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가 답이다
서평 은혜의 순간
튤리안 차비진 / 터치북스
며칠 째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이 중첩되면서 몸도 마음도 힘들어 한다. 두통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통증이 어디서 느끼는가도 모른다. <통증학>을 저술한 영국의 저명한 통증학 의사인 Patrick D. Wall 자신도 통증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이까짓 통증하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의학이라니. 다행히 아침이 되자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경험상 두통은 스트레스가 과중되거나 한계에 부닥쳐 힘들어 할 때 일어났다. 일의 압박과 성취에 대한 욕구가 과도하게 일어나 몸을 혹사 시킬 때면 두통이 급습했다. 아픔이 나쁘지만은 않다. 계기판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이유를 찾고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두통은 나에게 쉬어야 한다고 일러 준다.
죄는 영혼의 두통이다. 의도하지 않는 부도덕과 나태함은 죄가 가져다준 일상적인 현상이다. 신자의 삶에 만연한 죄의 징후들은 끔찍한 타락의 결과들이다. 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사도바울은 ‘율법에서 온다’고 말한다. 태초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죄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과도한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했던 첫 사람은 율법의 종이 되었고,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결국 속박된 노예로 전락했다. 그 후, 그들은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속박과 압박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였고,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살았으나 죽은 존재가 되었다. 영혼의 두통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인류에게 일어나고 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존재한다. 죄의 원인은 율법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계명이며, 의지이다. 그럼에도 율법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고자질쟁이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으면 두통이 끊임없이 재발되듯 율법이 사라지지 않으면 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요, 죄인임을 일깨우는 것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죄를 저지르게 한다. 참담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인류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은혜가 답니다. 우리에겐 은혜가 필요하고 일방적인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의 <은혜의 순간>은 지치고 상한 심령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일방적인 은혜를 선포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모두 10장으로 나누어 왜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주는 혜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만이 전부임을 일깨워 준다. 구원에 이르는 데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가 율법에 의해 녹초가 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모든 것을 이루었’(278쪽)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나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거룩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딱, 결혼하기 전까지 만이다. 결혼한 후 나는 의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아내와 사사로운 의결충돌을 겪었고 서로를 헐뜯고 비방했다. 거룩한 형제라는 호칭은 오판이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않을 때만 적용되는 일시적인 가면이었다. 나는 사랑하지 못했고, 인내하지 못했으며, 진지하게 상대를 배려하지도 못했다. 내 스스로 나의 실체를 보고 기겁했고, 목회자의 소명을 포기하고 싶었다. 아내와 심하게 다툰 어느 날, 비가 어둠을 뚫고 하염없이 내렸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음을 결심했다. 산 속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 같은 깨달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그래서 죽었다. 내가 죄인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일어나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저자는 율법과 은혜를 장발장 이야기를 빗대어 이렇게 풀어낸다.
“율법은 장 발장의 정체를 폭로하고 은혜는 그의 혐의를 벗긴다. 율법은 분석하지만 은혜는 석방한다. 율법은 기소하지만 은혜는 방면한다. 율법은 최고를 심판하지만 은혜는 최악을 구원한다. 율법은 ‘저주한다!’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축복한다!’라고 말한다. 율법은 하인이라고 부르지만 은혜는 아들이라고 부른다. 율법은 유죄 판결을 내리지만 은혜는 용서한다. 율법은 사람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지만 그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은혜뿐이다. 장 발장에게 일어난 일은 정확히 이런 일이었다.”(127쪽)
장 발장은 정확히 나다. 율법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고, 그렇게 하여 더욱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간다. 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죄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된다.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는 보수적 성향의 미국 시트콤 <비버에게 맡겨라>가 방영된 이후 1960년대에 미국은 자유연애 운동이 일어났고, 건전함과 근검절약으로 정평이 난 유타 주는 포르노 소비와 우울증 치료제가 전국 선두 자리를 달리고 있다(107쪽)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율법은 죄악을 드러내지만 제거하지 못하며, 오히려 죄를 부추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복음은 우리가 예수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18쪽)을 믿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제약 없이 전폭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칼뱅주의는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가 ‘자발적인 선행을 낳는다.’(157쪽) 율법이 아니다. 삭개오에게 필요한 것 ‘넌 죄인이야’라는 비판이 아니었다. 비판은 사람을 변화 시키지 못한다. 오직 은혜만이 변화 시킨다. 삭개오는 파격적인 주님의 은혜를 입고 변화 되었다. 나도 오직 은혜만으로 변화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에 눈물을 흘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니, 이것은 친히 죄인과 친구가 되시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복수와 억압과 슬픔의 사슬을 깨뜨리는 유일한 길은 공로주의의 사다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임을 그분은 아신다.”(159쪽)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더 이상 율법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혼의 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노예가 아닌 아들로, 속박이 아닌 자유로, 의무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베풀어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그렇게 했다.
