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배경과 전개 과정 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까지 지속된 스페인 내전은 총 100만명의 인명을 앗아 갔으며, 20세기 초반의 가장 처참한 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전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몰았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의 출현을 야기한 세계 공황이 스페인 내전의 배경이다. 미국인들은 1929년 10월 24일을 `검은 목요일`로 기억하고 있다. 주가가 폭락하면서 월스트리트에는 주식을 팔기 위해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몇몇 투자가들은 절망감에 자살했다. 이미 구조화된 생산 과잉 상태가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 시장을 시들게 하고 미국 경제를 일대위기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두 극심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다. 역사상 악명 높은 독재자들이 탄생한 시기가 1930년대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이탈리아는 무솔리니를 선택했으며 일본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이 독재 정권들은 모두 영토 확장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하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를 점령하고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재무장에 나섰다. 그리고 동양의 일본은 1931년 만주 지방을 점령한다. 스페인에서도 파시스트 군부가 지휘하던 국민파가 제2공화정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왕을 퇴임시키고 스페인의 정치를 민주화로 이끌었던 제1공화정(1873-1874)은 내분과 군부의 개입으로 단명하고 곧 다시 왕정이 복구된다. 1920년대까지 스페인에서는 알폰소 8세와 리베라 장군이 결탁하여 독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 저항의 결과 1931년 1월 리베라는 퇴임하고, 4월에는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파가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다. 곧 국왕은 망명을 떠나고 공화제가 선포되는데, 이것이 제2공화정의 시작이다. 공화파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부터 온건 사회주의자 그리고 급진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갈등의 여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공동 목표가 비교적 분명했기 때문에 공화제 아래의 스페인은 획기적인 사회 민주화를 경험한다. 조세 제도가 형평성의 원리에 맞게 수정되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고 지역 자치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남부에서는 토지를 농부에게 분배하는 토지 개혁이 1932년부터 진행되어 지주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교회가 폐쇄되고 공교육에서 종교적 색채를 벗겨 냄으로써 종교 국가로서의 면모가 쇄신되었고 기득권층인 카톨릭 성직자의 입지가 크게 침식되었다. 이처럼 기득권층에게 집중되어 사회적 부와 권리를 전체 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공화제의 기본 목표였다. 1936년 2월 선거에서는 좌파인 인민 전선이 대거 당선되면서 공화정의 사회 개혁은 속도를 더한다. 이는 진보를 향한 의미 있는 조치였지만 사회 개혁을 저주하던 세력의 단결력을 높이는 결과도 낳아, 에밀리오 모라(1887~1937) 장군이 이끄는 국민파가 공화정을 뒤엎기 위한 쿠데타를 1936년 7월 18일 감행한다. 국민파의 지휘권은 곧 프랑코에게 넘겨지고, 이제 스페인은 일진일퇴의 지루한 내전을 견뎌 나가야 했다.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장기전의 큰 이유였다. 농촌 지역을 프랑코 세력이 장악하였고, 공화파는 마드리드를 비롯한 도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특정 정치 세력의 진지가 되었고 격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을을 점령한 세력이 바뀔 때마다 부역자 색출 작업과 처형이 뒤따랐다. 양 진영에 의해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공화파는 교회를 불살랐다. 이처럼 많은 민간인이 전투 과정 밖에서 희생된 것이 스페인 내전의 큰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 사태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 가족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내전의 당사자 공화파와 국민파는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군대와 탱크와 비행기를 파시프트 프랑코의 국민파에게 보낸다. 현재 많은 문헌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생리가 유사한 극우 세력을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무기를 시험하는 기회로 스페인 내전을 이용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에게는 스페인 지역의 옥답과 건물과 생명 등이 대단히 훌륭한 무기 시험장이었던 셈이다. 공화파는 소련의 지원도 받았지만, 50여 개국의 민간인들도 공화파에 큰 힘이 되었다. 스페인 공화정의 사회 개혁을 지원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단한 적개심을 보이는 전세계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든 것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나라로 달려간 젊은이들이 전세계에서 숨쉬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형태의 조직에 들어가 참전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조직이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이다. 국제 여단의 이름으로 약 4만 명의 다국적 젊은이들이 전투원으로 활동했으며, 2만명은 의료등 지원 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을 꾸려 전장에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스페인의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외국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도 많이 있다. <1984년>의 저자 조지 오웰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스페인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총을 들게되고, 국제 여단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싸웠다. 조지 오웰의 스페인 내전 경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책에 옮겨져 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희망>이라는 저서에서 참전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피카소도 작품을 통해 국민파를 고발하고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유화 <게르니카>는 1937년 국민파 또는 독일군의 폭격에 초토화된 도시 게르니카를 그린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람 중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원작자 헤밍웨이이다. 