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룩,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폰 (Christoph Willibald von Gluck,1714 ~ 1787 / 오스트리아) 글룩은 바그너 이전의 최대의 오페라 개혁자로, 독일 파르츠령 바이덴방 부근 에라스바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산지기 직업을 이어받게 하려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서 프라하로 가(1732~6) 교회의 가수가 되기도 했고 무도장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며 고생 끝에 가까스로 일류 첼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제수이트 파 교회 합창단의 소년단원으로 음악교육을 받고, 1736년에 빈으로 나와 탁월한 재능을 로브코비츠 공으로부터 인정받은 뒤, 다시 메르치 공의 후원으로 이탈리아에 밀라노로 가서 4년간 유학하여 그곳에서 교향악의 선구자 중의 한사람인 산마르티니에게 4년간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1741년에 그의 최초의 가극 <아르타세>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한 것에 힘입어 계속 이탈리아 가극을 발표했으며, 모두가 성공을 거두어 훌륭하고 탁월한 음악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746년에는 런던으로 갔다. 1754년부터 약 10년동안 빈의 궁정 악장으로 있었으며, 이 때 제자였던 앙투아네트(비)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여러 해 있게 되었을 때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1748년에 빈으로 돌아와서는 처녀작 <아르타세>를 비롯한 많은 가극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여왕의 기극장의 악장이 되어, 로마 법왕으로부터 황금박차기사의 칭호를 받아 빈 가극계와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18세기에 있어서 오페라의 개혁자로서 글룩의 이름은 불멸의 존재이다.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헨델의 오페라에서, 오랜 파리의 생활에서는 라모의 오페라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빈에서 일을 했던 것이 그와 같은 성과를 얻게 한 것이다. 그의 오페라<알체스테>의 서문에서 '모든 예술에 있어서 미의 근본은 단순하고 간결한 것,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스스로 터득한 이상으로, 교향곡에 있어서도 이 원칙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이 당시에 그는 가극의 일대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작곡가가 작곡한 대로 노래되고 상연되는 가극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글룩의 시대까지는 인기가수의 마음에 들도록 작곡하지 않으면 가극의 상연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가극개혁의 또 하나의 목적은 극적으로 진실하고, 가사에 충실한 작곡을 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음악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개혁은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대본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시인 칼차비지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협력에 의한 첫 번째 작품이 1762년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였고, 두 번째 작품은 <알체스테>였다. 이 개혁은 빈의 청중들의 맹렬한 반감을 샀기 때문에 글룩은 1764년에 빈을 떠나 파리로 왔는데, 여기서도 반감과 음모로 그의 열의가 방해되었다. 마침내 파리 청중들의 취미를 정복하고 작곡가로서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글룩의 파리 체재는 1779년까지 15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에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그리고 그가 결정적으로 일거에 명성을 회득한 <타이루스의 이피게니아>의 2대 걸작이 발표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알맞는 음악의 작곡을 목표로 한 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양식을, 그 다음에 는 프랑스의 양식을 익히고 여기에 독일풍의 중후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배합함으로써 국제적인 오페라를 만들수 있었다. '글룩'은 초기에는 오페라 세리아를 주로 작곡하였으나, 1750년대의 오페라 개혁에 강한 자극을 받게 되어 시인 칼차비지 (Calzabigi, 1714 ~ 1795)와 합동으로 비앤나에서 1762년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1767년에는 '알체스테'를 상연하게 된다. 알체스테의 헌사에서 '글룩'은 지금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망쳐왔던 폐패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아름다운 단순성 을 찾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리아 가수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려는 고질적인 병폐들을 도외시하고, 서곡을 별개의 것이 아닌 극의 내용과 연관있는 오페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들었다. '글룩'은 또한 관현악을 극적 요구에 맞게 사용하며,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차이를 줄였다. 1780년에 빈으로 돌아가 악단의 거장으로서 평안한 만년을 보내다가 73세로 생애의 문을 닫았다. 대표작품으로 서곡<알체스터><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오페라<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있다 -----
O del mio dolce ardor bramato oggetto bramato oggetto L'aura che tu respiri alfin respiro alfin respiro
O vunque il guardo io giro Le tue vaghe sembianze amore in me dipinge il mio pensier si finge le più liete speranze e nel desio che così m'empie il petto cerco te chiamo te spero e sospiro ah~ O del mio dolce ardor bramato oggetto bramato oggetto L'aura che tu respiri alfin respiro alfin respiro
오 감미로운 나의 사랑
나의 그리운 사랑 그대 숨결 따라서 나도 숨쉬리라 어디를 바라보아도 아름다운 그대 얼굴 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상상에 잠기네 기쁨에 찬 희망으로 나의 갈망은 가슴에 가득차 그대를 부르네 기다리며 또 한숨 쉬네 오 감미로운 나의 사랑 나의 그리운 사랑 그대 숨결 따라서 나도 숨쉬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