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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서

하나님의 모략

by Ddak daddy 2015. 8. 25.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지음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

저명한 교사요, 해박한 그리스도인 사상가 중 하나인 달라스 윌라드가 기독교 제자도의 회복을 부르짖고 나섰다. 윌라드는 성경의 교훈, 대중문화, 과학, 학문, 영성 실천 등의 주제를 모아 우리의 인생관과 신앙관의 근본적 변화의 필요성을 피력한 역작 「하나님의 모략」을 내놓았다.
그는 모든 영역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여하심을 역설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핵심적인 통찰을 현대의 구도자들에 맞는 신선한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혁신적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윌라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 현상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이 삶의 중요한 요소라는 확고한 의식이 없으며, 또한 그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생각은 아예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윌라드의 지적처럼, 만족스런 내생은 보장하지만,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믿음은 ‘소비자 기독교’와 ‘광고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의 참된 본질을 파헤침으로써 이런 “불 가운데 구원 얻는” 식의 사고방식을 논박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예수의 의도는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내세뿐 아니라 지금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윌라드는 진정한 신앙, 즉 예수를 닮게 해주는 실제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신념과 미지근한 신앙에서 벗어나고, 제자도의 참뜻을 알기를 독려하고 있다. 그는 보수 복음주의에 만연한 “죄사함 받고 천국 간다”는 내용이, 예수를 믿고 제자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저해하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 없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세속화되어 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가히 선지자적 통찰이라 할만하다. 이 책은 절대적 가치와 기준이 부재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가치를 풍부한 예증과 차분하고 감동적인 서술로 흥미롭게 제시하며, 영성 개발의 이론과 실천방안을 안내해 준다. 그러기에 두고두고 되풀이해서 읽을 만한 고전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 책에 대해 “놀라운 걸작이다… 내가 평생 찾던 책”이라고 감탄하면서 나름대로의 서평을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모략」은 많은 감동을 준다. 첫째는 포괄성으로 인간 실존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개념을 제시한다. 구속과 칭의, 제자도, 은혜 안에서의 성장, 죽음, 천국, 이슈의 폭이 놀랍도록 넓다. 둘째는 용이성으로 읽기 쉽고,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쉽다. 모든 이슈는 이론으로만 머물기를 거부한 실제적인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인간의 이슈를 깊은 지혜와 분별로 다루고 있다. 셋째는 심오함으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통찰을 짚어내고 있다. 지식과 능력을 완전하게 갖춘 참 스승 예수에 대해 그는 말한다. ‘예수는 단순히 선한 정도가 아니라 지혜로우신 분이다.’또한 따뜻함이 있다. 이처럼 예리한 지성과 넓은 가슴을 공유한 저자는 드물다.”
그는 「하나님의 모략」을 본회퍼, 웨슬리, 칼빈, 루터, 테레사, 힐데가르드, 아퀴나스, 어거스틴의 진귀한 저작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싶다며, 만일 주님의 재림이 늦어진다면 이 책은 다음 밀레니엄을 위한 책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에서도 1999년 ‘올해의 책’을 선정하면서 “「하나님의 모략」에는 새로운 부흥의 불꽃이 있다. 이 책으로 윌라드는, 토마스 아 켐피스, 루터, 웨슬리, 로렌스 형제, 그리고 예수의 다른 위대한 도제들의 반열과 맞닿는다. 이 책이 많은 저작들과 차별성을 갖는 것은, 단순성과 심오함의 놀라운 결합에 있다. 올해 오직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 「하나님의 모략」을 읽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끝으로 달라스 윌라드는 현재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UCLA, 콜로라도 대학의 객원 교수이며, 목회자로서 설교와 강연을 통해 제자도와 영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35년에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친밀했던 그는, 이십대 초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름 부으심을 체험한 후 부터 지금까지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왔다. 철학을 전공한 지성적인 학자이지만, 참으로 겸손하고 소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복있는사람, 15,000원)

 

하나님의 모략


-달라스 윌라드 지음


1장. 영원한 삶의 현재성


우리 시대의 인간실존은 전복(顚覆)비행인지, 정치(定置)비행인지도 모른 채 고속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상하불변성을 인정하지 않고 선악의 기준도 없고 모호한 관념만 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도덕적 지식 체계뿐만 아니라 문화,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현재 삶과 무관한 관념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 존재에 대한 부조리, 숨막히게 난무하는 슬로건, 세속화된 예술과 문화 속에서 인간은 방향을 잃고 혼돈과 좌절로 나아간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청한다. 하나님 사랑안에서 자아와 현실, 우주의 실체까지 보게 된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과 진리,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을 믿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 분안에 살게 된다. 이 복음은 단순히 죽은 후 천국 가는 것과 사회투쟁제목에만 유효한게 아니다. 예수는 보통사람이 되어 보통의 실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현재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를 믿음으로써 우리 삶은 하나님의 통치아래 다스림을 받고 그 나라의 전달자가 된다. 예수는 지금도 세상에 두루 계시면서 자기를 부르는 자들의 음성을 듣고, 말씀하시며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2장. 죄 관리의 복음


