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 주력 전함 판옥선
1. 조선 군선의 특징
-전통적인 조선의 군선은 외판을 한겹으로 만든 單造船(단 세종 대에 중국의 甲造法-쇠못을 쓰고 외판을 이중으로 건조-을 채택하였으나 문종 때 다시 단조법으로 환원)
-선체 밑이 홀쭉하지 않고, 선수미가 첨예하지 않아 빠르지 못함
-후판을 사용하여 선체가 무거웠다.
-높이가 높아 전투에 유리
-조운에도 쓸 수 있는 구조였다.
-나무 못을 사용
-재료가 덜 들고 만들기가 수월했으나, 정교하지 못하고 수명이 짧았다.
2. 板屋船
① 조선 전후기 각종 법전류에 등재된 군선의 종류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오직 명종, 선조 양조의 실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에만 나옴. 명종 10년 9월에 처음으로 출현.
② 이순신의 『亂中日記』에는 판옥선이란 명칭은 나타나지 않고 단지 전선으로만 쓰고 있고, 각종 승전보고문(옥포, 당포)에서는 판옥선, 판옥전선, 전선 등으로 나타나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임진왜란에서 조선함대의 주력선으로 활약하고 이후 조선 후기의 전선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임
③ 판옥선이 전선으로 통칭되게 된 것은 판옥선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모양에 따라 판옥선으로 불리다가 판옥선이 점차 보편화됨에 따라 군선으로 통칭된 듯
1) 개발 배경
① 중종 5년(1510) : 삼포왜란 -삼포 왜인과 대마도주가 합세하여 병선 수백척을 몰고 들어와 부산첨사를 살해하고, 제포를 점령 -->이 당시 조선 군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임신조약 체결
② 중종 17-18(1522-23) : 전라도와 황해도에 왜선 10여척 침입
③ 중종 39년 4월 사량왜변 :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 침입 - 화포 무장 -->명종 2년 정미조약 체결
④ 명종 10년(1555) : 을묘왜변 : 왜선 70여척이 해남군 達梁浦에 침입 전라병사와 장흥병사를 살해하여 영암까지 상륙
⑤ 왜적 침입 초기에는 조운 겸용선인 맹선을 이용하였다가, 소형경쾌선을 이용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으나, 왜구들이 중국의 조선술과 화포를 들여와 배와 무기가 크게 강화되자 새로운 전함을 개발할 필요가 생김
⑥ 명종실록 권 32권 명종 21년 3월 甲辰
古昔敵倭之來 皆乘平船 故我國亦平船制勝 今則敵倭皆乘屋船 不得己用板屋船
(옛날 왜적은 모두 상장이 없는 평선을 타고 왔기 때문에 우리도 평선을 가지고 적을 제압했으나 지금은 왜적이 모두 상장이 있는 옥선을 타고 오기 때문에 우리도 부득이 판옥선을 쓰지 않을 수 없다)
⑦ 제안자 : 徐厚 - “지금 수준에서는 소선만을 쓰고 있지만 小船은 아무리 민첩하더라도 접전에서는 쓸모가 없고 적이 칼을 빼어들고 뛰어들 수 없는 高埈한 大艦을 가지고 적을 내려다 보며 제압해야 합니다.”(중종실록 권42, 중종 16년 5월 戊午
⑧ 완성 : 맹종 10년 9월 - 망원정 앞 강에서 진수 시험에 성공(명종실록 권 16, 명종 10년 9월 戊申)
2) 조선후기 전선의 구조-명종, 선조 대의 판옥선도 이와 동일
㉠ 主船體部(노 아래 부분) : 저판, 杉板(외판), 飛荷眞板(선수판), -板(축판, 선미판)
㉡ 上粧部分 : 舷欄(최상삼판에 따라 놓여진 綜通材), -板(비판, 側板), 牌欄(패란, 牌板위에 놓인 종통재), 鋪板(펼칠 포, 갑판), 女墻(舷墻, guard rail)->판옥선에만 독특한 것
㉢ 누각부분
㉣ 노역은 포판 및 상장 안에서 하고, 갑판 위는 포를 안치할 수 있도록 만듦
3) 판옥선의 구조적 특징
① 全通船樓船 : 상부구조물인 상장이 갑판 전면에 걸쳐 가설되어 있다.
