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
* 우연히 접한 송가황조라는 영화를 보다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중국 근대사에
관심을 갖게되어 여기저기 자료를 뒤지다보니 그 근간을
대략 이해하게 되어 소개합니다.
청의 멸망, 손문, 장개석, 국공내전 (국민당과 공산당), 일본의 침공 그리고
군벌들의 이야기들이 대략 정리되었다.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 (손문)
(1866.11.12 ~ 1925.3.12)
* 1914.7 일본에서 비밀정치결사조직인 '중화혁명당' 결성하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이다. 그 거대한 나라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거의 외국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청의 지배 계층의 부패와 무능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국민들 역시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아편 문제로 영국과 전쟁을 치렀음에도 여전히 아편은 국민들을 좀먹고 있었다.
게다가 1895년에는 일본에게 마저 졌다.
이 전쟁으로 청은 일본에 타이완과 펑후 열도를 할양하고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이제 중국은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청난 위기감이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에 따른 각성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 황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혹은 뒤엎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모색을 시작했다.
*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에서 태어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쑨원(孫文)이었다.
그는 1866년 11월 12일 광둥 성에 있는 췌이헝이라는 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은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부터 불과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문명의 접경 지역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한 숙명 때문일까. 그가 받은 교육 역시 그러했다.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 교육을 받은 후, 형 쑨메이에게 가서 호놀룰루에 있는
기숙학교인 이올라니 대학에 다녔고 거기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1882년 졸업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타파한다고 마을의 수호신인 목상(木像)을 절단하는
사건을 일으켜 마을에서 쫓겨났다.
쑨원은 1884년 봄에는 홍콩에 있는 퀸즈 칼리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서양인이 운영하는 의과 대학을 다녔고,
1892년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집안에서 약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열여덟 살 때 잠깐 고향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성장기를 홍콩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며 보낸 것이다.

17살, 33살 때의 사진. 1915년 10월 15일 결혼 사진(왼쪽부터)
1893년 그는 의학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청 황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외국의 침략에 분노를 느낀 그는
개혁적 인물인 리홍장에게 중국의 개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써서 보냈다.
그러나 리홍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물여덟의 쑨원은 하와이로 갔고 거기서 흥중회를 조직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청 황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흥중회를 비밀 결사조직으로 다시 결성했다.
그러나 광둥에서의 봉기 계획은 발각되었고 동지들이 처형되었다.
수배 인물이 된 그는 일본으로 갔다.
계획했던 봉기의 실패와 동지들의 죽음은 쑨원을 더욱 단련시켰다.
그는혁명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기 시작했다.
그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서양식 옷을 입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청의 첩자에게 잡혀 중국으로 이송될 뻔하기도 했으나
옛 스승 제임스 캔틀의 도움으로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그는 이 사건의 전말을 기술한 <런던 조난기>를 써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런던에서 그는 대영 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다.
*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 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세력을 키우다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나카야마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세력을 결집했다.
1905년 화교들의 지원을 얻기 위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쑨원은 혁명에
뜻을 품은 망명가들과 연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해 지도자로 뽑혔다.
동맹회의 목표는 청을 전복시키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건설하고 외국 열강을
추방하며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쑨원의 사상은 민족, 민주, 민생주의라는 삼민주의로 구체화되었고,
후에 그것은 동맹회의 사상적 바탕이 됐다.
그러나 도쿄의 쑨원 추종 세력이 크게 불어나자 청은 일본 당국에 압력을
가해 쑨원을 추방하게 했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은 청에 저항하기 위한 단체들을 조직했고,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이들 쑨원 지지자들은 중국 남부에서 번번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1911년 10월 우한에서 시작된 혁명파들의 봉기는 양쯔 강 유역 전체로 번져갔다.
그리고 단 한 달만에 거의 모든 성이 호응을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 공화제를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 내줬으나...
약속 이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쑨원이 귀국했다.
1911년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은 그를 떠들썩하게 환영했다.