하나님이 생명에로 초청하신 부르심이 왜곡 축소된 경우가 있다. 자동차 범퍼 스티커나-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않다. 다만 용서받았을 뿐이다-스캐너에 반응을 보이는 바코드처럼 인격의 변화가 없이도 어떤 의식, 신념, 소속 등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그런 경우다. ‘화재보험’처럼 복음이 죄관리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되고, 우리의 현실생활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 것도 축소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죄 관리의 복음’은 삶과 성품의 변화는 구속적 메시지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익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칭의와 중생, 즉 죄사함 받는 것이다. 용서와 영생을 구원의 이슈로 강하게 강조하면 신앙이 삶과 분리하게 된다. 좌익은 사회악 제거에 헌신하는 것을 중요하게 본다. 이들은 사랑을 강조하나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구호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양쪽 모두 변화에 필요한 논리적 지식과 실제 방향 또 그에 부합하는 일상의 구속에 관한 일관성 있는 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분명 풍성한 삶과 순종을 향한 개인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사후에 천국 가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도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본다면 구원과 믿음, 용서의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도 현재의 실존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그 분을 의뢰하는 것이고, 그 분이 옳으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 심장부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현재적 실체를 우리의 말과 삶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영원한 삶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장. 예수가 알았던 세상 : 하나님 충만한 세상


예수가 보는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한 세상이고 모든 구성요소가 하나님의 직접적 지식과 통제 영역 안에 있는 충만한 곳이다. 오늘날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삶이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데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실제 공간에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분을 체험하게 하신다. 인간은 물리적 몸을 지닌 영적존재로 우리의 영혼과 공간은 인격 속에 들어 있어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의 존재가 그 곳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공간을 점유하시지만 그 곳에서 그분을 찾을 수는 없다. 편재하시는 분이시며 그 분의 임재는 합당히 여기시는 어느 장소에나 집약되어 나타나실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보기를 원하시고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공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충만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계신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마음을 여는 것 뿐이다. 우리의 마음 즉 영혼은 본질적 존재의 영적 측면이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우리안의 유일한 영역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하나님의 영적인 세상에 점점 통합시켜 갈수록 우리는 점점 영원한 것의 본질을 입게 된다. 그러나 육신의 마음은 살아있는 죽음처럼 절망과 허무로 인도한다. 영혼의 마음은 생명과 평안을 주고, 우리를 존재의 종말이 허용되지 않는 영원한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예수는 세상을 가시적 정황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세상을 보시면서 사셨고 가르치셨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보는 것이고, 세상 기준에 대한 반전(反轉)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 분이 역사상 누구보다 똑똑하시고, 현실의 모든 영역을 지식과 실제면 에서 완전히 통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성적 위대함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현실 속에서 그 분을 따르는 제자도의 근본적인 기반이다.


4장. 참된 부요를 누리는 자 : 8복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2가지 중심질문을 다룬다. 어떤 삶이 행복하고, 누가 진정 선한 사람인가에 관한 것이다. 8복은 누가 행복한 사람이냐에 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천국을 얻은 자들을 위한 메시지인데 자칫하면 새로운 율법으로 오해하여 죄책감과 교만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8복의 약속들을 각 복과 연결된 보상과 결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연결고리는 그리스도이다. 그 분이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빈곤이나 겸손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무일푼이고 비참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통치가 예수를 통해 임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8복은 천국 생명을 얻을 자격 목록이 아니라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예수는 생활주변의 사건을 소재로 삼아 가르치시거나 비유를 사용하셔서 일반적 통념과 습성을 바로잡아 주셨다. ‘부자 청년’비유로 ‘부’가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라는 통념을 뒤집으시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비유로 특정 집단이 영생을 얻는 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함께 움직이신다.

누가복음의 8복에서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절망적이고 하나님 복에서 제외된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은혜의 도구가 바로 8복인 것이다.


5장.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다루시는 다양한 장면과 상황은 사실상 아가페 사랑의 삶을 향한 점진적 성장의 단계이다. 예수는 인간 영혼의 구조를 아시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 자체보다 행동의 근원을 주로 다루신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더 나으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되는 인류의 소중한 재산이다. 율법은 선하고 옳지만 율법준수가 문제였다.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규정을 조목조목 정해 엄격하게 지켰던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는 위선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래서 ‘그릇’과 ‘나무’ 비유를 사용하여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생활이 변해야 함을 말씀하셨다.

