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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세톤과 이스라엘 독립의 비밀 / 하임 바이츠만

by Ddak daddy 2016. 4. 17.

아세톤과 이스라엘 독립의 비밀 / 하임 바이츠만

 

서프라이즈 397 100103 아세톤의비밀

 

 

 

이스라엘사

하임 바이츠만

[네이버 지식백과] 하임 바이츠만

 

 

하임 바이츠만

 

하임 바이츠만(1874∼1952)은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시온주의 기구의 의장을 역임한(1920∼1931, 1935∼1946) 바 있는 과학자였다. 그는 1874년 11월 27일, 러시아 핀스크 근처의 모텔이라는 마을에서 목재상을 하는 오제르 바이츠만의 15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서와 히브리어 문법을 배웠으며, 11세 때 그가 남긴 편지에서, "왜 우리는 우리를 연민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무덤이나 제공하는 유럽의 왕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영국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온으로 가야 한다. 유대인이여, 우리 함께 시온으로 가자!"라고 쓰고 있다.

그는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핀스크에서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어렵게 되자, 1892년에 독일로 건너가 다름슈타트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그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시온주의 지성인들 - 나흐만 시르킨, 레오 모츠킨, 레빈 등 - 을 만나게 된다. 그 때는 시온주의의 이념 논쟁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로써, 유대 민족주의의 문화와 정신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던 때였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1898년 제2차 회의에는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에 그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첫 화학 특허품을 발명하여 팔기도 하였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27세 되던 1901년에 제네바 대학의 조교가 되었다.

그의 삶은 학문과 시온주의 운동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곧 시온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헤르츨이 외적인 노력, 즉 창조적인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는 것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 외교적인 노력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헤르츨이 오스만 제국 정부로부터 허가장을 얻기 위해 유럽의 고관들을 만나러 다니는 동안, 그와 그의 동료들은 히브리 문화를 선전하였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Eine juedische Hochschule」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신적 본부 및 과학적 보루가 될 히브리 대학을 세울 것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국가만이 아니라 문화적 중심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03년, 우간다 논쟁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운동에 균열이 생기자, 그는 사실상 헤르츨의 반대 입장에 섰다. 1904년,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과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는 헤르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1905년에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확대 상임 위원회의 위원에 선출되어, 시온주의 운동에 보다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베라 바이츠만과 결혼하였다.

 

 

밸푸어

1906년에 그는 우연히 당시 영국 외상이던 아서 제임스 밸푸어를 맨체스터에서 만나,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밸푸어는 늘 시온주의자들이 왜 우간다 제안을 거부하였는지에 관하여 수수께끼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혀 현실을 모르는 결정을 한 반(反)우간다주의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차였다. 밸푸어가 젊은 바이츠만에게 왜 우간다 제안을 거부했는냐고 묻자, 그는 밸푸어에게 "만일 내가 당신에게 파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런던을 포기하겠는가?"라고 되물었고, 이에 밸푸어는 "결코 그렇지 않다. 런던은 내 조국의 수도가 아닌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바이츠만도 "예루살렘은 런던이 늪지였을 때 우리나라의 수도였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밸푸어가 시온주의자들의 꿈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07년에 열린 제8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바이츠만은 정치적 시온주의자들과 실용적 시온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종합적 시온주의를 제창하여, 그동안의 갈등을 하나로 연합하는 작업을 이룩하는 데 주축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는 맨체스터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1914년에는 하이파에 세워진 공과 대학(Technion)에서 독일어 대신 히브리어로 강의하도록 하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히브리어가 당시에 과학을 위한 언어로는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으나, 유대인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독일어 강의를 적극 반대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바이츠만을 유대 역사의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 옮겨 오게 하였다. 적어도 1916년까지 바이츠만은 영국 정부 내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얻어 내지는 못하였다. 영국이 시온주의를 지지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영국이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다. 즉, 미국 대통령 윌슨의 친구이기도 했던 대법원장 브랜다이스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미국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의 손에 넘겨주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바이츠만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영국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전쟁 초반, 독일이 우세할 때도 그는 이러한 예견을 바꾸지 않았다. 스위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기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Manchester Guardian」지의 편집장이며, 동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비극과 팔레스타인에로 향한 그들의 메시아적 꿈에 관해 바이츠만으로부터 많은 설명을 듣고 시온주의에 끌려 들어왔던 스콧은 바이츠만에게, 당시의 재무 장관이었던 로이드 조지를 만날 것을 권하였다.