12월 29일, 14개 성에서 온 대의원들이 난징에서 그를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일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공포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쑨원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 후,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면 자신의 대총통 자리를 이양해 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쑨원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전쟁이나 내란은 외국 열강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권력보다는 중국 인민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 청의 멸망

위안스카이(왼쪽), 위안스카이에 의해 퇴위 당한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오른쪽)
쑨원의 제안이 있은 뒤 위안스카이는 황실에 압력을 가했고,
2월 12일 황제 푸이가 퇴위했다.
여섯 살 난 푸이에게는 황제 칭호의 유지와 엄청난 양의 연금이 약속되었다.
황제의 직계 가족들도 특별한 대우를 약속 받았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몇 달 뒤, 쑨원은 전국철로전권이라는 직위를 맡았다.
그는 철도 운송이 중국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전국을 돌며 일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1912년 중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그 해 여름 옛 동맹회의 일원이었던 쑹자오런이 국민당을 조직했고,
1913년 2월 선거에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의 싸움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끝이 났다.
3월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쑹자오런(실질적 국민당 당수)이 암살당한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쑨원은 다시 정치로 돌아와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 나갔다.
1913년 11월,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쑨원에게는 이러한 불법적 조치에 대항할 현실적 수단이 없었다.
그 해 9월, 쑨원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 새로운 황제를 꿈꾸다 스스로 몰락한 위안스카이
이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1914년 7월 8일, 쑨원은 살아남은 동지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새로운 조직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조직의 강령뿐 아니라
쑨원의 명령에도 따를 것을 서약해야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오산으로 몰락했다.
점차 독재 권력을 굳혀간 위안스카이는 이제 새로운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1914년, 그는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고, 그를 따르던 장군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다.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했던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제정 부활을
선언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1916년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했다.
하지만 북양 군벌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반발로 인해서 즉위 직후인 동년 3월에 퇴위했고 6월에 사망했다.
이제 중국에는 전국을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었다.
중앙 권력의 부재는 항상 혼란을 낳는다.
그때도 그러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10년간 중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 군벌시대 도래
모든 것이 힘으로 해결되는 시기가 왔다.
10여 개의 군벌이 서로 물고 물리는 세력 다툼을 하는
군벌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군벌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소유한 지방 세력으로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중앙 정부는 광대한 중국 전역에 군대를 파견해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정부의 재정이 궁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의 실력자들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기르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외국 세력과의
결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들끼리도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되기도 하고 동지가 되기도 했다.
* 국민당 정부 수립, 소련의 도움으로 정치적 근거 마련
위안스카이가 죽자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광둥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다.
그곳에서 그는 남부의 다섯 군벌과 연합해 진정한 중화민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어색한 동맹 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베이징에 있던 중국의 이름뿐인 중앙 정부는
북부 지방의 군벌 연합이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쑨원은 자신이 중국 유일의 합법 정부를 대표한다고 주장했지만
열강은 계속 베이징의 지도자들만을 상대했다.
1922년 6월, 쑨원은 군벌에 의해 광저우에서 쫓겨났다.
중국 남부에서 벌어진 군벌 정치의 혼란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혁명 후의 러시아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끌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마르크스 레닌 사상이 중국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소련은 중국을 후원하고 나섰다.
그들은 상하이에 있던 쑨원의 국민당에도 접근했다.
서구의 지원이나 경제적 원조를 얻는데 거듭 실패한 쑨원은
소련의 원조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4년 광저우에 군사학교를 세울 당시의 쑨원 (오른쪽)
1923년에 그들은 협상을 통해 상호우호협력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에서 쑨원은 국민당의 광둥 복귀와 군벌과 싸울 군대의 양성을 돕겠다는
소련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당 입당을 허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반제국주의와 당의 지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민주의가 다시 주장되었다.
소련의 도움으로 쑨원은 광둥에 미약하나마 정치적 근거를 다시 마련하게 되었고,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소련의 도움을 얻어 1924년 국민당은 광저우 인근에
자체 군사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 군관 학교의 교장은 모스크바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돌아온
37살 장제스(장개석)가 맡았다.
국민당의 기구는 공산당과 소련인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재정비되어 갔다.
이제 쑨원은 강한 군대와 정당과 동맹국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건강이 그를 가로막았다.