② 선수부는 목재 15개를 세워서 붙임
③ 선미부는 외판의 꼬리가 치솟아 있는데, 이는 위용을 자랑하는 한편, 파도로부터 타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④ 선체 위에 14개의 가룡이 걸쳐져 있다.
⑤ 상장의 너비를 하체의 너비보다 넓게 하여 그 사이로 노를 내밀도록 하는 것은 판옥선 구조의 가장 큰 특징임.
4) 크기 및 기능
①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
② 전투원들이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③ 적이 접근하여 배에 뛰어들게 어렵게 되어 있다.
④ 포의 위치가 높아 포격전에 유리한 선형.
⑤ 기동성이 좋다. 선체가 종래 선보다 커졌기 때문에 노군의 수를 증가시킬 수 있었다. 노 한 자루당 노군 5명이 노를 저음.
⑥ 크기 : 나대용 장군의 상소문에 판옥선의 정원이 125명 이상이었다는 기록이 있음. 전기의 대맹선의 정원은 80명이었음.
⑦ 임진란 당시 충무공 이하 수사급 지휘관이 탑승한 판옥선 : 저판장 65-70 척(1척 0.303m, 19.7-21.2m) 탑승인원 160명, 노 16자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
⑧ 기타 수군장이 탑승한 판옥선 : 저판장 50-55 척(15.2-16.6m), 탑승인원 125명, 노 12-14자루.
5) 판옥선 출현의 의의
㉠ 혁신적인 군선의 탄생 : 猛船類로는 왜구를 제압할 수 없어 판옥선이 고안된 것이니 만큼 판옥선은 선형이 참신하고 포를 구사하는데도 편리
㉡ 조선의 海防에서 小船主義를 버리고 전통적인 大船主義로 복귀하는 계기가 됨 : 삼포왜란 이후 맹선을 제쳐놓고 輕快船主義로 전환하였으나, 일본은 중종 17-18년 침입시 배의 크기를 증대시키고, 중종 말년에는 화기를 구사하는 등 세력을 키워 사량왜변과 을묘왜변 무렵에는 조선이 왜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으나 판옥선의 개발로 이와 같은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고, 이는 임진왜란에서 다시 한번 입증됨.
㉢ 판옥선은 완전히 독창적인 선형 : 중국의 군선제도를 총망라한 무경총람, 무경절요, 무비지 등에 실려 있는 중국의 군선 중 판옥선과 동일한 선형은 없고(단 갑판 위에 각양각색으로 상장을 한 군선은 있음), 일본선에도 상장선(板閣, 層樓, 有屋)이 있었던 것을 확실하지만, 선체의 상면 전면에 판옥을 구조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갑판 일부에 갑판실을 2층 내지 3층으로 배치한 정도
㉣ 임진왜란에서 왜선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움 : 임진왜란 시 조선측 주력선은 판옥선, 보조주정, 특수선이 귀선(임진왜란시 3척) VS 일본측의 대선, 중선, 소선
이순신의 장계 : “大抵倭敵非不慣水戰也 只以其船遠來 其制不能堅厚壯大 故無以安大砲於其上 而爲我國船所制耳 今賊久在居濟多材之處 若依我國船制 多造板屋船 載砲而出 則敵之亦難當”(왜적이 수전에 능숙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군선이 장대하지 못하여 대포를 안치할 수 없으므로 패한 것)
※ 임진왜란 주요 해전 참전 군선 수
해전 | 조선 수군 | 왜 수군 | 전 과 |
옥포해전 (1592. 5.8) | 판옥선 28 挾船* 17 鮑作船** 46 | 68 | 26척 격파 |
당포해전 (5. 29) | 판옥선 51 | 71 | 21척(당포), 20여척 (당항포), 7척(율포) |
한산대첩 (7. 6) | 판옥선 54 | 대선 36 중선 24 소선 13 | 47척 격파, 12척 나포 |
부산해전 (8. 24) | 판옥선 74 협선 92 | 400척 | 100여척 棟破(동파) |
주 * : 격군 수명이 탈 수 있는 연락 정탐선
** : 작은 어선으로 임시로 징발한 배
㉤ 조선 후기 모든 군선의 원형이 됨 : 방패선->鋪板을 깔지 않고 방패판만 설치한 것, 귀선->보판을 깔지 않고 대신 穹-型으로 蓋板을 덮어 군졸을 적의 화살로부터 보호한 것
임진왜란에서의 판옥선
