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현대사회를 일러 정보사회라고 한다. 성공하려면 남보다 정보에 앞서야 한다는게 상식처럼 되어 있어서 갖가지 정보매체가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보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던 건 현대인 만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의 우리 선조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들은 조보(朝報)라는 일종의 신문을 발행하여 정보의 전달매체로 삼았다.
매일 발행된 조보
조보란 조정의 소식이란 뜻이다, 기별, 기별지, 저보라고도 불렸다 조보가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때부터 있었다고도 하나 오늘날 기록에 남아 잇는 것은 조선 중종때부터이다. 조보는 매일 오전 발행되었다. 발행처는 승정원,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오늘날의 비서실과 비슷한 곳이다,. 왕의 명령이 모두 이곳을 거쳐 나오고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 상소문등 갖가지 문서가 이곳을 거쳐 왕에게 전달된다. 그러니 승정원에서 발행되는 조보는 민간신문이 아니라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이다.
조보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우선 승정원에서 기사를 수집한다, 소식원은 승정원에 들어오는 온갖 문서정보들이다. 그 중 어떤 기사를 싣고 뺄 것인지는 승정원에서 결정하여 선별된 기사를 일정 장소에서 발표한다,. 발표장소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혹자는 조보소라고 하고 혹자는 조방이라고 한다. 발표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각 관청에서 나온 담당관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기별서리라 부든다, 기사가 발표되면 기별서리들은 그것을 재발리 손으로 베껴쓴다. 필사하는 것이다. 한글이 아니라 한문, 한문이되 보통의 초서보다도 더 빨리 흘려쓰는 독특한 서채로 썼다. 이것은 아마도 빠른 시간내에 베껴쓰기 위해 서였을것이다. 이 독특한 서체를 기별체라 했다. 기별체는 한문을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도 익숙해지기 전에는 읽기 어려웠다, 한문이지만 이두식 표현과 이문식 표현이 섞여 있었다. 이문이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체를 말한다. '알았다'를 '지도(知道)', '어떤사람'을 '심인(甚認)', 무명을 백목(白木)으로 표시하는것이 이두식 표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보다, 기별서리들은 조보를 각자의 소속관청으로 갖고 가서 필요한 수만큼 더 필사하여 산하관청에 내려보낸다. 이대 산하관청으로 조보를 전달하는 역할은 기별군사가 맡았다. 그러면 산하관청에서는 필요한 수만큼 또 필사하여 배포한다. 이렇듯 조보는 여러번 필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누가 필사했느냐에 따라 내용과 체제가 조금은 달라지기도 했다. 배포할 때에는 봉투에 넣지 않은 채로 받을사람이 누구인가를 적었다. 이름을 적는것이 아니라 '소안동댁' '정동'이라는 식으로 동네 이름이나 직책을 암포처럼 표시했다.
서울의 독자들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매일 조보를 만들어 받아 보고 지방의 독자들은 경방자를 통해 받아보았다. 경방자란 지방관청의 서울 주재원에 소속된 연락원이다, 지방의 독자는 5일분 또는 10일분을 한꺼번에 기록한 조보를 받아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왕이 볼 조보는 흘려쓰지 않고 특별히 또박또박 정서했다. 이 일만 맡아보는 관리가 따로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보는 무료가 아니라 오늘날의 신문처럼 구독료를 받았다. 고위관리는 매달 4냥, 하급관리는 1냥 5전 이런 식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발행되는 호외 ‘분발’
조보에는 어떤 내용의 기사가 실렸을까? 왕의 명령이나 지시사항, 관리의 승지ㄴ, 해임, 취임, 사신파견,휴가, 병가, 사망등 인사와 동정, 관리나 유생들이 왕에게 올린 상소 또는 건의사항과 그에따른 왕의 대답, 각종 보고서의 요지, 각 지방의 농사현황, 날씨등이 실렸는데 특히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우량과 첫서리 내린 날은 반드시 실렸다. 세종때 측우기를 만든이래, 전국의 관청은 뜰에 측우기를 설치해 놓고 수령이 직접 강우량을 재서 서울로 보고해야 했다,
그밖에도 ‘헤성이 나타났다’,’달에 점이 생겼다’ , ‘네발과 네날개를 가진 병아리가 태어났다’ 등등의 천재지변이나 특이한 자연현상이 실렸다. 이런 기사에는 천재지변의 원인이 인륜을 어기고 정치를 잘못하기 대문이라는 논평이 덧붙여졌다.
