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과 왜곡과 진실
1. 링컨
역사적 인물의 실체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처럼 전쟁과 같은 역사적 격변기를 살았거나 그의 카리스마가 오늘에까지 강렬하게 이어지고 있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그에 관한 책은 무려 1만6천권이 넘게 나왔다고 한다. 링컨의 실체를 감싸고 있는 안개층의 두께를 짐작케 한다.
링컨은 어린시절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그가 살던 지역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고액의 납세자였다.
링컨은 젊은 시절 어린 소녀(창기?)와 부적절한 관계로 성병(매독)에 걸려 오랜 세월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그의 몇몇 자녀들이 어린시절 죽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링컨이란 이름은 남북전쟁, 노예해방, 게티스버그 연설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위인전으로만 그를 접했다면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일으킨 미국 근대사의 위대한 영웅이다. 좀더 그를 읽었다면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면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간, 소신과 지략을 겸비한 정치 9단의 면모를 봤을지도 모른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자 놀랍게도 인종을 차별하고, 인권과 헌법을 짓밟으며 독재를 일삼는 한편 시민의 부를 빼앗아 소수 대기업에 몰아준 정치 책략가에 가깝다. 그는 초기 건국자들의 민주주의 이념 대신 연방독재체제를 확립하고 자유시장 경제 대신 보호경제의 기틀을 닦아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부패의 늪으로 빠뜨렸다.
‘노예해방의 아버지’란 링컨의 왜곡된 신화이며 링컨은 1854~60년 사이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견해를 14차례나 밝혔다고 한다. “흑인과의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은 공상적인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노예제 폐지론자와 내내 대립했다. 1863년 그가 발표한 노예해방 선언은 북군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일부 남부 지역에만 적용됐으며,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고 여자와 아이들만 있던 이들 지역에 노예 봉기를 일으켜 당시 불리한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제가 있던 세계 수십개 나라에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노예제가 평화롭게 종식됐는데도 오로지 미국만이 62만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전쟁이란 폭력적 방식으로 노예제 종식을 거친 것은, 링컨의 진짜 속셈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링컨은 보호무역, 국립은행을 통한 연방정부의 화폐 통제, 철도·선박·운하·건설업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지급 등의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신봉했다. 당시 남부는 인구는 북부보다 적었지만 세금은 70% 이상 부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높은 세율에 반대해 연방에서 탈퇴하려는 남부연합을 노예해방을 구실로 무력 진압했다는 것이다. “링컨은 통합되고 집중화된 국가, 즉 제국을 창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링컨은 연방 탈퇴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을 무시하는 한편 북부에 계엄령을 선포, 자신을 비판하거나 전쟁을 반대한 언론인과 기업인, 시민 수천명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링컨 집권기간 동안 ‘미국의 바스티유’라고 불린 뉴욕 라파예트 요새에 1만3천명의 정치범이 구금됐다. 특히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남부 민간인에게 저지른 만행과 초토화 작전에 대한 묘사는 20세기의 숱한 ‘미국의 전쟁’의 원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링컨의 유산은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패권 추구, 경제적으론 미국식 자본주의 형상으로 오늘날 미국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링컨 사후 그의 전기가 1만권이 넘게 나왔으니 그의 생애가 왜곡되고 미화되어 오늘날에 링컨의 전설이 생겨난 것이리라
링컨은 과연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었을까? 정답은 No 다.
링컨은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 미국에서 불신자나 마찬가지였었다.
2. 록펠러
록펠러(1839-1937)는 석유왕으로 역사상 최고 부호로 손꼽는 인물이다.
19세기 중엽에 냄새가 고약하고 연기가 많이나는 석유를 분리중류하면
가스 나프타 가솔린 등유 윤할유등 다양한 물질을 얻을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사업 가능성을 확인한 록펠러는 정유사업에 뛰어들어 " 스탠다드 오일"사를 설립했다.
이후 그의 사업 방식은 효율성과 잔인성을 겸비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때로는 순전히 경쟁자들을 축출하기위해 원가아래로 가격을 낮추어 타 정유사들을 잡아먹었다
특히 1870년대 공급과잉으로 석유가격이 폭락하자 그는 흔들리는 경쟁사들을 모조리 사들였다
1882년에 이르러 40여개의 독립적인 기업들을 모아 독창적인 기업결합을 결성했다.