임진왜란에서 첫 해전은 개전후 25일만에 있었던 옥포해전이다. 충무공은 5월 4일 출전하여 5월 8일 옥포만에서 적 선단을 포착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상황을 충무공은 장계를 통해 선조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옥포해전에서는 판옥선 28척과 협선 17척, 포작선(어선) 46척을 거느리고 출동 하였다. 이때 포작선과 협선은 전열함으로 볼 수 없으며 실제 전투시 에는 판옥선이 주력이 된다. 또한 판옥선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전투에 소요된 시간인데 장계를 보면 옥포앞바다에서 12시였고 전투를 마친뒤 영등포에 온시간이 오후 4시경이었으니 대략 해전에 소요된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그사이에 우리측은 단 한사람의 부상병도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 시켰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 했는지는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해전에 뒤이어 다시 같은날 저녁 5척을 또 추격 격침시켰고, 적진포에서 13척을 추가로 격침시켰다. 이것이 충무공의 1차 출동이다.
5월 29일 제 2차 출동에는 23척의 전선이 출동한다. 이때는 거북선이 3척 따라가게 된다. 이순신장군은 이때 이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함께 전선이라고 부르고 출격때에도 전선의 숫자만 장계에 보고하고 있다. 사천포에서 왜의 층루선 12척과 왜성을 쌓고 있는 왜군 400명을 분멸시키고 다시 당포에서 판옥선 만큼 큰 왜 층루선 9척, 중소선 12척을 모두 격침 시키고 왜장의 목을 베었다.이후 당포 근처에 머물던 조선 함대에 이억기 수사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합세하여 전선이 모두 51척으로 늘어난 연합함대는 당항포, 율포등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다. 다만 이때에는 전상자가 전보다 많아 사망자가 12명이나 되고 부상이 34명이나 되는데 이순신 함대에서 최초로 적의 칼에 의한 사망자도 1명 나오게된다. 3차 출동한 견내량 해전에서 적의 대형 층루선 35척, 중간배 17척 작은배 7척등 총 53척을 격침시켰으나 조선측은 부상자 118명에 사망 19명 뿐 침몰한배는 한척도 없다. 특히 부상, 사망자의 경우도 모두 포탄에 당한 것으로 이순신의 판옥선 함대는 마치 현대의 함대처럼 순수한 포격전으로 적을 무찔렀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견내량은 마치 바다의 문경새재와 같은 지형으로 폭이 좁고 물살이 빨라 지협을 막아서는 전법으로 소수의 병력이 큰 병력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요새지인데 이순신장군은 이날 견내량을 내주고 대신 바다 한가운데에서 학익진을 벌려 적을 포위하여 인위적인 견내량을 만들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다시 안골포에 왜 수군장 구끼의 함대를 무너뜨리고 적에게 시위하였다. 이때 일본측의 임진왜란 전사 연구가 가다노의 추산으로는 견내량(한산도)에서 약 1천명 정도, 안골포에서 2천5명정도의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삼가 적을 무찌른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 세계사.1989) 이상에서 처럼 판옥선으로 이루어진 조선 수군함대는 한척의 피해도 없이 왜 수군을 무찔렀는데, 이는 판옥선의 성능을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의 구조
다음 그림은 당시의 설계도면 이라고 할 각선도본(各船圖本)에 나온 전선도이다.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1989, 서울대 출판부)). 당시 조선공은 이 그림을 보며 비례, 구고현법, 전통 조선기법을 응용하여 전함을 만들었다. 우선 도본에 나온 원문과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배밑(본판)의 길이는 90자, 너비 18자 4치, 높이(깊이)11자3치, 아래층 신방에서 방패 까지 높이 5척, 선두(이물) 너비 15척, 선미(고물) 12자 7치, 상장(판옥) 부분 길이105척, 너비 39척7촌이다. 이는 통영상선의 치수임.