같은 해 북부에서 권력을 장악한 어느 군벌이 동맹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청했다.
쑨원은 초청을 받아들였고,
12월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협상은 시작되지도 못했다.
그를 초대한 자가 협상을 결렬시킨 것이다.
쑨원이 당한 마지막 배신이었다.
그는 간암으로 입원해, 이듬해 1925년 3월 12일, 60살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중국을 구하라”였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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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가황조의 간략 줄거리 ***
청조가 무너지자 중국은 많은 전쟁을 겪는다.
손문과는 막역한 친구사이이자 재정적 후원자인 송요여(宋耀如 목사)는
그와 함께 공화국을 설립한다.
송요여에게는 애령, 경령, 미령 세 자매가 있었다.
그는 신 사고관을 가지 자로서 세 딸을 일찍이 해외에 유학보내고
세 자매는 미국에서 신교육을 받고 돌아온다.
그는 돌아온 세 자매에게 신 중국 건설에 참여해 줄 것을 부탁한다.
맏딸 애령은 정치, 경제적으로 뛰어난 수단가로서 손문을 도와 일하던 중
부호 공상희와 결혼해 은행업을 시작, 중국의 경제력을 장악한다.
둘째 경령은 언니(애령)의 일을 대신해 손문의 일을 돕다가
27살 연상인 그와 사랑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일본의 한 사당에서 그녀는 손문과 결혼,
혁명적 동지로서 또한 그의 반려자로서 손문의 신봉자가 된다.
중국 권력의 최고봉인 세 딸 중 막내 미령은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드디어 그녀는 손문의 부하이면서 당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중이던
장개석(당시 그는 결혼한 남자였고 미령과의 결혼을 위해 이혼했다)과
결혼하여 중국의 정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두둑한 배짱과 야심으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빛을 발한다.
만주 군벌 장학량에게 납치된 장개석을 그녀는 배짱 담판으로 석방시키고
장개석이 탄 비행기를 한 밤중 남경 공항에 착륙시키려고 1백여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터를 긴급 동원하는 실화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막강한 재력과 권세를 휘두르던 송가황조는 격변의 역사와 함께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신 중국 건설을 도모하며 중국의 국부로 추앙 받았던 손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국은 혼란에 빠지고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은 경령과 이념의 차이로
갈등을 겪는다.
이에 따라 경령과 미령 자매의 우애에도 금이 간다.
서안사변중 감금된 장개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국공합작으로 경령과 미령은 잠깐 손을 잡지만 내전이 끝난 후
세 자매는 서로의 상처,
사랑을 가슴에 묻어 둔 채 각자의 길을 떠난다.
*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러브스토리도 있다
1936년 12월 12일 중국 시안(서안)의 화청궁. 국민당의 2인자였던
장쉐량이 국민당의 수장이었던 장제스에게 총을 겨누었다.
장쉐량이 장제스를 죽인다면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민당을 이끌 기회를 잡았을 지도 몰랐다.
게다가 장제스를 죽여야한다는 주장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단 한가지 요구를 했을 뿐이다.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군과 싸우자고.
그리고 장쉐량이 장제스를 죽이지 않은 이유로 꼽히는 것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이다.
그는 쑹메이링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를 과부로 만들 수 없었다고
수십년이 지난 후 고백했다.
▼ 장쉐량, 장쉐량의 부인, 쑹메이링, 장제스
* 한자를 우리식으로 읽으면 장개석, 송미령, 장학량이 되지만 중국인들이므로
그들의 발음 그대로 장제스, 쑹메이링, 장쉐량이라 읽고 한글표기하였습니다.
▼ (좌) 장쉐량 , (우) 장제스
장쉐량과 장제스의 만남
1928년 장쉐량은 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군벌인 아버지 장쭤린이
사망하자 30살 나이에 만주의 패권을 잡게 된다.
(만주뿐 아니라 중국의 북쪽을 잡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 일본의 침공으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은 국민당이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국민당은
만주의 패권을 지고 있는 장쉐량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것을 지지했고
결국 국민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일본의 만주 침공이 한 몫을 했다.