이처럼 정유산업을 독점적으로 지배한후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다.
그러면서 입법부를 매수하고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했다.
그런 그가 미국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된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생이 바뀐것은 불치병으로 1년이상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다
최후 검진을 받기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는 병원로비에 걸린 액자를 보았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성경구절을 보았다. 그때 엄청난 전률을 느꼈다 한다.
어느 소녀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고 그소녀가 나았다 했을때 감격했다고한다.
교회도 세우고 자선사업도하면서 시카코 대학도 세웠다.록펠라재단도 세웠다.
작금의 교회강단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록펠러가 십일조를 잘해서 부자 되었다 하면서
록펠러를 예화로 많이 사용한다. 그는 처음엔 악덕 기업인에 속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과 방법도 선해야 하거늘 무조건 십일조만 잘하면 복받는다는 설교는 설득력이 약하다
록펠러는 유대인이다. 모든종교는 궁극적으로 같고 기독교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미국뉴욕 유니온신학교를 도왔다. 미국뉴욕 리버사이드교회는 록펠러가 세운교회이다.
한때 리버사이드교회는 한국불교의 선승을 불러서 미국의 승려들과 함께 교회안에서 법회를 열기도 했다
기독교계는 충격이었다. 록펠러가 세운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록펠러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꾸며낸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록펠러는 유엔본부 땅을 기증했었다. 세계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회원이며
비밀단체 빌더버그회원이었다고 한다.
뉴에이지 무브먼트인 새시대운동과 다원주의를 표방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록펠러재단과 연관성이 있다.
보수적 기독교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카톨릭도 유대교도 이슬람도 불교도 힌두교도
기독교도 목적은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의 선과 인도요가가 관심을 끈다.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한국불교의 종정이 초청되었다.
유일성이 생명인 기독교가 다원주의에 흔들리고있다.
다원주의를 지원하는 록펠러재단을 한국의 정통보수교단들은 흠모하고 설교시간에 홍보한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십일조만 많이나오면 교회운영에 좋으니 록펠러의 십일조 예찬론이 갈채를 받는다.
이젠 그만하자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장땡인가? 천주교도 유대교도 버린 십일조를 붙들고
몸부림하는 기성교회들이여 다원주의 배후의 영을 분별하고 깨어나라
3. 이순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년 이상 수군을 준비하여 수전에 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지 한 두달만에 전쟁이 일어나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원균은 겨우 10척의 군선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여러차례 전령을 보내어 연합작전으로 왜군과 싸우자고 하였으나 이순신은 각자 관할이 다르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연합작전을 지시했기에 이순신은 마지못해 원균과 연합하여 옥포 해전에서 적선 50척 중 26척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가 끝나고 원균은 이순신에게 조정에 전승보고 장계를 올리자고 했으나 이순신은 나중에 전공을 모아서 보내자고 말하여 원균은 이순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뒤로 밤을 새워 단독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모든 것이 자신의 전공인 것처럼 장계를 올린 것이다. 그 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원균은 그 휘하 장수의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전에 원균과 이순신이 연합함대를 형성하기 전에 이순신은 부하들을 보내어 원균 관할의 남해 현진에 불을 질렀다. 전라좌수영 군사들이 아군의 진영에 방화를 한 것은 왜군들이 몰려오기 전에 아군 진영의 식량과 시설을 불태워 적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조치였다고 하지만 남해현은 원균의 관할로서 조치를 취해도 원균이 알아서 조치할일 이었는데 이순신은 엄청난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다. 또한 이순신의 군사들은 남해현의 현감 기효근이 그의 휘하 군사들과 함께 진영을 비운 사이에 방화를 한 것이었다. 그후 현감 기효근은 한동안 진영 재건과 식량 조달에 무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는 이순신이 원균을 더욱 어렵게 만들려고 획책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순신은 도제찰사 이원익이 부하들을 시켜서 부산 적굴(왜영)을 소화한 사건을 때마침 부하로부터 보고 받고는 스스로의 공이라고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은 거짓 장계를 올린 것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원균이 12살난 소실 자식을 군공이 있다고 올려 상을 받게 하였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가 이덕형의 현지 조사로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했음이 드러났다. 사실 원균의 아들이 당시 12세가 아닌 18세로 궁마와 무술이 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은 조정에서 여러 번 독촉하여도 적을 치러 출동하지 않았으며(여기에는 왜군 장수 소서행장과 첩자 요시라의 간계가 있었다.) 임금을 대신하여 세자가 현지에 내려가서 불렀음에도 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하옥된 것은 원균의 모함 때문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지만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한 것이 정설이며 선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이순신의 죄명은 다음과 같다.
