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유럽,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교묘히 전쟁을 선동한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가톨릭교도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다. 그에 따라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쟁쟁한 인물들이 성지를 회복(노략질)하러 떠난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은자 피에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발터와 함께 한발 앞서 떠난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대략 동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헝가리 왕국의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의해 또다시 대패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간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 군중 십자군은 거기서도 계속 약탈을 하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목숨만 구해 달아난다.[2]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차 십자군은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그러자 중무장한 십자군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슬람군은 게릴라 작전을 써 십자군을 지치게하고, 십자군은 가까스로 안티오키아에 도착, 수 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이 대도시를 점령한다. 그러나 도중에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이슬람군에 포위된채 성내에서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도와주던 아데마르 주교는 병이 옮아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십여년의 영토 확장 끝에 마침내 여러개의 십자군 국가를 세워가는 데 성공한다. 오랜 전투끝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인원과 장군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십자군 국가가 앞으로 이어질 이슬람국가들의 공격을 막아내는지가 관건이었다.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에 거주하는 기독교인과 군소의 도시 등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 측에서 영웅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등장하여 에데사 백국을 점령함으로써 열세를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또다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1187년에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에게 점령, 탈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고, 이에 응한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보통 십자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3차 십자군이지만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3]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아크레를 탈환한 뒤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면서 귀국하고 만다. 사실은 리처드 1세가 없는 틈에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탈환하고자 한 속셈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리처드의 십자군’이 되고 만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어차피 예루살렘을 점령해봤자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길 것으로 여기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때 리처드는 휴전 조건으로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보장받았지만, 살라딘은 이미 누구에게도 예루살렘의 순례를 제한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사실상 의미가 없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