배밑의 길이가 65자, 깊이 8자, 중간부분 너비 15자, 선두 너비 12자 5치, 선미너비 7자5치. 이는 각읍진의 전선치수임.
통영 좌선과 부선의 가목은 16개씩. 본판은 (통나무) 15개를 조립.
각읍진의 전선은 가목은 15개. 본판은 12~3개를 조립한다.
이물비우는 판자15개를 조립. 선미는 난간이 없다.
배밑 본판은 15개를 이어 붙였는데 물밑에 있어 안보인다.
위의 번역내용을 가지고는 도무지 어떤 형태인지 알기가 무척 어렵다. 이를 다시 의미를 중심으로 하나씩 설명해 보겠다.
우선 동양의 배에는 우리가 친숙하게 생각하는 현대선박의 용골이 없다. 물론 중국의 경우, 신안에서 발굴된 신안선처럼 용골이 있는 첨저선도 있었으나 점차 사라지고 정크처럼 용골이 없는 것만 남았다.이처럼 동양권의 배는 배의 척추라고 할 용골이 없는 대신 평탄한 저판(본판)이 이를 대신한다. 또다른 특징으로는 늑골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특징들이 배의 구조를 설명하는 글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우리배의 경우 배의 기본 구조라고 할 용골과 늑골이 없는 대신 용골의 기능을 하는 본판 이라고 부르는 구조와 늑골 대신 배의 횡강력을 유지하는 가룡(또는장쇠)이 있다. 따라서 전통 한선에 있어서 용골의 기능을 하는 본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한선을 설명하는 어느 설명에서나 가장 먼저, 그리고 자세히 다룬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위의 내용을 고찰한다.
판옥선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본체 또는 하체라고 불리고, 일반적인 다른 한선과 같은 형태와 구조를 가진다. 판옥선의 경우 이 부분만을 평전선이라고 부를 경우도 있다. 각선도본에는 전함의 상장을 제거하고 본체만 그린 구조도를 따로 전선 철상장(撤上粧)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상장을 제거한 평선은 한선 구조를 아주 잘 보여 준다. 우선 굵은 각재 12~15개를 가쇠라고 불리는 긴 나무창으로 꿰뚫어 이어 본판을 만들고 본판 좌우에 삼판이라고 불리는긴 판자 7쪽을 본판위에 이어 붙여 만드는데 앞의 설명에서 원고가 11자3치라는 것은 바로 배의 본판에서 부터 맨위쪽 7번째 삼판까지의 높이로 배의 선체부분 깊이를 말한다. 7번째 삼판에는 마치 우마의 멍에를 메우듯 멍에(가목)가 얹어지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깐다. 이런 상태를 보통 한선에서는 평선이라고 부르는데, 판옥선의 경우 구조상 선체, 본체, 또는 하체라고 한다. 2층은 판옥선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되는데, 평선위에 방패판을 설치한 것이 마치 집을 지은 것 처럼 보여 판옥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를 판옥상장이라고도 하는데 우선 하체의 멍에 위에 신방 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뒤 패란을 만든다. 아래층의 신방에서 패란 사이에 방패판을 설치하여 2층을 만드는데 그 높이가 5자라는 뜻이다. 이 부분이 다른 나라 선박에는 볼수 없는 판옥선의 특징으로 배의 이물로 부터 고물까지 배 전체에 선루를 만드는것으로 단순히 상장이라고도 한다.
상장 위에는 양현과 이물에 여장을 설치하였다. 상장의 패란위에 뱃집멍에를 걸고 여기에도 포판을 까는데 이는 청판(廳板)이라고 한다. 따라서 판옥선은 갑판이 두개인 2층 갑판선이 된다. 청판에는 두개의 돛대(이물돛대,한판돛대)를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한다. 3층은 청판위의 누각을 말하는데 여기가 현대함선의 함교에 해당한다. 통제사나 수사가 이곳 누각에서 지휘를 하게 되며 장대(將臺)라고 부른다. 또한 청판에는 기를 올리는 깃대도 있다.
