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배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의 예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요한계시록 에는 예배 용어 ‘프로스키내인’이 스물네 번이나 사용되고, 요한계시록 메시지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 단어는 대부분 하늘의 거민들이나 이 땅에서 구원 받은 이들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은 전체적으로 신자들의 책임을 배경으로 예배신학이 제시된다.
거짓 종교의 유혹 - 요한계시록 책은 1세기의 독특한 사회적 역사적 정황과 씨름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도전을 준다. 먼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잘 나타나듯이,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헬라-로마 세계의 문화적, 종교적 요구들과 갈등이었다. 요한은 이방 사회와 타협하거나 동화할 위험을 경고하며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것은 1세기 후반 로마인들에게 강요되었던 황제 숭배 종교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황제 숭배의 도전 - 줄리어스 시저 시절부터 로마 황제들은 제물, 분향, 행진, 사제, 찬양과 환호 등으로 신을 경배하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황제는 일반 사람과는 격이 다른 존재로, 이들이 정복한 다양한 지역 신들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졌다. 요한은 황제 숭배에 참여하는 것을‘바다에서 나온 한 짐승’에게 예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짐승은 권위를 사탄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짐승을 예배하는 자들만 오른손 혹은 이마에 표를 받고, 제국 안에서 물건을 사고팔 자격이 주어졌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경제적 제재나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다.
두 종류의 예배자 - 요한계시록의 주제 중에 하나는 참 예배와 우상 숭배의 구별이다. 요한은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누어, 큰 용과 짐승을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는 자로 분류한다. 이 두 예배자 그룹의 차이는 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두 환상에서 잘 나타난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상은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 사회에 닥칠 심판을 상징한다. 이어 예루살렘의 환상(계 21:9~22:9)을 통해 미래에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이 거하는 도성에서 경험하게 될 것들을 보여준다. 요한의 묵시에 따르면‘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인간이 무엇을 따르는지를 보여주는 예배를 가운데 놓고 벌어진다. 사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몰아간다.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부름 받음 -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4). 본문의 의미는 분명하다. 이 땅에서 짐승을 예배하지 않은 이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늘 예배에 같이할 것이다. 이어서 요한은 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이미 강조했던,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배의 갈등을 상기시킨다.
영원한 복음 - ‘영원한 복음’ 은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을 창조자, 역사의 주인, 모두의 심판자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4장의 환상과 천상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권능’ 을 받으실 자격이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자인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창조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에게 합당히 경배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 백성의 제사장적 역할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희생을 통해, 만백성 중에서 자기 백성을 사시고, 이들을 ‘하나님을 예배할 나라이자 제사장’으로 삼았다. 구약에서처럼, 구속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요한의 계시에 나오는 제사장적 역할은, 특히 곧 오실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이 있다. 그 때가 오면 죄를 짓고 타협하려는 유혹도 모두 사라진다. 하나님 백성이 지금 이 자리에서 드리는 찬양과 섬김은, 그동안 그렇게도 고대하던 완성된 ‘새하늘과 새땅’을 미리 맛보는 기회다. 요한은 모든 우상 숭배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뒤,‘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부른다. 이런 정황에서 볼 때, 이들 구절은 기독교 예배를‘매일의 삶 속에서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하늘의 예배 - 하늘 궁전은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복종과 경배를 실천함으로써 예배하는 곳이다. ‘프로스키내인’과 동사 ‘피프태인’ 혹은 ‘프로스 키네수신 애노피온 수’와 계속 같이 등장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제시된 예배는 단순히 머리를 숙이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가 보여주는 그의 성품과 목적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창조자 하나님께 찬양 드림 - 찬양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배경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대한 절대 주권을 드러내고, 모든 생명이 그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함을 알려준다. 하늘 보좌를 배경으로 하는 찬양은 하나님의 보다 위대하고 강력한 왕권을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큰 복을 인정하고, 모든 적들이 무너질 마지막 때를 소망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어린 양의 주권은 이 땅의 통치자들의 허풍과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뛰어나다. 왕 중 왕이며 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광은 어떤 사악한 모방도 비교될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자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양 -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하나의 예배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천사들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과 같은 종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천사를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면서도, 예수의 예배를 막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찬양 - 어린 양이 인을 떼어 이 땅을 향한 일련의 심판을 시작하면, 열방의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계 7:9~10) 한편 천사와 장로, 네 생물은 얼굴을 땅에 엎드리고 또 다른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구약 성경의 소망과 약속의 성취에 대한 찬양 - 요한의 묵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늘의 존재들이 구약의 약속과 소망을 성취하는 것을 선포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경배와 찬양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도 예시되거나 혹은 조금씩 드러난다. 찬양과 경배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혜택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하늘과 땅의 연결점 - 요한의 묵시에 등장하는 송영, 탄성, 찬양의 찬송들은 오랫동안 많은 기독교 찬양과 예배 서식에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 때문에도 그랬기 때문에, 가장 손쉽게 교회의 필요를 위해 차용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확인 - 하늘의 예배가 표현하는 근본적인 신학적 메시지는 다른 신약 성격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요한은 독자들에게 마지막 시대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미 도래했음을 증거 한다. 또한 이것을 근거로 인내와 신실함, 거룩한 삶으로 살 것을 촉구한다. 요한의 목적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을 잘 지키고, 우상 숭배와 배교의 유혹을 모두 이겨 내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주권과 어린 양의 승리를 강조하는 찬양 자료들은 원독자들에게 원했던 바를 이루는 데도 매우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늘의 예배를 같이 나눔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하더라.”(계 22:7) 같이 모여‘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 읽혀지는 것을 듣고 토론하는 장면은, 원독자들에게도 같은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쓰인 것 같다. 이러한 예언을 듣고 모임 안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은, 탄성과 찬양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양하는 것은 신자가 보여야 할 중요한 모습이다.
결론 - 구약의 약속은- 구약의 약속은, 이제 메시야에게 속한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의 완전한 성취를 기다리며,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에 대항하여 굳게 서서,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신실하게 증거 할 때, 하나님만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이루는 그날이,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온전한 승리를 이루실 그날이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들에게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도구로 이용하도록 격려한다.
요한계시록 전체에는 예배로의 부름(계 1장), 죄의 점검(계 2-3), 말씀을 가져옴(계 4:1-8:1), 말씀봉독 및 설교(계 8-13장), 봉헌(계 14:1-15:5), 성찬(계 15:6-19:10), 행진(계 19:11-22:21) 등의 예배의 요소를 상징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프랭클린 M. 지글러’박사는 그의 저서인‘예배학 원론’에서“예배는 사람의 발명이 아니라 신적(神的)인 제공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교제로 자신을 제공하시고 사람은 이에 응답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고 또 사람으로 오셔서 산 제물로 희생하셨다. 계시록에는‘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주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이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주님과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계시록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예언을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이 된 모든 성도들은 우리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온 세상에 건설하도록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삶이 예배이며 예배가 삶과 같아야 된다.
*참고도서: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본 예배신학], 데이비드 피터슨 지음, 김석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