 채소를 먹을 수 없다"면서 감자 재배를 강경하게 반대했다. 할 수 없이 1802년 오스트리아 군대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농민에게 감자 파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태형 40대'의 형벌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처럼 식량자원으로 인정받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감자의 원 고향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원산지는 해발 3000~4000미터의 안데스 고지로 특히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 주변이 감자의 발상지이다. 이곳에 정착해 잉카문명을 구축한 사람들에게 감자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와 피사로 등이 활약하던 대항해 시대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에스파냐 함대를 무찌른 1588년 알마다 해전 때 난파선 안에 감자가 있었다는 설도 있고, 감자가 유럽을 전해지는 과정에서 영국군이 관여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6세기 말까지 감자는 유럽에서도 국왕의 정원이나 약초농원에서만 재배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감자는 관상용으로만 재배되었다. 유럽인들이 감자를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울퉁불퉁한 모양이 한센병의 종양처럼 보인다는 것과 싹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비교적 유럽에서 감자가 빨리 정착한 나라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30년 종교전쟁 결과 국토가 크게 황폐해졌고 특히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이했다. 때맞춰 닥친 기근으로 인해 감자의 높은 생산력을 주목하게 되었다. 감자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수확하는 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냉해의 피해가 적었다. 또한 생육일이 100일 채 되지 않는데다 흉작에도 강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일 농가에도 감자를 적극적으로 재배하도록 권장했다. 그것을 거부하는 농민은 귀과 코를 잘라내겠다고 위협하면서까지 그는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위기의 17세기, 성장의 18세기'라고 일컬어지는 유럽 역사는 그 이면에 감자의 공헌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감자 재배는 소농민이나 농촌 하층민의 경제적인 자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저습지가 많은 네덜란드에서도 감자가 일찍 정착할 수 있었다. 이 후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까지 감자가 전해졌다. 감자는 거친 땅에서도 대량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항해 시대 이후 지구상의 각지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인구 증가에 공헌했다.

 

우리나라는 청나라로부터 감자가 유입되었다.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기아에 허덕이던 차에 청나라의 심마니가 조선 국경의 산중에 감자를 몰래 심었는데 수확 후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감자가 그대로 자라면서 번식하게 되었다는 설과 영국 선교사가 씨감자를 주면서 재배법을 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보급이 원활하지 않자 당시 귀하던 소금을 상으로 내걸고 재배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라는 말처럼 한편으론 감자에 극단적으로 의존한 경제구조로 인해 초래한 비극도 있다. 영어로 감자를 아이리시 포테이토라 부르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유럽에서 감자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아일랜드이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많이 오는 아일랜드의 기후가 감자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에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를 많이 재배했다. 1800년에 500만 명 정도이던 재배 인구가 20년 후에 650만 명, 40년 후에는 8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846~1847년에 걸쳐 시작된 기근으로 아일랜드 농민 가운데 75~100만 명이 아사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등지게 되었다.

비극은 1845년 아일랜드 동부에서 감자의 줄기마름병이 확인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감자는 수확한 씨감자를 종자로 이용하기 때문에 씨감자가 가지고 있는 병은 이듬해 심는 감자에 그대로 전해져 질병으로 모조리 쓸어버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한번 발생한 줄기마름병을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영국 크롬웰의 침략 이후 감자에만 의존하여 가까스로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은 갑자기 살아가 방도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기근은 거의 7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일랜드의 많은 가난한 농부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달리 살아가는 방법이 없었던 그들은 이주한 곳에서도 다시 감자 재배를 시작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감자를 소비하는 나라로 손꼽히는 미국의 감자는 가까운 페루에서 전해진 게 아니라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이주역사와 함께 정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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