왼쪽그림에서 보듯 판옥선(한국식 배라는 뜻으로 한선으로 표현 했다)구조는 서양식에 비해 구조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서양선이 사각형 용골을 놓고 거기에 외판을 받쳐줄 늑골을 설치한뒤, 비교적 얇은 판자로 외판(현판)을 조립하는데 비해, 전통 한선의 경우 배의 용골대신 굵은 통나무 여러개를 조립(전선의경우 12~15개를 조립)하여 넓적한 본판을 만든뒤 이 평평한 본판위에 좌우에서 삼판이라고 불리는 외판을 턱붙이 클링커 이음으로 겹쳐 올리고 늑골이없는 대신 좌우 각각의 외판을 양쪽으로 지지하는 가룡목을 배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다.
또한 한선의 경우 배를 건조할 좋은 선재가 부족하여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우리나라의 선재용 소나무는 강하기는 외국의 선재와 비슷하나 휘기가 매우 어려워 자연히 투박한 상자형의 배가 되었다. 이렇게 용골이 없는 구조는 동양형 선박의 특징인데, 늑골이 없어 배가 찌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선의 경우 필요 이상의 격벽을 설치하여 격벽이 배의 모양을 유지하게 하고, 우리 나라 전통 한선의 경우 외판 하나 하나마다 가룡목을 설치하여 배의 횡강력을 유지한다. 그런데 가룡은 외판판자 하나 하나를 꿰뚫고 끼워맞춤식으로 설치되어 있어 선체가 매우 견고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체의 앞뒤를 역시 판자로 막아 일종의 상자형 배를만든다. 따라서 배의 밑이 날카롭지 못하고 구조상 평저선형이 된다.
왼쪽 그림은 판옥선의 상장을 제거하고 위에서 본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각각의 삼판마다 가룡목이 끼워진 모습과 가목이 현판에 끼워진 모양새를 보여준다. 이렇게 가룡목과 가목에 의해 배의 횡강력이 유지되며 자연스럽게 칸이 나뉘어지는 구실을 한다. 거북선에서는 이렇게 나눠진 각방에 병사들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선의 격벽이라는 것은 이 그림의 가룡목이 판자로 바뀐 것으로 풀이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본체가 만들어지면 선체의 가장 위쪽 외판위에 가목(멍에)을 외판 깊숙히 끼워 넣는식으로 설치한다. (가목의 위치는 가룡목과 같아 전선의 상장을 제거한 그림에는가목만 보인다고 했다) 가목이 설치되면 여기에 귀틀을 짜고 포판(갑판)을 설치한다. 여기 까지 만들어 진 것을 평전선 이라고 부르는데 판옥선은 이 위에 판옥(판자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평선의 멍에가 현측외로 튀어나온 멍에뺄목 위에 현란을 설치하고 기둥을 세운뒤 참나무로 만든 방패판을 세운다. 이 방패판 위에 언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패란을 설치한다. 패란 위에도 귀틀을 짜고 포판을 까는데 이를 청판이라고 부른다.
청판 위에는 현대 함선의 함교라고 할 장대가 만들어 지고 두개의 돛대도 설치한다. 청판의 좌우와 앞에는 여장을 설치하는데 뒷부분에는 여장을 설치하지 않는다.
이상이 판옥전선의 만듦새를 설명하는 원문을 주해한 것이다.
판옥선의 화력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인 증거에 의한 불확실한 것들이 많다. 이 점 앞으로 추가 해야할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불화살 공격에 의존하던 우리 전함에 함포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우왕 7년 최무선은 금강 어구에서 왜구의 배 500척을 화포로 공격, 분멸 시켰다. 또한 정지(鄭地)장군은 우왕 9년 전함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에서 적선 120척을 격멸했는데 이는 탑재 함포를 가지고 해상에서 적함을 격멸한 것으로 최초의 함포에 의한 포격전으로 세계해전사에서도 최초라 할 만큼 의의가 크다. 이처럼 우리는 일찍부터 전함에 함포를 탑재 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이미 함포를 사용한 우리나라는 조선조 세종때 화기의 전면개량 이후 더욱 강력한 함포를 가지게 된다. 우선 세종때에는 그동안 중국식화기를 주로 사용하던 것들을 국산화 하기 시작하여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총통(화포)을 만들고 대장군포등과 요즘의 박격포라고 할 '완구'등을 만들게 된다. 또한 기존의 화약을 개량, 사정거리를 늘리게 되는데, 천자포의 경우 종전의 4 ~500보 나가던 것을 개량후 1000 ~ 1300보로 늘리게된다.