1.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2.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3.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4.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오늘날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반면,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한 자로 악인으로 지탄 받고 있는 실정인데 이는 이순신이 전사한지 51년 후인 인조왕 때에 이순신의 후손인 이식이 집권 세력인 서인의 비호 속에 반대파인 동인 세력이 기록한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였기에 이식은 그의 조상 이순신의 기록을 왜곡 미화한 반면에 이순신의 경쟁자인 원균에 대한 기록은 깍아 내린 것이었다. 또 이순신의 영웅화에 한몫한 것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이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이순신은 더욱 더 우상화되었다. 성웅 이순신으로.. 그러나 이순신도 세상에서는 한 시대를 살다간 나약한 한 사람이었으며, 국난을 당하여 적군을 무찌른 전공도 있었지만 경쟁자를 모함하는 권모술수가 이기도 했다. 어느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굉장한 인격자였다고 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종교는 어떠했을까요?
미국 역대 대통령의 종교
1대 조지 워싱턴 (1789~1797) - 성공회
2대 존 애덤스 (1797~1801) - 유니테리언
3대 도널드 제퍼슨 (1801~1809) - 이신론(deism, 理神論)
4대 제임스 메디슨 (1809~1817) - 성공회
5대 제임스 먼로 (1817~1825) - 성공회
6대 존 퀀시 애덤스 (1825~1829) - 유니테리언
7대 앤드류 잭슨 (1829~1837) - 장로교
8대 마틴 맨 뷰런 (1837~1841) - 네덜란드 개혁교회
9대 윌리엄 헨리 (1841~1841) - 성공회
10대 존타일러 (1841~1845) - 성공회
11대 제임스 포크(1845~1849) - 감리교
12대 제커리 테일러(1849~1850) - 성공회
13대 밀러드 필모어(1850~1853) - 유니테리언
14대 프랭클린 피어스(1853~1857) - 성공회
15대 제임스 뷰캐넌 (1857~1861) - 장로교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1861~1865) - 종교중립
17대 앤드류 존슨 (1865~1869) - 무종교
18대 율리시스 그랜드(1869~1877) - 감리교
19대 러더피스 헤이스(1877~1881) - 감리교
20대 제임스 아브라함 가필드(1881~1881) - 그리스도 제자 교회
21대 첵스터 앨런 (1881~1885) - 성공회
22대 그로버클리브랜드(1885~1889) - 장로교
23대 벤자민 해리슨 (1889~1893) - 장로교
24대 그로버 클리브랜드(1893~1897) - 장로교
25대 윌리엄 매킨리 (1897~1901) - 감리교
26대 데오도어 루스벨트(1901~1909) - 네덜란드 개혁교회
27대 윌리엄태프트(1909~1913) - 유니테리언
28대 우드로우 윌슨 (1913~1921) - 장로교
29대 워런하딩 (1921~1923) - 침례교
30대 캘빈 쿨리지(1923~1929) - 조합 교회
31대 하버트 후버 (1929~1933) - 퀘이커교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1945) - 성공회
33대 해리 트루먼 (1945~1953) - 침례교
34대 아이젠하워 (1953~1961) - 장로교
35대 존 에프 케네디 (1961~1963) - 천주교
36대 린든 존슨 (1963~1969) - 그리스도 제자 교회
37대 리차드 닉슨 (1969~1974) - 퀘이커교
38대 제랄드 포드 (1974~1977) - 성공회
39대 지미 카터(1977~1981) - 남부 침례교
40대 로널드 레이건 (1981~1989) - 그리스도 제자 교회
41대 조지 하버트 부시(1989~1993) - 성공회
42대 빌 클린턴 (1993~2001) - 침례교
43대 조지 워커 부시(2001~2008) - 감리교
44대 버락 오바마 (2008~ ) - 그리스도 연합 교회
*링컨은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광"이란 목사가 그런 엉터리 같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 그래도 신앙심이 있었던 인물은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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