일본이 쳐들어오고 있었으므로 일본에게 굴복할 바에는 국민당에 들어가 함께
일본과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둘의 시각을 너무나 달랐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고 장쉐량은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장쉐량이 장제스의 아래로 들어간 모양새였기에
그는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 쑹메이링
장쉐량(장학량)과 쑹메이링의 만남
1925년 칭다오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이 상하이까지 번졌다.
당시 상하이를 점거하고 있던 영국 경찰이 발포를 해서 11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장쉐량은 군인 3천명을 이끌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쌍방의 충돌을 조절하고 질서를 유지하겠다고 상하이역 광장에서 선언을 하였다.
그가 서 있는 단상 앞에 쑹메이링이 있었다.
그날 밤 상하이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에서 파티가 있었다.
장쉐량과 쑹메이링이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첫 장소다.
그들은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고 8일간을 이 둘은 어딜가나 함께 다녔다.
서로 웃고 이야기하며 지냈다.
장쉐량은 훗날 자신이 미혼이었다면 쑹메이링을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이 만남 이후 이 둘은 3년 후에나 다시 만나게 된다.
그때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부부가 되어있던 때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쫓아다녔고 당시에는 노처녀로 취급받던
쑹메이링 결국 장제스와 결혼한다.
▼ 쑹메이링과 장제스
다시 1936년의 시안사건으로 돌아가보자.
비록 인질극과 협박의 결과물이었지만 결국 합의를 이끌어내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함께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장쉐량은 합의를 이끌어낸 후 스스로 자수를 하고 지휘권 박탈과
10년형이 구형된다.
사실 그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기에 벌을 받지 않고자 하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우기를 바랬기에
자신 때문에 이 합의가 깨지지 않길 바랬나보다.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후에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부패한 국민당이 져서 대만섬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장쉐량도 함께 옮겨온다. 그리고는 53년간 감금되게 된다.
장제스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나보다.
▼ 노년의 장쉐량
오랜 시간 감금되다보니 그에 대한 논의는 종종 수면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쑹메이링이 장쉐량의 편을 들고 나섰고 장제스는
노여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장쉐량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었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감금되어있었지만 서신을 주고 받을 수는 있었는데 그 동안 쑹메이링은
그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53년이 지나고 장쉐량은 풀려났고 101세에 사망했다.
사실 장쉐량은 인품과 생각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지만
바람둥이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 많은 여인 중 평생 마음에 품었던 여인으로 쑹메이링을 암시했다.
쑹메이링도 그를 평생 마음에 품었던 것인지 그가 죽었을 때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미 그녀의 나이도 100세였다. 몇 년 후 그녀도 사망하게 된다.
* 송경령 (宋慶齡 쑹칭링)
중국혁명가이자 중화민국의 국부(國父)인 손중산(孫中山)의 두 번째 처(妻)이다.
손중산 서거 후인 1940년에 중국국민당중앙상무위원회(中國國民黨中央常務委員會)
제143차 회의(會議)에서 “손중산(孫中山) 선생을 국부(國父)로 존칭하고,
습관상 그녀를 국모(國母)”로 칭한다고 했다.
1946년 7월 23일, 독재(獨裁)와 내전(內戰)을 반대하는 성명(聲明)을 발표했다.
1981년 5월 16일, 전국인대상위회(全國人大常委會)에서
중화인민공화국명예주석(中華人民共和國名譽主席)이란 칭호를 수여했다.
그녀를 ‘송경령선생(宋慶齡先生)’, ‘손부인(孫夫人)’이라고 깍듯이 존칭하고,
주은래(周恩來)는 그녀를 ‘나라의 보배’라고 평가했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에서 그녀를
“위대한 애국주의, 민주주의, 국제주의, 공산주의 전사이다”라고 평가했다.
손문과 송경령
상해 만국공원에 있는 송경령의 묘역
송경령의 생전 모습
1958년 상하이를 방문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함께
건배를 하고 있는 송경령.
기념관에 걸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송경령이 상해에 거주할 당시인 1961년 5월 11일
송경령의 집을 방문한 모택동.