<은혜의 순간> 튤리안 차비진 / 터치북스
/들어가는 글/
*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걸 이루셨다'는 것이다.
* 이제 교회는 '오직 은혜'라는 표어를 새롭게 받아들임으로써, 창시자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절망하는 자를 위해 소망의 불을 다시 밝히며, 성과주의에 물든 인간에게 십자가의 자유와 안식을 바라보라고 말할 때가 되었다.
1. 녹초가 된 세상, 은혜가 답이다
조건부 세상의 조건 없는 은혜
* 성경은 하나님께 은혜를 갚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증언하는 게 아니라 악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한다.
* 성경은 신앙생활의 길라잡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비신앙적 생활에 대한 답이 예수님임을 밝히는 책이다.
* 피로하고 지친 세상을 위해 예비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름답고 무한하신 은혜이며, 이 기적 같은 은혜가 바로 복음이다!
은혜, 은혜, 더 많은 은혜
* "은혜란 '절대 사랑'이다." _ 폴 잘
* 은혜란 베풀 의무가 없는 자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 하나님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의롭게 살라." 하나님의 판단, "아무도 의롭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 "예수가 우리의 의로움이다."
* 은혜의 복음은 사실이다!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진실한 것은 없다.
* 은혜는 피곤하고 지친 세상에서 무궁무진한 소망과 기쁨의 원천이다.
2. 은혜에 조건은 없다
잘못된 동기, 올바른 행동
* 우리 죄가 아무리 깊숙한 곳에 뻗어 있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는 죄를 추월한다.
은혜에서 달아난 아이
* "아이들은 율법으로부터 달아나고 은혜로부터 달아난다. 율법으로부터 달아난 아이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은혜로부터 달아난 아이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은혜는 자녀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_ 스티브 브라운
3. 성과주의자는 은혜가 불편하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야
*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는 우리가 성취할 수 일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일 가운데 있다.
우리는 법에 중독되었다
* 복음은 우리가 속죄되고 율법이 성취됐음을 선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심판을 스스로 면해야 한다는 부담을 벗고 살아도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인 요구는 이뤄졌고 심판은 종결됐다. "이것을 해야 산다."는 내부의 목소리는 "다 이루었다!"는 외부의 목소리에 의해 지워졌다.
4. 율법을 바로 알면 은혜가 보인다
법의 열매는 분노와 반역과 탈진
*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죄를 없앨 방법이 없다." _ 마르틴 루터
도대체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
* 우리는 자신의 훌륭한 업적과 자랑스러운 성취조차 그 안에 죄의 얼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자신의 죄를 잊지 못해도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하나님을 만족시키셨다.
나는 날마다 기적이 필요하다
* 하나님의 율법이 절대로 변치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까닭은 우리의 발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우리의 진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 지심에 달려 있다.
