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자료

1942 대기근

by Ddak daddy 2021. 1. 26.

 

https://blog.naver.com/kimyto/50180666569

번역하기

 

당시의 참상을 그린

펑샤오강 감독의 중국 영화 [1942]

 

 

가뭄과 메뚜기 떼는 당시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가 없었던 자연의 재해였습니다.

그러나 기근을 구제할 수 있는 시점을 놓치고 굶어죽는 이들을 방치하고,

그 위에 과중한 세금을 박박 긁어서 농민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죽음으로 내 몬 것은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오늘은 그 잔인한 정치와 행정을 ........

 

 

.................................................

 

1942년 봄 비소식이 완전히 끊긴 다음 보리 수확기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기근은, 적절한 구제 시점을 놓쳤습니다. 여름도 지나고 가을 밀 수확기도 그냥 넘어가면서, 가혹한 세금을 제독하게 긁어갔습니다. 겨울 추위가 오자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지요.

 

그러나 중화민국의 구제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엄청난 세금을 한푼도 감면하지 않고 탈탈 털어가는 가혹한 손길만이 허난성 주민들을 사선 밖으로 떠다밀 뿐이었습니다.

 

형식은 구제였으나, 실효성은 별로 없는, 그래도 구제의 손길이라고 할 수는 있는 조치는 1943년 여름이 되어서야 허난성 주민의 눈에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고, 왜 그렇게 늦은 시점에 구제가 시작됐을까요. 아니 왜 하지 않으려던 구제가 그 시점에 시작됐을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이 대목입니다.

 

..................................................

 

당시 중화민국의 유력한 신문으로 대공보(大公報)가 있었습니다. 1943년 초 통상적인 인사조치의 하나로 섬서성을 취재하는 장가오펑(张高峰)이란 기자를 섬서성과 인접한 허난성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가오펑은 우한(武漢)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대공보에 입사한 젊은 기자입니다. 그는 연초에 발령을 받고 시안에서 허난성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숫자의 허난성 피난민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뤄양으로 가서는 기근의 참극을 구석구석 목도하게 됩니다.

 

그는 경악했습니다. 겨우 몇백 km 서쪽의 섬서성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엄청난 비극이 이곳 허난성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길가에 주저앉아 실성한 듯한 사람들, 시체처럼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걸어가는 피난민, 시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쌓인 방공호 .......

 

장가오펑은 기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기사로 썼습니다. 그리고 본사로 송고했습니다.

 

1943년 2월 1일자 신문에는 설날을 며칠 앞두고 "기쁨에 넘치는 기사"로 도배됐습니다. 그러나 2면 우하단 구석에는 장가오펑의 기사가 실렷습니다. "기근이 든 허난, 나무껍질을 먹는 사람들, 그런데도 여전히 곡물징수에 여념이 없다"

 

이 기사를 받아든 대공보 사장 왕윈성(王蕓生, 아래 사진)은 고민했을 겁니다. 그러나 용감하게 기사를 실었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간 날,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습니다. 기근도 기근이지만, 곡물징수 대목에서 뒤집어졌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않나요?

 

당시 대공보 사장이던 왕윈성, 취재기자 장가오펑

 

 

왕 사장은 그 다음날도 용감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충칭(장제스의 중화민국 중앙정부)을 바라보면 중원(허난성)을 생각하다"는 제목의 논설을 써서, 시쳇말로 다시한번 중화민국 정부를 모질게 깠습니다.

 

요지는 간단합니다. 왜 구제기금은 감감무소식인가. 기득권층 재산은 왜 징발하지 않고 이재민의 고혈만을 그렇게 가혹하게 짜내는가 ......

 

장제스는 대노했습니다.

기근에 대노했냐고요? 구제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정부 유관 부처에 대노했냐고요?

아닙니다. 대공보란 신문사에 대노했습니다.

 

사실을 밝혀서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대공보는 3일 정간을 먹었습니다. 사장 왕윈성의 미국 취재여행은 돌연 취소됐습니다. 국민의 사기가 떨어졌을까요? 장제스의 사기가 떨어졌을까요.

 

그 다음달인 3월 초순, 취재기자인 왕가오펑은 체포됐습니다.

기자는 1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

어떤 경우에도 허난성에 대한 곡물징수 할당량을 줄이지 말 것!

굉장한 엄명이었습니다.

 

대국의 총통답지요?

어설픈 군사적전으로 89만명을 일거에 수몰시킨 거인이 그까짓 기근쯤이야~??