1915년 1월, 바이츠만은 헤르츨 시대에 시온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로이드 조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바이츠만은 "그는 매우 종교적인 분이었다. 그와 당시 다른 동료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결코 꿈만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믿고 있었으며, 시온주의는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하나의 사상이라고 말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힘을 얻은 바이츠만은 외무 장관 그레이와 「Manchester Guardian」지의 군사 평론가인 허버트 시데보탐 등과 연쇄 접촉을 통하여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17년, 몇몇 영국계 유대인들과 의회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국회 의장 조지와 외상 밸푸어는 그 해 11월 2일,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이야말로 유대인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 선언은 유대인을 위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이었다. 이 선언이야말로 국제법이 시온주의자들의 꿈을 처음으로 인정해 주는 사건이었으며, 2000년 동안 잃어버린 조상들의 '약속의 땅'을 다시 찾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가장 위대한 외교적 업적'이라며 바이츠만의 역할을 평가하고 있다.

 

 

 

밸푸어 선언문

1918년,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시온주의자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앞으로의 정착과 국가 발전을 구상하며, 그 계획을 추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 알렌비 장군은 그를 환대하였으나, 영국 총독부는 바이츠만의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아랍 민족주의의 세력이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츠만은 즉각 아카바로 건너가 아랍 민족주의의 대표인 에미르 파이살을 만났다. 이때, 영국 정부는 아랍 대표에게 그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이 아닌 시리아나 이라크 쪽에 독립 국가를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하였다. 파이살은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는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파이살은 시리아나 이라크에 있는 그의 연맹들로부터 그와 같은 결정에 동의를 얻어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이츠만에게 이 약속을 취소할 것을 통보하였다.

