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음악

오 솔레미오 - 루치아노 파바로티

by Ddak daddy 2017. 1. 1.





오 솔레미오 , 루치아노 파바로티 ...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


파바로티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테너`서 첫손가락에 꼽혀온 가수다.
성악은 목소리가 악기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의 탁월함을 필요로 한다.

목소리의 양감 질감, 색감이 뛰어나고,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일단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데 지극히 유리하다.

파바로티는 일단 멀리 뻗어나가는 고르고 큰 성량과 목소리의 고운 질감, 맑고 깨끗한 색감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

테너로서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테너 성부의 고역을 노래할때,
위와 같은 성 질들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난다는 장점을 갖고있으므로
그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는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클래식 음악가다.

1935년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한 살 어린 미라 프레니와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유모에게서 섭취한 영양분이 특수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목소리를 지니고 화려하게 성악계에 등장했다.
프레니가 63년 스칼라에 데뷔한 것에 비한다면 파바로티가
스칼라 무대를 정복한 것은 조금 늦은 감이 있는 1965년,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인 61년, 레초 에밀리아의 아키레 페리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같은 도시 가극장에서 로돌포를 불러 오페라 가수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는 대가수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63년에 빈 국립가극장에 역시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고, 코벤트가든에는 디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역시 로돌포를 불러 데뷔했다.
연주활동 초반에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은‘바로 파바로티 그 자신’으로서 인식되었을 정도다.
97년 3월호‘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로돌포’도 역시 파바로티였다.

이렇게 먼저 이탈리아 밖에서 인정을 받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64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65년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한 그는
이후 정상급 무대에 뒤늦은 데뷔를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거의 철인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리리코 배역은 물론, 리리코 레지에로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빛나는 목소리로 가는 곳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의 주요 레퍼토리는 로돌포를 비롯, 에드가르도(‘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만토바 백작(‘리골레토’), 핑커튼(‘나비부인’), 이다만테(‘이도메네오’) 등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 도니제티·벨리니·베르디 등, 거의 모든 벨 칸토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다시피한 그는
80년대 들어 좀더 무게 중심이 낮아진 목소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역까지 자신의 레퍼토리 영역으로 끌어 당겼고,
베리스모 오페라까지 손을 뻗쳤다. 81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창설한 그는 90년대 들어서 몇십만, 몇백만 규모의 대군중을 동원하는 야외 공연의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구설수에도 올랐던 이 공연은 월드컵, 그리고 다른 두 테너와 결합해 ‘스리 테너’로서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음반은 거의 모두가 데카에서 나온 것들이다. 프레니와 함께한‘라 보엠’(72년, 카라얀-베를린 필)이 역시 대표적인 음반으로 꼽힌다.
메타 지휘의 런던 심포니, 그리고 서덜랜드와 함께한 푸치니‘투란도트’도 좋다.
역시 서덜랜드와 함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70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71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벨칸토의 명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