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완' 혹은 '막사발'로 불리는 찻사발이 있다. 우리 찻사발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은 일본인 들이다. 그들은 '고려다완(高麗茶碗)'과 '이도다완(井戶茶碗:조선의 막사발)'을 '지상에서 다시없는 예술의 극치'라고 찬미하며 국보 지정도 서슴치 않았다.>
송영학 박사의 <한국인의 솜씨>라는 책에 들어있는 찻사발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찻사발을 '텅 빈 가득함으로 정신을 비옥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것인가.
"수다스럽지도 않고, 뽐내려고 하지 않은 채, 손에 익을 대로 익은 물레작업에서 태어난 찻사발. 조선 도공들의 마음은 흙이었고 가을하늘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솜씨'가 저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다.그만큼 우리 선조들의 솜씨는 뛰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기운을 안고 태어난 조선 도공들의 솜씨는 일본의 아리타(有田)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  | | 이도다완(井戶茶碗) | 일본의 비교민속학자인 도쿄의 센슈대(專修大) '히쿠치 아스시(樋口諄)'교수도 <고려· 조선 도기와 일본인>이라는 논문에서, "평범한 조선의 막사발(井戶茶碗)이 일본에서는 국보나 주요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했다.
"많은 국보와 주요문화재로 지정된 이도다완은 물론, 한국에서 이입된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평가되지 않았고, 현재도 그러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일본 각지에는 200을 넘는 전래명품이 남아있다."
일본에서의 명품을 우리는 왜 막사발로만 취급하는 것일까?
필자와 전남대 역사 탐방팀(단장 : 황상석 박사)은 도조(陶祖) 이참평(李參平)을 모시는 '스에야마(陶山)'신사를 뒤로하고 길모퉁이의 한 도자기 가게로 우르르 몰려갔다. 텅 빈 가게를 지키던 주인 할머니(72세)는 갑자기 밀어닥친 손님들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후쿠시마(福島)지진 이 후 손님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지진이 나면 가장 먼저 깨지는 것이 도자기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나 좋은 날이 올는지...."
'벽에 걸려있는 천황 가족 캘린더는 도쿄의 고객이 매년 보내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꽤나 고급 손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슬쩍 내비췄다. 그러나, 지금의 심정은 말이 아닌 듯싶었다. 할머니의 얼굴이 울상인 이유를 알았다.
호은지(法恩寺)를 찾아서
도자기 가게에서 기념품을 산 필자와 일행들은 할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뒤로 하고 또 다른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다름 아닌 할머니 도공(陶工) 백파선(百婆仙)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이었거늘, '할머니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특이했다.
|  | | 호온지(法恩寺)의 대웅전 |
필자는 먼저 호온지(法恩寺)를 찾았다. 거기에 백파선의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옷이 젖을 만큼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호온지(法恩寺)의 표지판을 따라 다리를 건너자, 작은 절(寺)이 하나 나왔다.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할머니 상(像)이 백파선(百婆仙)을 연상케 했다. 경내는 너무나 조용했고, 스님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멀리 바위에 새겨져 있는 '관세음(觀世音)'이라는 큰 글씨가 필자 일행을 반길 뿐.....
|  | | 백파선을 연상케 하는 여인 상(像) |
가득한 묘비들 사이에서 백파선(百婆仙)의 흔적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파선 법탑(法塔) 안내판'이 있어서다. 안내판에 쓰여 있는 설명문을 옮겨본다.