디카이오수네, 즉 진정 선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바울에게 예수의 인격과 죽으심의 구속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디카이오수네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는 6가지 구체적 상황을 들어서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통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과 ‘의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옛 디카이오수네와 대비하여 보여 주신다.

첫째, 분노와 멸시의 상황에서 단순하게 살인하지 말라는 옛 계명에 예수는 인간의 소중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진정으로 상대방의 유익과 행복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도 사랑으로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둘째, 오늘날 대중매체와 실생활 모두에서 섹스와 폭력은 우리의 큰 문제 영역이다. 예수는 자신이 구체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성욕이나 생각 자체는 선한 것이고 예수도 유혹을 받으셨다. 행위만을 금지하다보면 부조리로 빠지기 쉽다.

셋째, 모세는 인간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혼을 허락했지만 그 당시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자에게 이혼은 곧 비참한 미래를 뜻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쉽게 행해지던 이혼을 금하시고 예외 조항을 말씀하셨다.

넷째, 상대방을 설득할 때 맹세를 하지 말고 가부(可否)만을 말하라고 하셨다. 맹세란 나의 목적을 위해 상대의 이해와 판단을 무시하는 것이다. 천국의 의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

다섯째, 개인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 모세의 율법은 상대방에게도 똑같은 피해를 당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위대한 반전으로 들어간다. 악을 선으로 갚고 저항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해당한다.
여섯째, 이것은 원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과 그 사랑을 최고의 사랑 행위인 기도로 끌어올릴 것을 명하셨다.

천국 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선을 아는 것과 선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관심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현실생활의 이슈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6장. 천국 투자 : 명예와 부의 기만을 피하여


진정 선한 사람이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이웃의 유익을 깊은 동기와 이해로부터 전심으로 도모하는 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2가지 주요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경건함에 대해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고 또 하나는 물질적 부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꾀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들을 잘 다스린다면 우리는 바르게 성장할 것이다.

매혹적인 종교적 명예와 존경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곧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로 끌어내린다. 예수는 기도, 구제,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중심이 오직 1인의 청중처럼 하나님 앞에 선 태도가 중요하다. 은밀함의 훈련은 행위의 동기와 보상을 사람에게 두지 않도록 힘을 길러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을 외면하는 쪽으로 활동과 조직이 짜여지는 ‘종교적 외면’ 현상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좀과 동록과 도적이 없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하라는 말이다. 보물이란 섬김이 대상이 되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양쪽의 요구가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안에 감취어져 있다. 내세에 예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내 삶 속에서도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예수는 우리가 먹고 살 것을 구하는 이방인처럼 물질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하기를 바라신다.


7장.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


예수는 사랑하는 이들을 진정 효과적으로 은혜스럽게 돌보고 돕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을 우리의 의도와 계획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이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우리가 소중한 이들을 진정 돕고자 한다면 ‘정죄와 비난’이라는 뿌리깊은 습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죄에 남을 바로잡아 주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정죄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배척받는다는 느낌을 주므로 무척 주의해야 한다. 정죄는 우리 존재의 핵심 연약한 부분에 비수처럼 꽂혀 분노의 반응을 낳고 악순환을 가져온다. 남을 정죄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실패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가페 사랑이 몸에 벨 때 가능한 것이다.

때로는 선한 것도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존재로 자기 결정권을 주셨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조작해서는 안 된다. 정죄나 ‘진주’나 거룩한 것으로 타인에게 의와 선을 강요하며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 선한 동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영적 성향의 단일성을 갖는다. 천국엔 일방통행이 없다. 뭔가를 요청한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본연의 방식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신앙공동체에는 일대일 관계란 없고 모든 관계는 예수를 통해 중재된다고 본훼퍼는 말했다. 상대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강요나 지배에 구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도의 핵심은 요청이고 하나님과 체험적 상호작용이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설득당하기도 하시고(모세, 히스기야의 기도), 기도하는 이에게 긍정적 효과를 준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기도를 자판기처럼 취급하는 것은 오해다. 하나님과 인격적 협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하고 기도를 가르치는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다. 먼저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이 호칭은 하나님과 나의 신분 관계를 나타내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그 분의 이름이 존중되게 해 달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최고로 사랑하고 귀히 여긴다는 개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어떤 곳이든지 하나님나라로 대치되어 그 분의 통치를 받게 되기를 비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에 대해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구하고, 시험이나 유혹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구해야 한다. 마지막 요청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다.


8장 예수의 제자 또는 학생이 되는 법


예수의 제자는 먼저 그 분이 모든 면에서 참으로 매력적인 분임을 깨달아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의 살아있는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예수 이름으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분과 동행하고 그 분처럼 되는 법을 배우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좁은 문이지만 풍성한 길이다. 반면에 넓은문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삶이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성경 즉 말씀을 주시고 고독과 침묵 속에서 우리가 듣기를 바라신다.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셨다. 사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를 실제적 실체로 경험하게 되었다. 예수와 지속적인 교제를 체험하며 매순간 실존 속에서 그 분을 만날 수 있다.