그의 동병 소설에는 스페인 내전의 전장을 열정과 투지로 누비던 열혈 청년 헤밍웨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로베르토가 헤밍웨이의 분신이라는 추론을 끌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로베르토도 헤밍웨이처럼,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정을 수호하고 파시스트 프랑코를 무찌르기 위해 이국땅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적대시하던 국민파에게 상처를 입은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져들었다. 엄밀히 말해서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사랑은 프랑코가 도발한 스페인 내전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고, 그들의 연애 감정에는 1930년대 스페인의 정치적 비극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패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스페인 내전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5년)이 그것인데,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서 개봉된 사실은 다행스럽지만 상당히 의외이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감독의 이념적 색채는 둘째치더라도 도무지 상업성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를 흡인하지는 못했어도 <랜드 앤 프리덤>은 소수의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경험이었다. 근본적 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나, 60년 전 사건이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설득하는 켄 로치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는 이 영화를 잘못 소화할 위험이 있다. <랜드 앤 프리덤>이 스페인 내전을 세밀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증보판쯤 될 것이라 본다면 부당하다는 것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오히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은 영화가 심어 준 상식을 뒤엎는다. 즉 스페인 내전이 악한 파시스트와 민주 세력 공화파의 쟁투였다고 믿는 이분법적 단견을 문제시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공화파 내의 이질적인 집단들이 서로 격한 갈등을 보였으며 그 내분이 결정적 화를 자초했다.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 데이비드 카는 영국 청년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 두고 스페인으로 들어선 데이비드는 전직 독일 빵장수, 미국 청년, 선원, 전직 하녀 등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데이비드처럼 아마추어지만 공화정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전사들이다. 간단한 군사 훈련 후에 데이비드는 POUM(Parido Obrero de Unido Marxista,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연합)이라는 정당의 민병대에 들어간다. 이 정당은 앞에서 말한 조지 오웰이 참여했던 조직으로서, 당시 공화파를 구성하고 있던 정치 세력의 하나이며 반스탈린주의가 그 특징이다. 또 다른 특징은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는 사실이다. <랜드 앤 프리덤>의 묘사를 보면 POUM 민병대에는 상명하복의 계급 구조가 없다. 지도자는 일반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되며, 의사 결정도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POUM이 신봉하던 민주주의의 전형은, 영화 속의 민병대가 한 마을을 접수했을 때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 낸 후 POUM 민병대는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켜 회의를 연다. 토지 소유 문제와 마을의 운영 방식이 의제였다. 몇몇 참석자들은 성급한 결정이라고 반대했으나, POUM 민병대와 마을 사람들은 토지 분배와 집단 농장 건설을 즉각 실시할 것이라고 결정한다. 당시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POUM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즉시 현실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궤변이며, 주민들의 민주주의적 자치의 경험은 총칼보다 더욱 위력적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다. 부상을 입어 마드리드로 후송된 데이비드는 POUM을 떠난다. 앞에서 말한 국제 여단이 데이비드의 새로운 소속 부대였다. POUM 민병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인 블랑카와 그는 마드리드에서 만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 데이비드의 이적이 분란을 낳는다. 블랑카는 스탈린의 지휘를 받는 국제 여단을 혁명 정신을 배반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반대로 데이비드는 POUM이 반파시스트 전선의 분열을 야기하는 세력이라고 맞대응한다. 결국 그들은 싸우고 헤어진다. 간밤의 다정한 기운은 사라지고 사상적 적대감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둘은 사상적 견해의 일치를 이루면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입장을 바꾼 이는 데이비드였다.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공화파 내의 무정부주의 세력 CNT와 국제 여단이 충돌하여 후자가 승리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데,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이 상황 속에 데이비드가 참여하도록 설정한다. 데이비드는 명백한 동지에게 총질하도록 강요하는 국제 여단 지휘부에 불만을 느끼게 된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거리를 걷던 한 시민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데이비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왜 당신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나. 단결하여 파시스트와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위계 질서가 강하고 조직화된 군대인 국제 여단에 환멸을 느낀 데이비드는 POUM 민병대로 되돌아온다. 그들은 보급품도 없이 힘겹게 적과 싸우는데 그들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었다. 공화파 내의 한 세력이자 국제 여단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식 정치 프로그램을 따르는 사회주의 군대가 POUM 민병대의 진지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총을 겨눈 채 POUM은 프랑코와 내통한 자들의 집단이며 불법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한다. 당연히 POUM 대원들은 저항했고 가벼운 충돌도 일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블랑카가 사회주의 군대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영화 내용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반파시즘 전선의 분열상을 보여 주며, 특히 내부의 적이 혁명을 배신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영화의 악역은 파시스트가 아니다. 