<이 법탑(法塔)에 새겨진 '만료묘태도파(萬了妙泰道婆)'의 탑(塔)은 '아리타요(有田窯)'창업 초기에 활약한 (통칭)백선의 것이다. 본명은 불명이나, 남편인 심해종전(深海宗伝)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출병(1592-1598)에 종군한 다케오(武雄)의 영주 '고토 이에노부(後藤家信,1563-1622)'가 귀국할 때 일본에 데려왔다. 다케오(武雄)의 우치타무라(內田村, 현 다케오市)에 토지를 주고, 거기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가신들에게 헌상했다. 1618년 종전(宗伝)이 세상을 뜨자, 그녀는 아들이 '헤이자에몽(平左衛門, 宗海)'과 함께 도자기 생산을 계속했다. 그 후 그녀는 아리타에 양질의 도석(陶石)이 발견돼 자기의 생산이 활발하다는 것을 알고, 같이 온 도공들과 함께 이속 '히에코바(裨古場)'에 이주했다. 가족과 많은 조선인 도공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백파선은 1656년 3월 10일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 탑은 증손자 종선(宗仙)이 백파선 50주기인 1705년 '히에코바(裨古場)'의 호온지(法恩寺)에 건립했다. 백파선의 법탑과 아들(深菴宗海居士)의 탑과 손자(湛丘奇與然禪)의 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백파선은 아리타 사라야마(皿山)의 자기(磁器) 창시에 있어서 도래도공(渡來陶工)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  | | 백파선(좌), 아들(중앙), 손자(우)의 비(碑) |
이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파선은 임진왜란 때 남편 심해종전(深海宗伝)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여인이다. 고향은 경상남도 김해(金海). 남편의 일본 이름이 심해(深海)로 붙여진 것은 고향이 김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파선(百婆仙)은 남편이 죽자 아들과 함께 도자기 생산을 계속했고, 이참평이 발견한 백토가 있는 아리타(有田)에 이주해 도자기와 더불어 96세까지 살았던 것이다. 백파선은 여자였지만 리더십이 있었고, 친화력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백파선(百婆仙)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에서 우아한 신선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그녀의 증손자가 1705년에 세운 법탑이라.'
300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비석에 돌꽃이 피어 새겨진 글씨를 알아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용비어천가(龍秘御天歌)'
백파선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다카와상(芥川賞)' 작가 '무라타 기요코(村田 喜)代子)'에 의해 용비어천가(龍秘御天歌)라는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그 후 뮤지컬까지 만들어져 그녀의 존재가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됐다. 아라타 역사민속자료관이 발행한 관보(66호)에 게재된 뮤지컬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소개한다. 뮤지컬은 소설 <용비어천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남편인 '가라시마 쥬베이(辛島十兵衛)'가 죽었다. 고향(조선반도)을 떠나 갖가지 고생을 해서 일본 최초로 경사면을 이용하는 가마(登窯, 龍窯)를 만들어 번주와 장군가에 헌상하는 훌륭한 도자기를 구워낸 남편이 죽었다. 아들을 비롯한 친척들은 '가라시마 쥬베이(辛島十兵衛)'에 어울리는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백파선이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편이 입었던 하얀 옷(白衣)을 높이 쳐들고 백발의 머리를 흔들며 절규했다.
"學生, 鎭川, 張氏, 復一"
자료에는 진천의 백성인 장씨의 혼이 돌아오라고 부는 소리라고 했으나,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작 소설 <용비어천가>에서 비밀스러운 답을 찾았다.
|  | | 소설 <용비어천가> |
"모두 들어라. 여러 가지로 생각했으나, 이번 장성철(張成徹)의 장례식은 조국의 방식대로 한다."
"아이고! 아이고!"
백파는 일본식 화장은 혼(魂)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조선식으로 매장해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장례문화야 말로 좀처럼 바꾸기 어려운 전통적인 관습이리라.
<'가라시마 쥬베이(辛島十兵衛)'에게는 장성철(張成徹)이라는 이름이, '백파'에게는 박정옥(朴貞玉)이라는 본명이 있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을 검증 해야겠지만, 안내판에 쓰여 있는 '본명이 불명이다'는 부분은 어찌할 것인가.
아무튼, 백파선은 도조(匋祖) 이참평(李參平)과 함께 일본의 도자기 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용비어천가>라는 제목에 걸 맞는 여걸(女傑)이었던 것이다. 장성철(張成徹)과 박정옥(朴貞玉)의 본명확인이라는 숙제를 안고 아리타를 떠났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출저: 월간조선 2013.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