포탄
특히 조총이나 서양의 불량기들이 둥근 돌덩이나 철탄을 쏘게 된 것들로 폭발형 포탄이 아니기 때문에 파괴력이 크지 않은데 비해 우리의 경우 진천뢰라는 폭발형 포탄을 사용 할 수도 있었다. (임진란때 이순신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또한 우리의 총통은 포탄 뿐만아니라 여러발의 화살이나 수백발의 수마석(물에 침식되어 둥글게 된 작은 돌)을 포탄 대신 사용 할 수 있었다. 이들 화살들은 일종의 산탄 효과를 낼 수 있어 화력을 배가 시킨다. 천자포의 경우 수마석 200개를, 현자포의 경우 100발을 발사 했다.
이런 산탄 이외에 대형 화살도 포탄으로 사용 했다. 천자포용 으로 만들어진 장군전의 경우 직경 120mm, 길이 180cm정도에 쇠날개가 달려있으며, 현자포용의 차대전은 구경 60mm, 길이 160cm정도가 된다. 이런 류의 편전들은 일본측 기록에도 나오는데 조선의 화살은 직경이 한자(1尺)나 되어 우리배(일본전함)의 돛대가 한방에 부려지는 등 질 수 밖에 없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장군전에 맞은 것을 이렇게 쓴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기가 장군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런 무기가 없는 임진란 당시의 왜군은 이를 그냥 화살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일부 현대의 연구에서 이를 일본의 과장이라고 무시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하나 우리나라의 대포를 총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포탄 뿐만 아니라수많은 화살을 산탄처럼 쏠 수 있기 때문에 총통이라고 부른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폭발형 포탄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마석 200개를 넣고 쏘는 천자포라면 조총 200자루와는 비교가 안되는 파괴력을 낼 수 있다. 당시 왜군은 조총의 밀집사격방법을 고안(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가 단조산에서 왜의 사무라이를 농민병으로 대항할때 처음 썼다고 한다) 위력을 떨칠 때 였으나 아무리 밀집사격을 해서 명중률을 높인다 해도 유효사거리가 50 m 밖에 되지 않는 조총은 판옥선의 두꺼운 참나무 방패판을 뚫을 수 없다.
또한 이런 수마석이나 대형 장군전 이외에 소형 화살에 가죽 날개를 붙여 총통에 여러발을 장전, 발사할 수 있게 만든 피령전도 사용 하였는데, 피령전은 대개 조금 작은포에 여러발을 넣어 쏘았다. 세종때에는 피령전을 8발씩 한번에 쏘는 8전 총통등이 있었다. 이런 화기 이외에도 요즘의 로켓탄에 해당하는 신기전등도 사용 하였다. 신기전은 화살에 작은 로켓을 달아 자체 추진력을 가지게 만든 것으로 적함을 불 살라 버릴 수 있었다.
