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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by Ddak daddy 2018. 4. 12.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isy)는 1900년대 초반과 중반의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인종과 계층의 벽을 넘어서 어떻게 사람들이 정을 주고받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진정한 친구가 되어 가는지를 무리 없이 보여준 영화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칠십대가 된 돈많은 과부이자 전직 여교사인 미스 데이지가 운전을 하다가 실수로 후진을 하면서 차를 위험하게 박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대목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하녀 이델리아의 눈앞에서 차는 망가져서 견인을 당해갔다. 늙었지만 곱고 품위 있고 꼬장꼬장한 미스데이지는 아들이 운전사를 고용하라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이 운전을 못할 만큼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엄마를 위하지만 몹시 바쁘기도 한 사업가인 아들 불리는 운전사로 호크라는 나이든 흑인을 고용해서 어쨌든지 엄마가 위험하게 운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아들이 돈을 내고 붙여준 운전사가 사사건건 못마땅한 미스데이지는 운전사 호크를 사사건건 구박한다. 그러나  넉살좋게 그 구박을 받아가며 자신의 차에 미스데이지를 태워야하는 사명을 가진 운전사 호크의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태도는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따뜻하게 해준다. 결국 호크의 끝없는 설득과 어떤 구박도 웃으며 견디는 태도에 넘어가게 된 미스데이지는 육일 만에 호크가 운전하는 차를 타게 된다. 작전에 성공하여 신이 난 호크가 전화상으로 미스데이지의 아들인  불리에게 보고를 하면서 한말,

"육 일만에 성공했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것과 같은 시간인 꼭 육 일만에 나도 목표를 모두 이루었단 말이네."

이 영화는 1940년대 아틀란타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시절에 전형적인 남부 주인 아틀란타는 흑백차별이 엄연했던 곳이다. 노예제도는 폐지가 되었지만 흑인은 공공장소를 이용할 수 없었고 백인과 함께 먹을 수도 없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차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명백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아닌 그저 그 시절을 그리기 때문에 끼워 넣어진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대목들이 미국 사회에서 늘상 들어오던 흑백차별이란 정치적 이슈를 강도 높게 전하는 대신 생활속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그 장면을 스스로 소화할 자유를 준다.

이를테면 식사하는 대목이 그렇다.
하녀 이델리아가 죽고 난 후 이집에는 미스 데이지와 호크밖에 없다. 둘이 거의 모든 일상을 친구처럼 함께 하게 되는데 그래도 미스 데이지는 자신의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호크는 부엌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한다. 먹는 음식은 결국 미스데이지가 요리를 한 같은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영화는 메시지를 높이지 않는다. 그냥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식사를 마치고 또 나머지 일상을 함께 한다. 이 장면은 왠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니 백인과 흑인이라고 단 둘이 있는 집에서 따로 따로 식사를 하다니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바보 같은 짓인가 하고 핏대를 올리게 되지 않는다. 자신이 요리한 닭고기를 스무 명은 앉아도 남을 것 같은 커다란 식탁에서 조용히 혼자서 식사를 하는 미스 데이지에 대한 연민이 먼저 생기게 된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백인이고 부자이지만 내면적으론 자신의 운전사인 호크에게 마음을 의지하여 외로운 일상을 이어가는 늙고 약한 영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모든 것을 가진 괴팍한 기득권층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그런 감정은 여기에서 생겨날 수가 없게 한다.

한편으로 호크는 늙고 가난한 흑인이지만 마음이 담백하고 즐겁고 너그러운 사람이어서 운전사라는 겉껍질을 벗기고 보면 그는 오히려 받는 사람이 아니고 주는 사람에 해당한다. 까다롭고 괴팍한 미스데이지를 마냥 받아주며 언제나 대화를 만들어서 이어나가고 눈이 와서 길이 얼고 전기가 나가도 얼음길을 운전하여 따뜻한 커피와 도넛을 아침으로 사서 혼자 눈에 덥힌 집에 갇힌 미스데이지를 돌보아 준다. 주인과 운전사, 가진 자와 없는 자, 백인과 흑인이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별 의미가 없어진다.



또 무척 인상적인 장면은 하녀 이델리아가 죽고 다음 장례식 장면으로 고집 센 유태인인 미스데이지와 호크씨가 흑인교회에 참석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 나오는 찬송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죄짐 맡은 우리구주"이다.  합창과 솔로가 섞인 이 찬송가가  솔직히 이 영화 속에서처럼 멋있게 들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솔로가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시원하고 힘차서 음색이 폐부를 찌른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같다. (혹시 누가 음악을 링크 시키려면 꼭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 있는 그 찬송을 찾아다 붙여 주시면 좋겠다) 또 한국과 영문의 구조상 이 찬송가의 뉘앙스가 약간 차이가 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말로는 "죄짐맡은" 이 먼저 나와서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영문에서는 "좋은 친구인 우리구주"라는 대목이 먼저 나온다. 이델리아가 갑자기 쓰러지고 나서 다음장면은 바로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하는 대목이 흑인 영가 스타일로 나오는 것이다.