비난의 칼날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랜드 앤 프리덤>은 단순한 스페인 내전 영화가 아니다. 과연 POUM의 전략이 옳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고무하는 계기인 것이다. 여기서 그 논쟁에 뛰어들어 켄 로치의 주장에 대해 타당성을 따지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켄 로치의 설명으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또 다른 시각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 사회와는 달리, 서구에서는 <랜드 앤 프리덤>을 둘러싸고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갔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는 스페인 공산당의 전 대표도 끼여 있었다. 한 매체(<Newsday>)에 실린 노인의 주장도 켄 로치를 논박했는데, 여기서는 그 노인의 주장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윌리엄 서스맨은 국제 여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참전 용사이다. 켄 로치의 주장대로라면, 스탈린의 지휘를 따랐던 반혁명 분자이자 공화파의 분열과 패배를 초래한 세력이었던 셈이다. 서스맨은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흥분하여 두 가지 근거에서 영화의 시각을 비판한다. 먼저 그는 왜 영화 속에 나치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가 등장하지 않는지 묻는다. 마치 국제여단 등이 전쟁을 망친 것으로 그려지는데, 국제 여단은 1년 이상 마드리드를 사수함으로써 프랑코의 승리를 지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변한다. 백번 양보하여 국제 여단이 공화파 내에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켰다고 해도,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스맨의 시각에서는 비난의 대상은 당연히 공화정의 민주주의 정신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프랑코여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서스맨은 POUM의 민주주의적 지향을 비판한다. 사회 개혁이라는 것은 단순히 다수가 지지한다고 해서 현실화될 수 없고, 더구나 파시즘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파시스트가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마을에 민주주의를 즉각 실현해야 한다고 믿은 POUM은 허망한 이상론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비조직적인 시민군의 형태를 고집한 POUM의 이상주의가 오히려 전쟁의 성과를 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서스맨의 주장이 전적으로 억지는 아니다. POUM은 위계와 집단화를 거부하고 비정규 형태의 시민군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인 프랑코 순대는 완벽한 규율을 지녔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반파시즘 세력을 하나의 위계 조직으로 규합하고 정치적으로 일치된 대오를 꾸리는 일이 필수불가결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조직화가 관료주의 특유의 비민주성을 초래할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규 조직으로 규합하려는 노력을 스탈린주의라고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스페인 내전이 있은 지 반 세기도 훨씬 지난 시점에서 촉발된 논쟁은 뚜렷한 귀결점에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 내전이 별다른 사회적 진보를 성취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만 형상과 많이 닮았다. 내전 이후의 스페인 켄 로치의 주장대로 원인이 공화파 내의 분열과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이었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공화파는 결국 내전에서 패배한다. 프랑코가 1939년 4월부터 스페인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는 종전 후 여러 탄압 정책을 밀어붙였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코는 화합의 정치가 아니라 단호한 폭정의 정치를 지향했다. 모든 불순분자를 쓸어 버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수십만 명의 반대파들이 체포.투옥되었고 종전 후 4년 동안에만도 약 3만 7,000명이 처형된다. 그리고 과거의 공화파가 실시한 사회 정책과 법률 제정은 무효화된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인, 성직자, 지주 중심의 사회로 회귀시켜 놓은 것이다. 결국 스페인의 현대사는 중대한 고비에서 뒷걸음치고 말았다. 왕정을 뒤엎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실험하던 그간의 모든 노력은 프랑코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프랑코라는 독재자의 지배가 수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탄압으로 완전한 안정을 구할 수는 없었다. 프랑코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더 심각한 것은 국제 사회가 스페인 고립 정책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를 탄압했으므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내전과 집권 후 프랑코가 저지른 폭정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을 파문하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이런 고립 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한국 전쟁은 냉전의 산물이자 냉전의 극점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프랑코는 반공이라면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스페인은 유럽 지역의 유력한 자본주의 기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경제적 교류 금지 조치를 철회했고, 미국 은행은 스페인에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유엔과 교황도 스페인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53년에는 군사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에서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얻게 된다. 그 후 60년대의 경제 부흥 그리고 70년대의 점진적 민주화 조치가 진행되면서 스페인은 정상적인 국가 형태를 되찾아 간다. 그리고 종신으로 권좌에 있던 프랑코가 1975년 11월 사망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왕에게 권력을 승계했다는 사실이다. 군인 출신 정치가가 국왕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은 대단히 희귀하고 기묘한 형태의 권력 승계였다. 이것은 프랑코의 절대 권력을 예증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스페인 내전의 모든 상처와 잔인성을 상징하는 프랑코가 사망하자,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억도 흐려진 것이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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