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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이디 아민 기행

by Ddak daddy 2017. 2. 12.

출처 - DREAMISNOWHERE - | 사랑한다
원문 http://blog.naver.com/nigger84/50016895629

 


이디 아민(Idi Amin Dada Oumee, 1928년 5월 27일 ~ 2003년 8월 16일)

 


집권 하기 전

농부의 아들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의 제압에 참여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6년에 아민은 대통령 무테사를 거세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쿠테타와 집권

1971년 1월 25일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다.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이로 이디 아민은 잔인한 아프리카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행동을 미화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았다.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은 국영화되고,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의 인구를 잃게 되었다. 1975년 그는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몰락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1일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탄자니아 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 결국 사우디 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고,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 http://ko.wikipedia.org

 

 

 

 

다른글:

 

 포레스트 휘태커가 <라스트 킹>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는 했지만, 포레스트 휘태커라는 배우에 대해, 수상의 계기가 된 영화 <라스트 킹>에 대해, <라스트 킹>의 소재가 된 실존 인물 이디 아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혹시나 논술을 준비하는 청소년이라면, 이번 기회에 현대사와 상식을 보충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라고 불리는 이디 아민은 특유의 잔혹함과 독재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962년 우간다는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했는데, 이때 총리가 이디 아민을 포함한 군세력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의 권력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971년 1월25일, 기회를 노리던 아민은 대통령이 된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영국연방 수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 사이, 군사를 움직여 정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유명한 종신 대통령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그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오보테의 지지 세력이었던 3천명의 장교와 1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해했고, 1971년에 대통령과 군사령관, 1975년에는 육군 원수, 1976년에는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10만~30만명의 우간다인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엽기적인 고문방식으로 악명을 낳기도 했다. 우간다의 민족주의자와 탄자니아 군대가 1978년 10월 우간다를 침공했다. 침공군이 1979년 4월13일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들어갔을 때 아민은 그 도시에서 도망쳤다. 처음에는 리비아로 피신했다가 끝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한 뒤 2003년 8월16일 사망했다.

 

출처 : 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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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 킹'때문에 이 동물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참고: 이디 아민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 - 이디 아민은 자신의 정부가 자신의 아이를 낙태시키자, 팔과 다리를 절단한 후 다리는 팔의 자리에 붙이고 팔은 다리의 자리에 붙였으며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어 입에 물게 하였다.

 

독재자의 두 얼굴
ONLY DVD | <라스트 킹>
2007.06.14 / 조형주 기자 

라스트 킹 ㅣ The Last King of Scotland
케빈 맥도널드 ㅣ 포레스트 휘태커, 제임스 맥보이, 케리 워싱턴, 질리언 앤더슨 ㅣ 2006년 ㅣ 121분 ㅣ 출시사 20세기 폭스


갓 의사시험에 합격한 스코틀랜드의 젊은이 니콜라스 게리건(제임스 맥보이)에게 세상은 만만한 곳이다. 방자한 치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게리건은 지구본 위에서 무작정 찍은 나라 우간다로 향한다. 새로운 모험에 들뜬 게리건은 기차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의료봉사를 위해 만난 동료의 아내에게 연정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젊은이의 달뜬 마음은 방향을 잃기 쉽기 마련. 그는 우연히 이디 아민(포레스트 휘태커)의 손목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아민의 주치의가 되고 고급 아파트와 신형 차의 유혹에 빠져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민의 신경증은 날로 더해지고 그의 폭군적인 면모를 접한 게리건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스코틀랜드의 왕’은 우간다의 정권을 잡은 후 이상 징후를 보이던 이디 아민이 ‘지구 위 모든 생명체의 전능자’와 더불어 스스로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의 괴벽스런 성격 때문인지, 이디 아민 만큼 무시무시한 괴담에 시달린 독재자도 없을 것이다. 1971년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지 8년 동안 30만 명의 사람들을 숙청하고 살해한 아민은 주변국들로부터 식인, 잔혹행위, 매독으로 인한 정신질환 등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루머인지 모를 이야기에 시달렸다. 1998년 질스 포든이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 <라스트 킹>은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허구가 혼재됐다. 아민과 반군의 대치와 정치적 학살, 우간다 경제의 큰 타격을 입힌 아시아인 대추방과 같은 역사적 배경은 허구적 인물인 의사 게리건과 시선에 의해 재조명된다. 우간다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 게리건은 상냥하고 위트 있는 장군과 반대 세력의 테러에 전전긍긍하는 신경쇠약의 남자를 모두 목격한다.

서플먼트의 인터뷰에서 포레스트 휘태커는 “내가 아민의 옷을 입고 병원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그 만큼 휘태커는 권력자의 위태로운 카리스마를 공포스러우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라스트 킹>의 이디 아민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외부인의 시선에서 응시되는 역할임에도 불구,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다가도 문득 싸늘해진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휘태커를 통해 보여지는 것 이면의 감정들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상대역의 제임스 맥보이는 포레스트 휘태커에 대해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아민의 광기를 연기할 땐 무섭다”고 말했을 정도. <라스트 킹>은 포레스트 휘태커의 훌륭한 연기와 함께 실제 우간다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촬영된 장면들을 통해 아프리카의 아름다움과 열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기인, 이디 아민

쿠데타 후 이디 아민은 눈에 띄게 말이 많아지고 변덕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을 포함한 스스로 지은 몇 개의 별명은 지나친 자기 수사로 가득하다. 이디 아민의 기행은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1971년 초기에 아민은 자이르의 마부투 대통령과 함께 아프리카의 주요 수원의 하나인 알버타 호수와 에드워드 호수의 이름을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바꿔버렸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잔인한 독재자와 위트 있는 사람을 오가는 이디 아민을 묘하게 우스꽝스런 인물로 간주하곤 했다. 1977년에 발행된 ‘타임’ 매거진은 이디 아민을 “살인마 그리고 광대, 관대한 익살꾼이자 활개 치는 독재자”라는 표현으로 묘사했다. 집권 말기인 1977년, 영국이 아민과 맺은 외교관계를 청산하자, 그는 영국을 물리쳤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CBE(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즉 ‘영국의 정복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각종 루머와 전설의 주인공이 된 이디 아민은 기괴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변모, 아민의 잔혹함에 초점을 맞춘 (1980) 등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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