현존하는 명종, 선조때의 화포
화 포 | 제조연대 | 전장(cm) | 구경(mm) | 소장처 |
---|---|---|---|---|
전자총통 | 명종 10년(1555) | 130 | 128 | 육사박물관 |
지자총통 | 명종 12년(1557) | 88.8 | 100 | 육사박물관 |
지자총통 | 중종 32년(1537) | 91 | 95 | 일본 |
지자총통 | 명종 12년(1557) | 91 | 100 | 일본 |
현자총통 | 명종 10년(1555) | 76 | 67 | 일본 |
현자총통 | 선조 1년(1568) | 74 | 64 | 일본 |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 인용
당시에 판옥선에 함포를 몇 문이나 탑재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탑승원을 구분한 것을 보면 포수가 24 ~ 26명 정도이다. 이외에 화약을 장전하거나 포탄을 나르는 화포장이 10 ~ 14명이 있고, 활을 쏘는 사부가 18 ~ 22명이 있다. 그렇다면 대체로 약 20문 정도의 총통을 장비했을 것 같다.(순수한 짐작임.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그리고 정조대왕때 발간된 이순신장군의 전기인 이충무공전서에서는 '모든 총포구멍에 총포를 걸고 쉴새 없이 쟁여 쏜다'라는 말이 있으며 이때 통제영 거북선이라면 대략 70문의 총포혈이 있으니 탑승원들중 포수전원인 사격을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대략 20문 이상의 함포와 소총(승자총) 약 20자루정도의 화력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판옥선은 주력함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었으나 거북선이 특별한 배가 아니라 판옥선을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화력은 비슷했을 것이다.(이것도 추측)
전선의 정원(숙종때)
(단위=명)
부서 | 판옥선 | 귀선 | 병선 | 사후선 |
---|---|---|---|---|
격군 | 100 ~ 120 | 90 ~ 100 | 14 | 4 |
포수 | 24 ~ 26 | 24 | 2 | . |
화포장 | 10 ~ 14 | 8 | . | . |
사부 | 18 ~ 22 | 14 | . | . |
타공 및 기타 | 12 | 12 | 1 | 1 |
총원 | 164~194 | 148~158 | 17 | 5 |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 인용
동양의 경우 이미 송나라때 부터 다범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리나라도 역시 돛대가 두개 이상인 다범장선을 신라때에도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때 백제식으로 만든 배나 신라의 장보고 청해진대사가 사용한 무역선들이 모두 돛대를 두개씩 장비한 다범장선이었다. 유럽의 경우12세기 말 한자동맹 도시들의 코크선들도 단순한 횡범 하나뿐인 조악한 선박이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매우 뛰어난 선박건조술과 조종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적 증거가 된다.
또한 범선의 돛은 대게 종범과 횡범으로 나뉘는데 서양선의 경우 횡범은 순풍을 받아 항해하는데 유리한 반면 역풍시 진행이 어렵고 종범은 역풍에 강하나 조종에 많은 인원이 소요된다. 특히 서양의 경우 횡범은 바이킹선이나 고대 그리스의 갤리선에 사용되었고, 종범은 베네치아등 후대 지중해 선에 많이 쓰였다. 이후 15세기 지리탐험이 시작되면서 비로서 이 두가지 종류의 돛을 갖춘 전천후 다범장선박들이 서양에 나타난다. 이에 비해 동양의 선박은 일찍부터 이미 여러개의 돛을 장비하고 항해했는데, 조선시대의 판옥선이나거북선 등도 돛대를 두개 정도씩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돛은 모두 현대 중국의 정크에서와 비슷한 일종의 러그 세일로 돛의 상하변에 가프와 붐을 달고 그 사이 2 ~3자 간격으로 바텐(활대)을 돛폭에 꿰어 시트라는 줄로 돛폭을 조종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돛은 조작하기 용이하고 종범과 횡범의 장점을 고루 갖춰 역행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나라 전함들의 역풍시 강점들은 이웃 중국측 기록에 자주 보이는데, 명나라 화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서 '조선의 귀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마음대로 하고 역풍이든 퇴조 때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각선도본의 판옥선과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들은 모두 두개의 돛대를 눕혀 놓고 있다. 또한 앞에서 보인 삼도수군조련전진도의 천자 1호좌선의 경우 이물 돛대는 세워 돛을 펼치고 한판돛대는 눕혀 놓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판옥선의 경우 범주 이외에도 노를 이용하여 접전시의 기동성을 살렸는데, 이는 동양의 옛날 군선들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에도 16세기까지 운용되고 스페인 무적함대에도 끼어 있던 갤리아스같은 배도 노역을 위주로한 요범선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범선이고 다만 역풍 및 전투시의 기동성을 위한 노가 장비되어 있었다. 특히 판옥선의 노는 큰노 한개를 여러사람이 함께 젖는 것이었다.(판옥선이나 거북선의경우 노 하나당 인원이 5명씩 젖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전함들은 주로 횡범 하나에 한사람이 젖는 작은 노가 여러개 달린 조악한 전함으로 임진란때에도 이런 배로 침입해 왔다. 팔왕자신송원에 보관되어 있는 왜선 모형을 보면 한사람이 젖는 노가 100개 장치되어 있고 돛도 하나 뿐으로 순풍에서나 쓸 수 있는 횡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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