기념관에 걸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 송애령(宋靄齡) : 송씨자매 중 최강의 여인?
송애령은 송씨삼자매중 맏언니이다.
송씨의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송애령의 성격은 아주 분명했다.
그녀는 맏이였으므로, 송애령의 사상은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실제적이었다.
송씨삼자매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
녀들의 소녀시대의 생활은 같지 않았다.
송애령이 어렸을 때, 부친 송요여(宋耀如)는 목사였다.
월급은 은양 15위안이었다.
나중에 <성경>을 인쇄하여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다.
송요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어서 목사의 지위를 버리고, 각종 공상업에 종사했고, 재산을 모으려고 힘썼다.
송애령은 어려서부터 머리속에는 부친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돈을 벌려고 하던
모습이 심어져 있었다.
부모가 세뱃돈을 줄 때면, 그녀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달라고 했고,
그것들을 저금통에 넣어서, 조심스럽게 보관했다.
송애령은 송가왕조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송애령은 상해에서 태어나서,
1904년 미국유학을 한다.
1910년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녀는 먼저 손중산의 비서가 되고, 나중에 여동생 송경령을 소개하여
그 업무를 맡게 한다. 이리하여 손중산이 송경령과 만날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송미령과 장개석의 혼사에서도 송씨집안이 일치하여 반대할 때,
바로 송애령의 적극적 지지로 성사된다.
장씨-송씨의 결혼은 중화민국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된다.
항일전쟁시기에 송애령은 송경령, 송미령과 함께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하고,
중국공업합작사를 지지하고,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부녀지도위원회를 조직하며,
중국아동복지회를 창설하며, 홍콩상병지우협회 회장을 맡는다.
송애령은 대일항전에 열심이었고, 기부하거나 모금하는 측면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송씨 신화의 창조자이면서, 송가왕조를 장악한 진정한 설계자였다.
송애령은 정치무대에서 얼굴을 내미는 일은 드물었지만,
송씨가족이 굴기한 후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녀는 단지 그녀의 남동생, 여동생과 남편을 조종하여 국가대계를 움직이는
수렴청정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한손으로 셋째여동생과 장개석의 결혼을 이루게 해주고,
둘째 여동생과 손중산의 혼인에 대하여는 계속 불만을 가지고,
둘째여동생 송경령에 대하여는 수족지정(手足之情)이 있으면서
또한 동근상전(同根相煎 : 같은 뿌리끼리 전투를 벌임)의 양면을 가진 인물이었고,
서양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중국의 인정과 세상을 잘 알아 삼교구류의 인물과도
잘 관계를 맺었던 여강자이며,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하면서 심계가 깊고, 경영에 뛰어나며,
재물운이 형통한 여부호이다.
그녀는 아주 재미있고, 깊이 생각할만하며,
귀감으로 삼을만한 인생궤적을 살았다.
* 삼교구류 : 삼교(三敎)는 유교·불교·도교 등을 가리키고, 구류(九流)는 원래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 등을 가리킨다
송애령
공상희
"사대가족"의 진정한 수뇌는 송애령이 아니면 안된다.
송애령은 송미령을 통하여 장개석을 조종했다.
송애령의 교묘한 수법은 놀라울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전방은 먹을 게 없고,
후방은 빨리 먹어치우는(前方吃緊 後方緊吃)"의 모습이다.
공상희가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국민정부는 군용비행기를 구입했는데,
송애령은 매번 거기서 커미션을 챙겼다.
장씨, 송씨 및 그 자녀들이 재물을 긁어모을 때 송미령이 개인적으로 재물을 챙겼는지
여부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명할 길이 없다;
다만, 중경, 남경시대에 송애령, 송미령 두 자매가 손을 잡고
이익을 챙겼다는 주장은 많이 있다.
즉, 공상희는 외환을 조작하고, 공채를 조종하며, 은가격에 투기했다는 것이다.
장씨, 송씨가족은 여러 측면에서 상층계급의 부패, 타락의 일면을 대표한다.
재물을 탐하고 호색한 외에 공씨집안의 아래위는 모두 만족할 줄을 모르고,
배를 불리고 나자 대거 음욕을 부린다.
