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음악

베토벤 / 교향곡 7번

Ddak daddy 2019. 6. 22. 13:19




베토벤 / 교향곡 제7번



Beethoven,Symphony No.7 in A major op.92

베토벤 교향곡 제7번 A 장조 작품 92  


Beethoven, Ludwig van (1770-1827 G.)

1 Poco sostenuto vivace
2 Allegretto
3 Presto
4 Allegro con brio

Wiener Philharmoniker / Christian Thielemann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격렬한 환호를 끌어낸 초연무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1800년대 초반부터 수년간 베토벤이 구축해온 ‘장대한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후기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곡의 초연무대는 이 교향곡이 만들어질 무렵에 일어난 전투였던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오스트리아와 바바리아의 군인들을 위한 자선음악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초연은 베토벤의 생애에서도 가장 격렬한 환영을 받은 무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향곡 7번〉 때문에 이 자선음악회가 그렇게 큰 환호를 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교향곡 7번〉보다 하나 앞선 출판번호(op.91)를 달고 발표된 〈웰링턴의 승리, 혹은 빅토리아 전쟁〉이 이날 베토벤이 거둔 커다란 성공의 주된 요인이었다. 원래 〈웰링턴의 승리〉는 사람이 아닌, 판하르모니콘이라 불리는 기계가 연주하도록 작곡된 곡이었는데, 이 날 초연무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으로 편곡되어 연주되었다.


베르네, 〈하나우 전투〉, 1824년
베르네, 〈하나우 전투〉, 1824년

   〈7번 교향곡〉의 초연은 이 하나우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이루어졌다.


베토벤과 멜첼

사실 〈교향곡 7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웰링턴의 승리〉에는 요한 네포무크 멜첼(Johann Nepomuk Maelzel)이라는 뛰어난 상공업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생애에 등장하게 된다. 1812년 청력을 거의 상실한 베토벤에게 멜첼은 보청기라는 발명품을 선사해준다. 그는 베토벤을 일종의 실험 대상으로 여기고 보청기가 가진 상업적인 가치를 가늠해보려 한다. 또한 그는 메트로놈의 초기 형태의 발명가이기도 했다. 베토벤은 최초로 악보에 메트로놈 표시로 빠르기를 정확하게 기록한 작곡가가 되었다. 앞서 언급된 〈웰링턴의 승리〉는 원래 판하르모니콘이라는 기계장치를 위해 작곡되었는데, 바로 멜첼이 베토벤을 설득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위한 작품을 쓰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베토벤을 설득하여 이 곡을 진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도록 부탁하기도 한다.

 
멜첼의 메트로놈 발명으로 베토벤은
빠르기를 정확하게 기록한 작곡가가 되었다. 


여러 교향곡을 동시에 작업한 베토벤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칭송을 받아오고 있는 〈교향곡 7번〉의 창작 배경과 관련해서는 그다지 매우 정확한 정보들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했던 1812년, 그의 청각은 거의 상실된 정도에 이르렀고, 그의 창작노트에는 그가 〈교향곡 7번〉과 〈교향곡 8번〉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 정도이다. 하지만 이 창작노트의 기록에 따르면 베토벤은 이 두 곡의 작곡을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중간에 잠시 휴식기를 두고 그 기간 동안 〈교향곡 9번〉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은 〈교향곡 10번〉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쉰들러가 전해주는 당시 청중들의 환호

오늘날 베토벤의 제자이자 그의 전기로 널리 알려진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남긴 기록들은 큰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교향곡 7번〉과 관련해서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이 곡이 초연무대에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이 곡의 초연무대에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이례적으로 앙코르 요청을 받았고, 이로 인해 2악장은 두 번 연주될 정도로 청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또한 쉰들러의 기록은 당시 빈의 신문에 “〈교향곡 7번〉이 황홀경에 이를 정도로 큰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는 기사 가 실리며 신빙성을 얻게 된다.

    



춤과 축제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교향곡 7번〉의 초연 무대 이후, 이 곡은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여러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춤’과 ‘축제’의 분위기는 이 곡을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되었다. 작곡가 베를리오즈에게 1악장은 ‘농부들의 춤’이었고, 슈만에게 2악장 알레그레토는 ‘시골풍의 결혼식’으로 묘사되었다. 바그너는 이 곡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교향곡 7번〉 전체가 ‘춤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이 곡이 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용가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역사상 이 곡에서 누가 무엇을 들었던가와 상관없이 그만큼 〈교향곡 7번〉은 다이내믹한 힘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리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곡을 구성하는 네 개의 악장 중에서 단 한 악장도 느린악장이 없다는 것도 이 곡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브뢰겔, 〈농부들의 춤〉, 1568

브뢰겔, 〈농부들의 춤〉, 1568 

베를리오즈는 〈7번 교향곡〉의 1악장을 가리켜 농부들의 춤이라 묘사하였다


       

브뢰겔, 〈농부의 결혼식〉, 1568

브뢰겔, 〈농부의 결혼식〉, 1568

슈만은 〈7번 교향곡〉의 2악장을 가리켜 시골풍의 결혼식이라 묘사하였다

                


장대한 4개의 악장

매우 긴 서주부로 시작하는 1악장은 A장조, C장조, F장조가 커다란 세 개의 조성적인 축을 구성하면서 진행된다. 원조인 A장조 이외의 (원조와 3도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두 조성은 이 곡의 조성적인 팔레트를 보다 대담무쌍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1악장에서의 베토벤의 목표는 조성 간의 이동, 즉 이조가 아니라 조성 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조성영역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화성적인 영역들을 실험하는 것이다. 당시 청중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은 2악장은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약간의 그로테스크함이 서려 있는 장송행진곡처럼 낮은 음역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움직인다. 이어지는 스케르초 악장에서 스케르초의 트리오 부분은 어쩌면 성지 순례자들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마지막 악장은 전체 곡이 가진 리듬적인 추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Poco sostenuto vivace. 
2 Allegretto
3 Presto
4 Allegro con brio


이 교향곡은 1812년 42세 때의 작품인데 그는 불안한 생계와 귓병, 위병 등으로 몹시 괴로웠을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쉴 사이도 없이 계속 명작을 써냈습니다.바그너는 이 작품을 무도의 신화라 했으며 지금까지 세계의 예술이 창조 하지못했던 명쾌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군이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여 유럽을 휩쓸던 때 였으며 온 유럽의 모순이 집결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향곡은 그 구성과 수법, 내용, 악기의 편성 등에서 볼 때 그의 교향곡 중에서 제1위에 꼽힌다는 것입니다. 리듬의 요소가 강하다는 점 등은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1813년 봄에 루돌프 디공의 집에서 사적인 발표회가 있었고 그 해 2월 8일에 비인 대학 강당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1 Poco sostenuto vivace

 2 Allegretto

 3 Presto

 4 Allegro con br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