제자 삼으려면 자신부터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삶이 내 삶을 통해 흘러나온다. 일상의 삶 자체가 제자도의 장이다. 천국의 삶은 실제 삶에서 예수 인격을 닮아가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로 잘 가꾸는 것이다. 제자도란 ‘전임사역’과 관련된 특별한 소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분야의 일에 관심이 있고 우리가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잘 하기를 원하신다. 제자는 예수의 도우심과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제자도의 대가는 제자의 영혼이다. 예수보다 더 값진 것이 없다고 믿기에 대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기쁘게 결단하게 된다. 그 분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신약에서 베드로에게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을때 베드로는 선택했고 그 후로 다시는 돌아서지 않았다.

우리가 천국의 비전을 갖기 위해 취해야 할 실제적 단계는 무엇인가? 첫째는 예수의 실체를 더 온전히 보고 싶은 열망을 거듭 구하는 것이다. 둘째, 그 분을 보기 위해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지막 단계는 결단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의지를 드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제자를 삼을 것인가? 우선 우리가 먼저 제자라야 한다. 교회안의 코끼리는 제자도의 부재이다. 그리스도인이 헌신하지 않고 소비자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값싼 은혜’라기 보다 ‘값비싼 불신’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제자 삼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참 스승임을 믿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비전의 믿음과 제자도로 나아가야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의 능력이 진가를 발할 수 있다.


9장.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


천국의 순종은 풍요이다. 능력과 사랑과 평안이 흘러나오는 영혼내면의 상태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훈련이 없이는 ‘듣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예수는 제자들이 들은 모든 것을 전인격을 다해 믿도록 가르치셨다. 제자는 예수를 믿는데서부터 그 믿음을 공유하는 데까지 훈련의 과정을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주요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 4가지가 있다. 말씀에 외형적으로만 동조하는 것, 정확한 교리를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 온갖 종교적인 일에 충성을 독려하는 것, 또 하나는 특별한 마음의 상태나 황홀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내면의 자아가 변화되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사항일 뿐이다.

훈련과정의 2가지 주요목표가 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늘 기뻐하는 것이다.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 분앞에 충분히 머물러야 한다. 그 분에 대한 생각이 늘 마음을 채우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통해 창조주이심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구속백성의 역사적 전통 속에서 창조, 언약으로 자신을 보이셨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 역사위에 우뚝 서 있다. 또 개인적 체험을 통해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 안에서 나의 존재와 삶이 선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죄악된 위력을 깨뜨리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불가능한 일로 보고 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으면 죄에 매인 상태가 되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실제 생활에서 악이 존재하는 주요형태가 바로 몸의 습관이다. 매일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아에 대한 죽음’은 단순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적성장은 3중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개입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의 시련과 변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계획된 우리의 활동은 밑면 양쪽에 위치해 있다. 즉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반응이 병행해서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영적 훈련에 유익한 것으로는 금욕적 절제의 측면에서 고독과 침묵이 있고, 적극적 행위의 측면에서는 공부와 예배 등이 있다. 이런 훈련의 목표는 행동 변화에 있지 않고 영혼내면이 변화에 있다. 분노에 지배당하지 않고 진정 남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이 제자는 다섯차원의 변화 단계가 있다. ①예수를 ‘인자’ 곧 우리를 구원하신 예정된 분으로 믿고 의지한다. ②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진다. ③제자도, 곧 계속해서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실현된 풍성한 삶은 자연히 순종으로 이어진다. ④순종과 훈련의 삶은 영혼의 내적변화로 이어진다. ⑤천국의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과 함께 위대한 성품이 요구된다.


10장. 만물의 회복


예수의 제자가 된 이들은 하나님 자신만큼이나 크고 선한 미래가 있는 무한의 삶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모략의 동참자로서 맛보는 경험은 충만한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게 한다. 우리에게 육신의 삶이 끝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의 삶과 의식은 본질상 미래를 내다보고 싶도록 되어 있다. 성경에서처럼 우리는 아버지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는 능동적, 창의적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커다란 유혹중의 하나는 인간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이 임하게 하려는 유혹이다. 하나님은 대화와 임재하심을 통해 우리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주를 보면 ‘내 아버지 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와 삶은 미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수반된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이 땅의 삶을 초월하여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생명 속에 인간의 인격을 분명히 보존하실 것이다. 사도들이 가졌던 영생의 확신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체험한 데 있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밝히 보는 그 곳의 상태를 ‘평화’로 묘사했다. 그 곳의 영원한 축복은 ‘끝없는 안식일’이다. 어떤 멋있는 말로도 지극히 충만한 천국의 복된 상태를 다 표현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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