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기 때문인지,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치열한 이슈가 된 제(諸) 문제에 대해 능동적인 참여보다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특히 동성애 문제는 나날이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데 반해 한국교회는 극단적인 정죄나 외면으로 일관해 왔다. 동성애는 일종의 문화 트렌드가 아니다. 인류의 생성 이래 계속되어 온 문제이다. 동성애는 주어지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인간의 문화유산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회복시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1) 동성애에 대한 문화비평적 이해 - 김종걸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종교철학
2) 동성애, 새로운 문화로의 변신 - 이요나 목사/ 갈보리채플 서울교회
3) 동성애에 대한 바람직한 기독교적 접근 - 안명준 교수/ 평택대학교 조직신학
4) 동성애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처 - 이경직 교수/ 백석대학교 기독교윤리학


2000년 연예인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 등으로 동성애 문제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또한 <왕의 남자>, <브로크백 마운틴>, <메종 드 히미코> 등의 영화가 동성애 코드를 사용함으로써 흥행에 도움을 얻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동성애 문제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깊이 있는 반성과 이론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즉흥적인 것으로 보인다.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 이후 한국교회도 동성애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동성애 문제에 대해 성경적이고 체계적인 대답은 찾기 어렵다. 한국교회 안에 커밍아웃을 선언한 기독교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교회 안에 동성애 기독교인이 없다는 보장은 없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밝히지는 못하지만, 교회 안의 상담소나 가까운 신앙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동성애 기독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동성애자가 없다고 여기든가, 아니면 동성애자가 있더라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실정이다. 동성애가 죄라는 총론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에 들어가서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고, 그래서 동성애자가 교회 안에서 커밍아웃하는 것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미국교회도 에이즈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동성애를 반박하기보다는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기독교 동성애자들이 교회 안에서 홍석천 씨처럼 커밍아웃을 한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물음은 매우 긴박한 물음이다.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서양의 사조와 문제가 시간 차이를 두고 한반도에서 반복되었음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교회는 몇 십 년 전부터 동성애 문제로 고민해 오고 있다. 미국에서 동성애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교단과 교파를 분열시키는 뜨거운 감자이다.

미국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숨죽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성직에 임명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미국 장로교회는 ‘동성애연구위원회(Task Force to Study Homosexuality)’를 설치하여 1978년 총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위원 다수가 동성애자 안수에 찬성했다. 하지만 총회는 그와 반대되는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미국 장로교회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미국교회의 상황

미국교회 분열의 예를 하나 들자면, 1996년 1월 13일 미국서부침례교회(American Baptist Churches of the West) 총회 회원들은 네 개의 지교회를 탈퇴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교회들은 동성애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교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교회들은 기독교의 사명이 동성애자를 돕는 것뿐 아니라 동성애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논란은 동성애를 보는 시각의 변화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동성애를 개인의 죄로 여기다가 점차 일종의 질병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동성애자를 보다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최근에 우리 사회는 동성애자를 창조 질서에 맞지 않게 태어난 사람으로 여겨서, 개인의 책임보다는 구조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동성애 문제는 서방 교회의 거의 모든 교파에서 주요 문제가 되었다. 동성애는 교회의 권위 문제, 성의 본성, 성의 목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동성애자들은 교회의 거부에 좌절해서 스스로를 위한 신학을 시작했다. 그들은 레즈비언과 게이로서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서 기독교의 관계신학이라는 모델을 제시한다. 보스웰에 따르면, 동성애자는 교회의 아웃사이더지만, 기독교에서 처음 200년 동안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가 뛰어난 인사이더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초기 기독교가 이성애적 결혼 외에 동성애 결혼도 하나의 결혼 형태로 인정했다고 보고,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사람들은 1250년부터 정치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동성애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잘 보여 주듯이, 동성애 문제가 사회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문제가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때이다. 최근 논의의 중심도 동성애 자체가 옳은 것이냐에 있기보다 동성애자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동성애자가 서로 결혼해서 한 단위의 가족을 이룰 수 있으며 자녀를 양육할 권리를 지닐 수 있는가 등의 문제가 한 가지 예이다. 기독교와 관련해서는 교회 공동체가 동성애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화합과 일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일제시대 신사참배 문제가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듯이, 이제 다시 동성애 문제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적용하는 일이 더더욱 필요하다.

교회는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미국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 물음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한편의 사람들은 교회가 동성애를 완전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동성애와 복음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한기연(한국기독교청년학생연합회)이 2004년 6월 18일 이화여대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현경 교수(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는 교회 안에서 동성애 문제가 강요된 침묵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할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성이 선택이기도 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금지 구절이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여기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규범이라고 보면 성경만큼 무서운 책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성경 해석의 권위는 인간의 삶에, 인간의 가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에게 성경은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한에서만 의미 있으며, 인간의 가슴으로 동의되는 한에서만 권위를 지닌다. 이는 성경에 대한 그녀의 시각을 잘 드러내준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동성애자를 비난하며 배격한다. 동성애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성공회가 2005년 2월 21일부터 25일까지 윈저보고서를 다룬 관구장회의를 개최하고, 2003년 미국 뉴햄프셔 교구에서 게이 주교를 서품한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웨스트민스터 교구의 동성 혼인 축복 예식을 거행한 캐나다 성공회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네트워크인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인 ‘Civil Partnerships Act’ 조항을 일부 인정한 영국 성공회 대주교 회의의 진술서에 대해 반발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교회가 보기에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기독교루터회 이홍열 총회장이 동성애자 허용안을 통과시킨 미국 루터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ECLA)를 비난하면서, 미조리 시노드 루터교회는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성서적 해석과 적용의 문제

이런 이견이 있을 때 교회는 동성애에 대해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 우선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정확하게 읽어내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그 구절을 성경 전체 및 과학과 사회 등의 상황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구약 말씀을 오늘날의 상황에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적용해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동성애 논의는 구약과 신약 본문에 나타난 동성애 언급에 대한 논의에 그치지 않는다. 논의의 전면에는 동성애가 있지만, 논의의 배후에는 성경의 권위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많은 경우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동성애 금지를 밝히는 성경 말씀을 피하기 위해 문화적 상대성을 내세워서 성경 말씀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부정하려 한다. 우리는 특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문화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편타당하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교회는 성경의 근본 원리를 포기할 수 없다. 성경이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된다고 가르친다면, 우리는 동성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인격적 변화를 추구하라고 도전해야 한다. 또한 동성애가 죄임을 인정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동성애자에게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성애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서 동성애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대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죄가 아니라고 규정하거나, 사소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는 모든 죄인을 향해 열려 있다. 동성애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동성애 행위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죄인이 거듭나야 하듯이 동성애자도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을 경계해야 한다. 교회는 동성애 행위에 동의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간통과 간음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음하거나 간통한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적대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