5. 실패는 은혜를 빛나게 한다
허황한(게 아닌) 사실
* 하나님의 절대 사랑은 실패한 우리를 감싼다. 그리고 우리 실패는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우리가 느끼는 심판은 단지 느낌일 뿐,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우리는 남을 심판하고, 남들은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는 자신을 심판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절대 사랑이며 절대 사랑에는 끝이 없다. 이것은 최고로 기쁘고 감사한 소식이다.
6. 은혜를 경험할 때 새 삶이 시작된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착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없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
정직과 자유
*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은혜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영원한 변화
*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성취한다.' 율법은 선행을 지시하지만 선행은 은혜로만 가능하다.
7. 은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은혜와 개인의 정체성
* 하나님의 절대 사랑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람은 여론이나 자신의 견해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가를 평가하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며 기뻐하시는 자녀다.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은혜
* "스스로 의로움을 받아들이면, 성령이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자신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결정적인 일을 하시므로 우리는 자아에서 벗어나 오직 그분 안에서 살 수 있다." _ 오스왈드 바이어
* 우리가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을 선물로 받는다.
* 이 망가진 세상에서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은혜와 인간관계
* 우리는 자기 성과를 위해 가장 저급하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상대를 이용한다.
은혜는 조작할 수 없다
* 복음은 성취보다 용납이 먼저고, 공로보다 은혜가 먼저라고 선언한다.
* 사람의 행동에서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모든 변화의 뿌리에는 절대 사랑이 있다. 사랑은 미운 오리도 백조로 만들어 준다.
* 율법은 사랑하라 명령하지만 복음은 명령대신 그를 사랑한다.
은혜로 자라는 아이들
* 제 권리만 주장하는 아이들을 고마움을 아는 어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은혜밖에 없다.
8장. 은혜는 모든 것을 뒤집어버린다
스톡홀름 증후군
* 당신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결코 상할 일이 없다. 잘했든 못했든 당신의 행동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완전히 의롭다고 여기신다.
* 하나님을 위해 아무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하고픈 마음이 들 것이다.
9장 은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은혜는 방종을 부추기는가?
* 조건 없이 죄인을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품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구도 진심으로 순종할 수 없다. 칭의의 메시지는 곧 성화의 메시지다.
* 율법이 말한다, 이루면 삶을 얻을 것이다. 은혜가 말한다, 다 이루었으니 삶을 살아라.
법을 지키거나 어기거나
*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율법주의자라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는 율법주의자다.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받고(피동적인 의) 사랑을 실천한다(능동적인 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한다.
* 피동적인 의가 말하는 건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의가 말하는 건 이웃에게 우리의 선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열쇠는 호주머니에 있다
* 예수님이 이루신 일 덕분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칭의, 인정, 의미, 안전, 자유, 자격, 사랑, 정의,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도 우리는 예수님보다 하찮은 수천 가지 속에서 그것들을 찾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자주 들어야 한다. "열쇠는 네 호주머니에 있다."
10장 예수의 은혜로 충분하다
* 복음은 예수님께 매달리라는 명령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약하고 우리가 아무리 실패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약속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인생이란 실패를 완벽하게 만회하시는 하나님의 성공 연대기다.
녹초가 된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
*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한 후 복음에서 떠나게 하는 게 아니라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의 대속을 선포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점화하는 불꽃이자 연료다.
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우리의 선한 면은 나쁜 면 못지않게 해롭다. 어쩌면 더 해로울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더 강해지고 유능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약하고 무능하다는 사실과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이 강하고 유능하시다는 진리를 더 깊이 인식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짜' 정체성
*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 성도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공존할 수 없다. 죄인이든지 성도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다.
*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성취가 아닌 그리스도의 성취, 우리의 장점이 아닌 그분의 장점, 우리의 업적이 아닌 그분의 업적, 우리의 승리가 아닌 그분의 승리에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죄가 아닌 그분의 대속으로 확고부동하다.
종교 가게 폐업
* "종교가 시도(하고 실패한)한 모든 것을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단번에 완성하셨다." _ 로버트 케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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