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 5.18 민주화운동
1. 5.18 민주화운동의 배경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태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민주화의 바람을 억누르던 유신체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합니다. 그와 함께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이 커졌지만, 박대통령의 서거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역할이 커진 군부에서는 또다른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10.26을 수사하게 되면서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차관급 회의까지 주재하는 등, 자신의 권한을 뛰어넘는 월권행위를 하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대립하게 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끝내 정 총장이 10.26 당일 궁정동 안가에 있던 사실을 이용하여 이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재가도 없이 강제 연행하고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군을 장악하는 12.12군사반란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민주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야 정치인들이 직선제 개헌과 대선을 준비하고 학생들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민주적인 헌법이 만들어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니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국민의 열망과는 달리 신군부는 꾸준히 권력 장악을 추진하였고,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은 계엄해제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1980년 5월 15일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집결하였으나 군과의 충돌을 우려한 당시 학생 지도부의 결정으로 이 날의 시위는 철회됩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그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이틀 후인 5월 17일 밤, 군 병력이 중앙청을 장악한 가운데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당시 야권지도자였던 김대중 前 대통령이 구속당하고, 김영삼 前 대통령도 가택연금 당하는 등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대거 연행당하는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굴하지 않는 저항이 광주에서 시작됩니다.
2. 5.18 민주화운동의 진행
계엄확대와 함께 대학가에도 군이 진주하면서 광주에서도 수십 명의 대학생이 연행됩니다.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며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흩어진 학생들은 광주역 앞에서 재집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금남로 일대에서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출소에 투석하는 등 경찰과 대치, 충돌하였습니다. 군과 경찰은 시위를 한 학생들을 골목까지 뒤쫓아가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구타하고 차에 태워 어디론가 싣고 가버립니다. 이는 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분노하게 만들어 광주의 시위는 강경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산됩니다.
시민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강경진압에 맞서 군경과 대치하며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 대부분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고, 20일 밤에는 시외전화가 두절됩니다.
5월 21일,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던 이날,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습니다. 전남도청 앞에서 군과 시민이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습니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 중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하고,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어지는 외곽도로를 차단합니다.
계엄군의 철수로 광주는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되었지만 결코 무질서하지 않았습니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되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었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시민군의 활약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5월 22일에는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합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르는 가하면,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습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습니다.
한편, 5월 18일에 발발한 일들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민주화운동은 확산되었습니다.
상황 수습을 위하여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이 나선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지만, 신군부가 장악한 계엄사의 무성의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제진압의 뜻을 굳힌 계엄군은 결국 5월 26일 새벽,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습니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하고,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군이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어 작전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5.18 민주화운동도 막을 내립니다.
3.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예편 후 대통령이 되고,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역시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은 5.18 민주화운동을 구심점으로 협력하면서 민주화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지고, 이것이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집니다. 이때의 시위에는 대학생들은 물론이고,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던 일반 직장인, 소위 넥타이 부대들까지 가세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직선제 개헌을 성취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뿌린 민주화의 씨앗은 7년 후 6월 항쟁으로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그 후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그 때 민주화 운동에 나선 분들이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되어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 유네스코는 5.18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여 5.18 민주화운동의 기억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인류에게 있어서 소중한 유산으로 길이 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임시공휴일인 선거일을 그냥 노는 날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민주적인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으며, 5.18 민주화운동은 4.19혁명과 함께 민주화 과정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이때 희생당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32주년 5.18 기념식이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립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진 못할지라도,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 분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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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2권
김삼웅 <해방 후 양민 학살사>
김재흥 <군>1,2권
황석영 <5.18 그 삶과 죽음의 기록>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출처: https://mpva.tistory.com/1727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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