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 박평의와 왜장 사야가 |
박평의
생애 및 활동사항
1598년 정유재란 때 왜장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 번주(藩主:제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붙들려갔다. 도공의 리더였던 박평의는 당초 상륙했던 히오키(日置)군 구시키노시마비라(串木野島平)의 거친 땅에서 가마를 만들어 도기 제조에 들어갔으며 5년 후에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재의 히가시이치기초(東市來町))로 이주하였다.
도기 제조에 적합한 양질의 흙을 찾아 사쓰마번 내를 주유(周遊)한 끝에 마침내 기리시마(霧島)산 중, 이부스키(指宿), 가세다(加世田) 등에서 백토(白土), 약석(藥石), 참나무 등을 발견했다. 이로써 색이 순연(純然)하여 질이 고아(高雅)한 것을 만들어 번주에게 진상하였다.
박평의는 뛰어난 진상물에 크게 기뻐한 요시히로로부터 세이에몬(清右衛門)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나에시로가와의 초대 촌장(庄屋)에 임명되었다. 그는 47세 때 마을 동산에 옥산궁(玉山宮)을 짓고 추석이면 마을사람들과 함께 바다 건너 한국을 향하여 고려병(高麗餠)이라는 콩이 섞인 시루떡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 뒤, 손에 손을 잡고 춤추며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나오는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부르며 조국과 조상을 회상하였다.
옥산궁터 앞에 ‘사쓰마도기창조박평의[薩摩陶器創造朴平意]기념비’라고 쓴 그의 묘비가 있는데, 이 기념비에는 <그는 침식을 잃고 고뇌하면서 멀리 산야를 누비다가 마침내 백토를 발견했다. 그 흙으로 도자기를 구웠더니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그릇이 만들어졌다. 그는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는 환희로 몸둘바를 몰랐다. …(중략)… 그때부터 도자기를 굽는 집들이 수백호가 되었으며 사쓰마도자기의 이름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1941년 도죠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외상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의 본명은 박무덕으로 박평의의 후손이다.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
임진왜란 이 기나긴 전쟁에 이면에는 미쳐 전하지 못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출신에 장수 사야가 김충선이다! 선조 신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인물들에 이름이 적혀 있는데요 그중에 아주 낯선 이름들이 있었어요 사야가, 평구로, 상혀문, 요질기 이런 이름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바로 일본에서 우리 조선으로 귀순한 항왜출신 왜군들이었어요.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사야가였죠. "임진년 4월 일본군 우 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군 절도사 각하게 글을 올립니다. 이번에 일본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저를 선봉장으로 삼았으나 저는 조선과 싸울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에 소원은 이 나라에 예의 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에 나라에서 성인에 백성이 되고자 하는 따름입니다." 사야가는 이와 같은 항서를 경상 우병사 박진에게 바치고 조선에 투항했다. 그런데 일본군 선봉장에 중책을 맡고 있는 그는 왜 조국을 버리고 조선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사야가가 귀순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조선에 예의범절과 풍속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조선 백성들에 모습에 감동한 사야가가 귀순을 결심했다는 것이죠. 그 밖에도 일본군에 잔인한 만행을 보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투항을 결심했다는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야가는 조선에 건너 오자마자 곧바로 투항을 합니다. 애당초 그는 출병 전 부터 귀순을 결심하고 있었단 예기죠. 사야가 :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선언했을 때 대부분에 일본 장수들은 이 무모한 전쟁을 내심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불행히도 이 전쟁에 가장 적극적인 찬성 파였던 가토 기요마사에 부장이었습니다. 결국 선택에 여지가 없었던 것이죠 사야가에 귀순 사연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조선으로 투항한 후 실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에 조총 기술을 전수해서 전쟁에 양상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야가는 그 밖에도 울산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임금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사야가에게 다음과 같은 포상을 내렸다.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가선 대부를 재수하고 또한 김 씨 성을 하사할 것이니 이제부터 일본인 사야가가 아니라 조선인 김충선으로 부르도록 하라!"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왕조에 충성을 다했다. 인조 임금에 시대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직접 참전해서 또다시 큰 공을 세웠는데 일선에 따르면 당시 이괄에 부장이었던 맹장 서아지를 단 일격에 제압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충선에 활약을 승정원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야~ 명장 김충선 사람됨이 아주 용맹하고 출중할 뿐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괄의 난 때 도망친 왜인들을 추포하는 일을 모두 이 사람한테 맡겨가지고 힘들지 않게 해결했으니 이 진실로 가상하다 할 수 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병자호란, 정묘호란에 참전해 노익장을 불태웠던 김충선은 그 후 울옥동으로 낙향해서 72세에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자신에 호를 딴 모하당집 남겼다. 일본에서는 한때 사야가에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폄하했었는데요 하지만 최근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고등학교에 검정 교과서에는 인도주의자였던 사야가에 이야기가 실렸고요, 공영방송 NHK에서는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에 무장이란 타이틀로 사야가에 다큐멘터리가 방송돼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무릉리에는 현재까지 김충선에 후손들이 남아 그 자랑스러운 혈통을 이어가고 있지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배경에는 이렇듯 조선인 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항왜 출신 장수 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 이름 바로 김충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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