한편 시간을 다퉈 아려햐 할 소식은 다음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호외를 발행했다. 이을 분발이라고 했다. 한 예로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공주를 낳았을때 그 소식은 즉시 분발로 아렬졌다. 분발은 하루에도 몇번씩 발행되는 적이 많았으므로 아예 각 관청마다 호외를 전담하는 분발서리, 분발군사를 따로 두었다.
분발외에도 조보를 보완하는 정보매체가 여럿 있었다. 관리인사 소식만을 알리는 정사, 왕엑ㅔ 올리는 각종 건의, 진정, 청원문 내용만을 따로 자세히 알리는 소차, 과거합격자 소식을 알리는 방지, 왕과 고위관리들의 정기 정책회의인 차대에서 의논된 내용을 알리는 차대거조, 조보에 실리지 않은 소식을 주로 모은 녹지등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관료층의 정보욕구가 얼마나 왕성했고 그를 총족시키기 위한 정보매체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감탄스러울 정도다, 게다가 상소의 내용은 물론이요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최고위 정책회의에서 토론된 내용까지 공개하는 조선 조 정치풍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정사에는 관리임용후보자 명단과 낙점자까지 공개되었다. 정보의 종류에 따라서는 왕이 특별히 게재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국방이나 군사김리에 관련된 s내용, 외교문제를 일으킬지 모를 사항등은 조보에 내지 ㅁ라라고 왕이 명령했다.
세계최초의 활판 인쇄 일간 신문??
그런데 왜 조보는 인쇄하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베껴 썼을까? 당시 조선의 발달된 인쇄술로 보아 충분히 인쇄할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정보통제에 있었던 듯하다.
조보의 독자는 한문을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소수의 식자층이었다. 왕을 비롯해 서울에 사는 고위 관리들 전국 각지의 관리들, 양반들을 통틀어 조보를 받아보는 독자 수는 대략 수백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조보를 인쇄했을 때 일어나는 정보의 대량유통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양반관료들끼리는 충분한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지만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나가는 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조보를 인쇄하여 팔다가 큰 곤경을 치른 사람들이 있었다. 1577년 선조때 서울 사는 식자들 30여명이 조보를 활판인쇄해서 구독료를 받고 팔았다. 필사한 조보보다 읽기 편하고 돈만 내면 누구든 사볼수 있었으므로 아주 반응이 좋았다. 두어달 후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이 대노했다. 조보는 본래 구독료를 받는 것이었으므로 돈 받고 팔았다는 것은 함부로 정보를 유출시켰다는 데 왕이 분노한 것이다.
“조보를 간행하는 것은 사국을 사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만일 외국으로 흘러나간다면 나라의 잘못을 선전하는 일이다.”
왕의 분노는 매우 컸다. 결국 조보를 인쇄했던 사람들은 의금부로 잡혀가 모진 매를 맞고 귀양을 가야했다, 이들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신원은 알 수가 없다. 관련 기록들이 임진왜란 틈에 모두 불타 없어졋기 때문이다. 이 사건후, 조보를 인쇄하는 일은 일절 금지되었다.
신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선조때의 인쇄조보야말로 활판인쇄로 된 세계최초의 일간신문일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에서 처음 나온 활판인쇄 일간신문이 1650년 독일에서 간행된 것이고, 중국에서는 1638년 명나라때 처음 나왔으니 이보다 7,80여년 앞선 것임에 틀림없다.
근대신문의 원형, 조보
우리나라에서 신문다운 신문이 등장한 것은 개화기때 서양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바꿔야 할 것이다.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 똑같지는 않지만 휼륭한 원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이라 일컬어지는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주된 소식원은 바로 조보였다. 수백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발행되던 조보는 1894년 갑오개혁때 폐간되었다가, 이듬해 관보라는 이름을 달고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재등장하였다. 관보는 지금도 매일 발행되고 있으며, 발행처는 행정자치부이다.
-한국사 뒷 이야기에서 발췌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