인구 3천만 명에 지나지 않는 한 개의 성(省)쯤이야~!!

 

 

그러나 이 기사는 또다른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충칭에 주재하던 미국 타임지의 기자 시어도어 화이트가 주목했습니다. 그는 현장을 취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영국 타임즈의 기자인 해리슨 포먼과 취재에 나섰습니다.

 

두 기자는 허난성으로 향했습니다. 끝없는 피난 행렬, 주저앉으면 곧 죽어버리는 사람들, 시체 뜯어먹는 들개, 친자식을 삶아먹은 엄마, 최후의 만찬에 독을 넣고 배불리 먹고 집단 자살해버린 가족 ........

 

기자도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기사를 썼지요, 정부는 이재민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아니다, 열심히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 군대의 창고에는 식량이 그득했다.

 

그리고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기 직전, 허난성 관리들이 기자 두 사람을 위해 차린 식탁의 열 두 가지 기름진 요리의 이름까지 기사에 올렸습니다.

 

그들은 이 기사가 본국에 송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이미 다 썼지요. 충칭으로 돌아오는 길에 뤄양의 전보국에 들러 송고를 의뢰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검열기관에 먼저 보내서 승인을 받은 다음에 보내는데, 어쩐 일인지 그냥 타전하더랍니다.

 

1943년 3월 22일 미국 타임지가 화이트 기자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뜨거운 반응이 터져나왔습니다. 무수한 비난과 압력이 연합국의 일원인 중화민국 정부에 쏟아졌습니다.

 

마침 장제스(위 사진)의 부인 쑹메이링이 미국에 체류중이었습니다. 미국의 중국 지원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것이지요. 쑹메이링은 화가 나서 타임지에 기사 해임을 요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짓도 했지요.

 

물론 타임지는 예의바른 얼굴로 외교적인 언사로 점잖게 거절했겠지요? 그리고 속으로는 야만이라고 비웃었겠지요.

 

연합국으로부터 국제적인 비난이 쇄도하고, 군수물자 지원 등등이 현안으로 걸려있는 판이니 ...... 장제스는 실제 구제조치에 나섰습니다.

이제 허난성에 아직 죽지 않은 인민대중들은 살 길을 만난 걸까요?

불행하게도, 아직 아니었습니다.

 

1943년 3월에 시작된 구제조치는 그해 늦봄 보리를 수확하는 시점이 되어서야 곰팡이 핀 식량이 일부 도착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냥 주는 것은 아니고 사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리 수확 전과 후는 가격 차이가 상당합니다.

 

허난성 정부는 보리 수확 후에, 수확 이전의 고가 그대로 구매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 가격 차이는 누군가의 포켓 속으로 들어가버렸을까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포켓 속으로 들어간 것이겠지요?

 

충칭의 중앙정부가 구제자금 2억 위안을 책정해서 허난성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허난성 정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8천만 위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억2천만 위안이 또 누군지 모를 그들의 포켓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뭉터기로 돈이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어느 고위 관리에게 보내진 200만 위안은 통째로 없어졌습니다.

 

회계출납원은 그 돈뭉치가 누구의 집으로 옮겨진 것을 알았지만 보지못했다고만 진술했습니다. 얼마 후 그 관리는 고향에 33만㎡의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아직도 남은 돈 일부는 주민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러나 주민에게 직접 나눠주는 말단 창구에서는, 그동안 밀린 세금을 싸그리 공제하고서야 푼돈 조금만을 건네줬을 뿐입니다. 이렇게라도 지급된 돈은 전부 100위안 지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파는 곡식은 군대에서 빼돌린 것들이 많은 탓에 100위안 짜리 고액권을 받지 않고 5위안, 10위안 지폐만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은행에 가서 돈을 바꿔야 했지요. 이때 교환해주는 수수료가 17%였습니다. 은행은 창구에서 돈만 바꿔주면서 17%라는 엄청난 수수료 장사를 했습니다.

 

희망은 충칭에서 장제스에게서 중앙정부나 성정부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대지만 바라 볼 뿐이었습니다. 1943년 초 폭설이 내렸으니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여름에 비도 좀 뿌렸습니다.

 

그러나 가을 밀 수확기에 다시 메뚜기 떼가 등장했습니다. 메뚜기 떼 피해면적은 1942년보다 3배 가까운 규모였습니다. 그 전해에 시작된 아사 사태는 해를 넘기고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재앙이 발생하자 인간의 탐욕이 재앙에 재앙을 덧씌었습니다. 그 위에 또 자연재해가 덮치면서 삼백만 명이라는 있을 수 없는 아사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원래 정치와 전쟁과 제도와 권력으로 인해 허덕이던 인민대중은, 가뭄과 메뚜기떼라는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제도와 권력이었습니다.