장개석의 곁에서 일을 했던 진희회에 따르면,
공부인 송애령에게는 외간남자가 있었고,
그 외간남자의 처는 다시 공상희의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미국인인 죠셉 알솝(Joseph Alsop)도 송애령의 외간남자가
많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콩하하(孔哈哈)"도 약자는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목표를 찾았다.
심지어 공이소저(孔二小姐)도 여자를 끌어다가 부친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이용하여 중앙은행을 조종했다.
정말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송씨삼자매간에는 아주 복잡한 관계를 나타낸다.
수족간의 가족의 정도 있고, 은원도 있다. 정치도 있고, 사랑과 원한도 있다.
"삼자매의 이야기"는 역사, 정치, 외교, 금전, 감정과 투쟁의 종합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의 경전적인 권력과 매력이 융합된 살아있는 한편의 극이었다.
송경령이 손중산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송애령은 자기의 체면을 위하여 자기의 친여동생인 송경령과 관계를 단절한다.
자기의 원한을 위하여 영한(寧漢, 남경과 무한)분열시,
그녀는 장개석을 지지하고, 자기의 여동생과 반대편에 서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의 정치와 경제욕망을 위하여
자기의 여동생 송미령을 장개석의 품으로 밀어넣는다.
송애령의 성격은 세자매중 가장 강했다.
서가함(徐家涵)에 따르면, "장개석, 송자문(송씨 가문의 아들.. 경령과 미령 사이),
공상희의 세 가족간에 내무마찰이 생겨서 서로간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단지 그녀(송애령)가 큰언니로서 나서서 중재하여 해결하였다.
그녀는 평소에는 집안에 깊이 들어박혀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않았고,
송미령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세력은 직접적으로 국가대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고,
장개석도 그녀에게는 삼푼쯤 양보했다.
" 장개석의 조카손자인 장효진은 일끼지 군통의 두목인 대립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위원장(장개석)의 병은 송미령이 치료할 수 있고;
부인(송미령)의 병은 공부인(송애령)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씨의 병(부패탐욕)은 아무도 치료할 수 없다."
1947년, 송애령일가는 미국으로 간다.
송애령은 1973년 10월 19일 뉴욕에서 병사한다.
당시의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흥미를 갖게 하고 약탈적인 성격을 지닌 주민이
어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거했다.
그녀는 금융상에서 거대한 성취를 얻은 부녀이고,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자신의 정명한 수단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가장 돈있는 부녀가 되었고,
송미령과 장개석을 소개한 중매쟁이이며,
송씨신화의 창조자이고,
송씨왕조의 권력장악의 설계자였다"
이로써 볼 때,
그녀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링크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5948429
* 글씨가 너무 작아 퍼다 노친네들을 위해 글씨만 키웠음
해남(海南) 문창(文昌) 사람으로 본명은 한교손(韓喬孫)인데, 외종숙인 송씨(宋氏)
의 양자로 들어가 성명을 송가수(宋嘉樹)로 개명하였다.
자는 요여(耀如)이다.
손중산(孫中山)과 장개석(蔣介石)의 장인으로,
손중산 혁명 때에 재정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다.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송애령(宋靄齡), 송경령(宋慶齡), 송자문(宋子文),
송미령(宋美齡), 송자량(宋子良), 송자안(宋子安)이다.
그중에 송경령은 손중산과 결혼했고, 송미령은 장개석과 결혼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영화 송가황조에서 발단된 중국 근대사 중 궁금했던 군벌시대와 공산화 과정을
뒤지다 보니 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넘어갈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알아 보았다.
청나라의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 1908년 ~ 1912년,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이자
만주국의 집정 및 황제(재위 : 1932년 ~ 1934년, 1934년 ~ 1945년)이다.
푸이는 고작 3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오르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과의
협약에 따라 이내 퇴위한다.
협약의 내용에 따라 외국 군주의 대접에 준하여 청나라의 황제 대우를 받지만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만주국의 황제에 오르지만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가로 황제로서의
실권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 생활 이후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냈다.
황제로 취임한 푸이
만주국 황제 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