1920~1930년대에 바이츠만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일하였다. 그는 1921년에 열린 제12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새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몽테피오리(유대 종교적 민족주의자)나 울프(반시온주의 단체인 '공동 위원회'를 이끄는 저널리스트)가 적극적으로 시온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유대교를 '추상적인 종교 원리를 수집해 놓은 종교'라고 보았고, 또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 사람들의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온주의 운동은 잘못된 이상주의자들의 오도된 헛된 꿈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계 유대인들로서, 외교계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무서운 적들이었다. 또, 인도의 외무 장관이었던 몬터규도 내각 안에서 시온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 의회 내에서 유일한 유대인 의원으로서, 밸푸어 선언에 관한 토의에서 유대인을 오직 종교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위한 정치적 독립을 강하게 반대하였던 사람이었다. 시온주의가 지나치게 유대인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세속적인 운동이라는 것이 이들이 시온주의 운동을 반대하는 이유였다. 바이츠만은 이들과도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공리와 원칙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울프는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평등권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이민갈 경우에 그들이 살게 될 도시와 마을에 완전한 편의 시설까지를 요구하였다. 이들과의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영국 정부 안에는 대체로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 팔레스타인 건설을 반대하는 정치가 또는 고관들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를 위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과, 다른 하나는 전반적으로 시온주의 사상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이 영국 보호령이 되려는 계획에 끼어들어 책임을 지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 일을 프랑스나 미국과 함께 협의하는 안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 외교, 군사 전문가들을 팔레스타인이 영국 제국의 방위에 중요한 지역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로이드 조지는 친시온주의 정책가의 대표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05년, 그의 도움으로 맨체스터에서 시온주의 지도자를 처음으로 만난 밸푸어도 또 다른 지원자였다. 이때,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가진 독특한 애국심을 알게 되었으며, 왜 유대인들이 우간다로 가는 것을 거부하였는지를 이해하였다고 회술하고 있다. 1915∼1916년에 두 번째로 그를 만난 바이츠만은, 영국이야말로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집을 짓겠다는 유대인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후원자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를 잘 아는 측근들에 따르면, 밸푸어는 강심장을 가진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타고난 냉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츠만과 그의 생각에 관해서는 늘 경의를 표하였다. 또, 밸푸어는 성서를 살아 있는 실제라고 믿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임 바이츠만 (이스라엘사, 2007.9.12, 미래엔(구 대한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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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이었던 하임 바이츠만(1874∼1952) 교수에 의해 발명된 이 아세톤은 뜻밖에도 이스라엘의 독립에 큰 역할을 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바이츠만은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겠다는 신념이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원래 유태인은 팔레스타인지역의 주민이었다.
예수가 탄생하여 성장할 무렵에 당시의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군사들에 의해서 조국 땅에서 쫓겨난 후,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이나 긴 떠돌이생활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태인들은 다른 인종과 피가 섞여갔고 그들의 언어까지도 잃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늘 마음의 준비를 하며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태민족이 나라를 되찾은 일과 아세톤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세톤은 여러 가지 물질을 녹이는 액체로 쓰이고 있다. 특히 소총의 탄환이나 폭약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양의 아세톤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밀폐된 용기 속에 나무를 넣고 끓여 증발되는 증기를 모아 아세톤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아세톤은 아주 적은 양에 불과했다.
적은 양의 아세톤이라도 만들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지만 영국에는 나무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한편, 1914년에는 프랑스가 중심이 된 연합군과 독일ㆍ오스트리아 등이 주축이 된 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무렵 바이츠만은 인조고무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탕에서 인조고무를 만들기 위한 세균을 찾고 있던 바이츠만은 우연히도 설탕을 아세톤으로 변화시키는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그는 연구 끝에 박테리아를 이용하여 이소아밀 알코올(설탕을 발효시켜 에틸 알코올을 만들 때 소량의 불순물로 생기는 것)과 같은 박테리아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은 이소아밀 알코올이 아니라 아세톤과 부틸 알코올의 혼합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바이츠만은 인조 고무연구 대신 우연히 발견한 아세톤의 제조방법을 더욱 활발히 연구했다.
전쟁이 온 유럽으로 확산되자 아세톤은 폭약제조용으로 많은 양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바이츠만은 녹말을 설탕으로 만들고 박테리아를 이용해 다시 아세톤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박테리아를 바이츠만은 '클로스테리듐 아세트부틸아민'이라고 불렀다.
바이츠만은 자신이 개발한 아세톤의 대량제조방법을 영국의 육군성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로 아세톤이 부족하지 않았던 육군성은 바이츠만의 보고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아세톤의 원료인 나무는 아예 수송될 길이 막혀버렸고 탄약은 떨어져갔다.
그제야 바이츠만은 영국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나무 대신 밀과 보리ㆍ감자 등의 곡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뽑아낸 녹말을 당으로 바꿔 다시 아세톤을 제조한다는 바이츠만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을 만난 바이츠만은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아세톤의 양이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양에 미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의 군수품위원장이었던 로이드 조지를 만났다.
그의 협조로 대규모 아세톤공장을 세운 바이츠만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온 옥수수로 대량의 아세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의 U보트가 출현했고 옥수수의 해상운송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아세톤의 생산을 중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바이츠만은 생각 끝에 소년들로 하여금 밤을 모아오는 운동을 펼치게 했다. 밤의 녹말을 쉽게 당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후 영국은 아세톤의 원료가 풍부한 미국과 캐나다ㆍ인도 등지에 대규모 아세톤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바이츠만은 아세톤에 대한 연구문제로 각계의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특히 벨푸어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바이츠만은 벨푸어와의 대화 도중 유태인 문제를 거론했고 벨푸어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이츠만 박사, 이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면 예루살렘을 당신의 민족에게 되돌려 드리겠소."
바이츠만은 이 같은 벨푸어의 말에 크게 놀라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체를 돌려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당장 바이츠만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군수품위원장 조지가 수상이 되고 조국해방의 빛이 보이더니 마침내 1917년에는 '밸푸어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은 되찾은 조국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새로이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염원해 온 대로 그들의 말과 글로 그들의 역사를 가르치고 공장을 세우고 흙을 일구며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1948년 아세톤발명하여 조국을 찾는 데 큰 힘이 된 바이츠만은 유태인의 새나라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출처 : 알파와 오메가
글쓴이 : 알파와 오메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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