 

청나라 말이었던 광서제 3년, 곧 1876년에도 허난성에는 지독한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 기근과 1942년의 기근을 모두 겪은 사람도 일부 있었습니다. 그들은 1942년의 기근이 훨씬 참혹했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을의 사례입니다. 광서 3년의 기근에서 300명 가운데 100명이 아사했고, 피난 갔던 사람들도 나중에 돌아와 다시 살았답니다. 그러나 1942년 기근에서는 700명중 400명이 아사했고, 피난 간 사람들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답니다.

 

기근이 기근에 멈추지 않고 삼백만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로 비약한 것은 권력과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까요? 아닙니다.

 

당장 그 다음해에 놀랄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 후퇴하는 5만여 명 국분군이 농민들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탕언보의 부대가,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던 지역을 통과할 때였습니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농민들이 엽총 식칼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덤벼들었습니다. 이들은 국부군을 무장해제시키고는 생매장을 하거나 총살을 해버렸습니다. 탕언보는 허난성의 일제 앞잡이들과 반역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허난성 동남부의 한 지역에서는 제4집단군이 기근에서 죽배급소를 운영했었습니다. 1944년 일본군과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자 주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농민들이 전투에 동참한 것이지요. 이 승전 기록은 허난성 전투에서 매우 귀한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죽 몇 그릇 얻어먹은 것은 죽 몇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나 그런 겁니다. 작은 것에 감동해서 목숨을 보태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백성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탕언보의 부대는 과연 어느 정도였기에 무관심이 아니라 공격을 받았을까요.

 

허난성 사람들이 말하는 4대 재앙은, 1938년의 수해, 1942년의 가뭄, 1943년의 메뚜기떼, 그리고 탕언보 네 가지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누구도 삼백만 명을 굶겨 죽이자고 기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구태의 관습과 관례, 의연한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게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장제스는 중일전쟁의 전국민의 사기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충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사기를 해치지 않아야 했었지요.

 

리페이지 허난성 성장(좌측 사진)은 중앙정부의 대일 항전에 '결사적으로'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자기 자신의 죽음을 걸고 결사적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목숨을 왕창 걸면서 결사적이었을 뿐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하게, 위대한 장제스의 신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작정했을 뿐이지요.

결과는 "그들이 합심해서 삼백만 명을 굶겨죽인 것"입니다.

 

이게 장제스의 정부와 군대였습니다. 왜 그들이 민심을 잃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입니까? 다른 학술자료를 들이댈 필요도 없습니다.

 

장제스 측의 발상법은 한 관리의 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백성이 굶어죽으면 그건 중국 땅으로 남아있지만, 군대가 굶어 죽으면 일본 땅이 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틀린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중국 땅이긴 한데 장제스의 중국 땅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중국 땅이 되었을 뿐입니다.

 

 

몇 주 전 이 르포를 읽고 메모했던 것이 다시 떠오릅니다.

 

 

자연재해로서 가뭄과 메뚜기떼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 육신의 고통으로라도 견뎌서 통과할 수 있다.

그 위에 인간의 작위가 끼어들면, 비로소 굶어 죽는 아사자가 생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회와 제도가, 행정과 국가가 조금만이라도 상식으로 작동했다면, 삼백만 명은커녕 삼백 명도 굶어죽지 않는다.

 

삼백만 명이 굶어서 죽은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으나 어떤 전쟁보다 더 큰 참상을 불러온 인위적인 재난 ...... 그것은 기근이 아니다, 학살이다.

 

중국이라고?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1942년이라고?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언제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세밀하게 계획해서 저지르는 일이 아니다. 방심하고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합심해서 저지르는 것"이다.

 

 

장제스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려고 했으나

최후의 한 편을 더 쓸 생각입니다. 장제스가 실패한 최종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마오쩌둥이나 공산당이 아닙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

 

[출처] 왕초의 작은 대장정(15) 미리 읽어보는 장정(15) 장제스는 왜 실패했는가(4) 1942년 허난성 대기근(3) - 어디선 본듯한 꼬라지|작성자 왕초

'역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유럽 사회의 변화, 제국주의  (0) 2021.10.21
감자의 역사  (0) 2021.08.03
경신대기근  (0) 2021.01.26
요하문명  (0) 2021.01.16
수메르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0) 202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