영화는 논문이 아니다.
정치적 슬로건도 아니고 성경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진리의 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아픔을 보여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제공하기도 하며 감동을 주기도 하고 우리를 재미있게도 해준다. 이 영화는 그냥 배경이 유쾌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한편 읽는 기분을 주는데 그 서정시 속에 조각그림 같은 정치적 시대상들이 낮은 목소리로 끼워져 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면서도 따로 식사를 하는 장면 속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저녁만찬에 호크와 함께 가고 싶지만 차마 함께 가자고 말을 못하고 당일 날 빙빙 돌려 말하는 미스 데이지의 태도에….

그러나 사회적 구별을 넘어서서 인간 개개인이 대면하는 삶의 고독함이 더욱 원초적인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사랑과 우정을 쌓아가는 데에는 영혼을 열게 하는 어떤 따뜻함 같은 것 이외에 별로 필요한 것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가족들과 함께 오늘 저녁에 약간 훈훈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사오십년 전의 일상들이 영상을 통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옛날의 향수에 젖는다. 내용도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 영화가 십대인 울 아들조차도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만드는 이유는 대사가 재미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기 때문일까.

그리고 미국을 싸잡아서 모두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미워하는 분들도 찬찬히 생각하며 이 영화를 보아주기 바란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살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외로워하고…. 뭐 그런 것이다. 그 속에서 서로 한손을 내밀어 보기도 하고 그 손을 마주 잡아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미국 정부와 정계와 재계를 움직이는 몇몇 재력가들과 극우 공화당은 미워해도 되지만 대다수의 보통사람들까지 미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 대한 설명)

퓰리처상을 수상한 알프레드 유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지방을 배경으로, 보잘것없지만 스스로 자존심을 지켜 나가려는 흑인 운전사의 눈을 통해 부유하고 고집이 센 노부인의 삶을 보여준다.

1948년 여름, 미국 남부도시 애틀랜타에서 72세의 유대계 미망인 데이지 부인이 차를 몰고 나간다. 그녀는 전직 여교사이며 고집이 센 부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첫 운전은 이웃집 울타리를 망가뜨리는 사고를 내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며느리 폴로린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회사의 사장인 아들 불리는 난처한 입장에 빠진다. 불안한 불리는 어머니를 보험에 가입시키려고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거절당한다. 생각다 못해 불리는 운전사 호크 콜번을 고용한다. 호크는 강직하고 친절하면서도 주관이 뚜렷한 중년의 흑인이다.

그러나 데이지 부인은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겠다며 운전사의 시중을 거절한다. 어느 날 호크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나가는 데이지 부인의 뒤를 쫓아가자, 데이지 부인은 마침내 뒷자석에 올라앉는다. 1951년 크리스마스 날, 데이지 부인은 옛날 교사시절에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알파벳 교본을 호크에게 선물한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의 벽이 차츰 허물어진다. 1960년대가 되자 인권운동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유대인 교회가 파괴되는 등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된 호크가 데이지를 찾아온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전의 당당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한 그녀 옆에서 호크는 말동무가 되어 준다. 호크의 손을 꼭 잡은 채 '당신은 나의 오랜 친구'라고 말하며 데이지는 마침내 호크에게 마음을 연다. 얼마 후, 중년의 불리와 백발이 성성한 호크가 팔려버린 데이지의 집을 둘러본다. 지난 25년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추수감사절에 불리와 호크는 병원에 있는 데이지를 찾아간다. 손을 잘 쓰지 못하는 데이지에게 호크는 파이를 한 스푼씩 정성스럽게 떠먹인다.

제62회 아카데미상 9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라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또 제47회 골든글로브상에서는 최우수 작품상과 남녀 주연상을 받았으며, 제4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제시카 탠디와 모건 프리먼이 최우수 공동 연기자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데이지 부인 역할을 맡았던 제시카 탠디는 80세의 나이로 여우주연상을 받아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 글:장이슬


 

그리고,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영화로

인하여 더욱 유명해진 노래  " 달에게 부치는 노래 (Song to the moon)인데요,

이 노래는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 (Antonin Leopold Dvor'ak)의 오페라 루살카

(Rusalka)에 나오는 아리아로 이 영화에서는 목련꽃 화사한 정원을 배경으로 

데이지가 거실에 앉아 수를 놓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루치아 폽(Lucia Popp)이 부른 것으로서 화면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선곡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한 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리릭소프라노로 꼽혔던 루치아 폽은 1993년 11월 16일 향년 5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습니다.

황혼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그 황혼을 아름답게 맞이하려면 몸과 마음 모두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야

된다는 점을 요즘들어 절실히 느낍니다.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자세로

살아야 되겠다는 각오를 다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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