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외교 사례 : 호텔 르완다.
영화로 보는 외교 사례 : 호텔 르완다
- 생명의 외면, 르완다 대학살 -
이 영화는 2004년에 개봉한 영화로 29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관객상 수상, 30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외국작품상 수상 등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개봉 당시 많은 관심을 받은 영화입니다.

실화의 주인공은 바로 폴 루세사바기나 (Paul Rusesabagina). 폴은 르완다의 최고급 호텔인 ‘밀 콜린스'의 호텔 지배인이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약 100일 동안 지속되었던 르완다 학살 때이며, 그는 이 잔인한 역사의 현장에서 1,268명의 목숨을 홀로 지켜냈다고 합니다. 당시 르완다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공존을 위해 평화 협정에 동의하였고 수 십년간 이어진 두 부족 간의 치열한 대립은 끝을 보이는 듯 했습니다. 협정이 평화적으로 진행 될 수 있도록 유엔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었고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이 역사적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르완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르완다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고 후투족 자치군은 대통령 죽음의 책임을 빌미로 온건파 후투족뿐만 아니라 투치족 아이들까지 의심하는 상태였고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후, 갈데없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은 폴이 관리하던 호텔로 피신하였고 그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학살이 종식될 때까지 호텔을 임시 피난소로 삼아 이들을 지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폴은 수천 명의 피난민들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였고 피난민들은 학살이 종식된 후 무사히 UN 진지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가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폴은 세계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2005년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르완다에서 무슨 일들이 벌여졌길래 약 100일 동안 100만여명이 사망하는, 20세기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된 것 일까요? 지금부터 제가 사건의 배경부터 결말까지 사건을 낱낱이 파헤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르완다는 1899년 부룬디와 함께 공식적으로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서유럽 제국들은 서로 앞다퉈 아프리카를 탈취하던 시절이었고 르완다와 부룬디는 식민지 대열에 마지막으로 들어서게 된 것 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은 식민 통치에 어려움을 겪어 물러났고 1919년 부터 벨기에령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중앙아프리카 지역에 이미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던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루안다-우룬디’ 라는 지명으로 바꾸어 벨기에령 콩고의 한 지역으로 간주하고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 지역을 구성하고 있던 대표적인 두 종족이 바로 ‘투치족’과 ‘후투족' 입니다. 식민지배를 받기 전 르완다는 14세기경 북방에서 이주해온 투치족이 후투족과 병합하여 하나의 왕국을 세워서 시작했었고 두 종족이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사용해 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두 종족을 차별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쳤고 이는 곧 서로 간의 인종 차별적인 시각을 갖게 해준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벨기에는 르완다에서 다수 종족이었던 후투족을 고립시켰고 소수 종족이었던 투치족을 우대하여 철저한 교육을 통해 식민통치의 말단 관료 집단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벨기에는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카스트 제도'를 도입하여 부와 직업에 따라 차등을 매기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부유하고 엘리트층이었던 투치족과 그렇지 않은 후투족 간의 차이는 더욱 명확해졌고 차별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아프리카에서도 독립국가 건설을 갈망하는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엘리트층이었던 투치족은 벨기에에 맞서 독립하여 주권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후투족은 투치족의 독립과 함께 벨기에의 간접통치가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반투치' 족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벨기에는 독립을 외치는 투치족을 억누르기 위해 새로운 통치 정책을 도입하여 후투족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959년 후투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학살로 수많은 투치족들이 살해되었고 약 8만명이 국외로 추방되기까지 하였습니다. 1961년 6월 유엔 이사회의 감시 하에 주민투표가 실시되었고 후투족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이 승리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한 반면 이듬 해 7월 르완다는 독립을 이룩하면서 ‘그레구아르 카이반다(G. Kayibanda)’ 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르완다는 이렇게 평화의 길로 걸어가는 듯 했습니다.
1963년 부터 강제 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은 르완다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평화는 깨졌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은 같은 해 12월 약 2만명의 투치족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 후, 1973년 후투족 군부 출신인 ‘하비야리마나(J. Habyarimana)’ 소장이 쿠데타로 카이반다 정권을 무너뜨렸고 정권을 잡으면서 1975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MRND)을 설립, 일당독재 정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는 MRND의 주도로 대통령으로 3선을 거치면서 소수의 투치족을 억압했습니다. 또,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식민통치 시절의 잔재인 인종차별 정책을 다시 도입하였고 이번에는 후투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면서 내용을 더욱 강경화했습니다.
반면, 주변국에 추방된 투치족들은 이에 맞서기 위해 RPF(르완다 애국전선)를 결성하게 되었고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중심으로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게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정권 쟁탈을 둘러싼 갈등으로 르완다 내전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간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중, 한 가지 사건으로 르완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더 악화되었습니다. 바로 대통령 암살 사건인데요.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인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은 테러 공격에 의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르완다 정부는 대통령의 암살 배후로 투치족 게릴라들을 지목했고 극우 후투족 조직들이 다음 날 투치족 출신의 정부 관료들을 포함한 벨기에 평화 유지군 11명을 살해하고 소수의 투치족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투치족 반군인 RPF는 후투족 중심의 정부를 공격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로 이어졌습니다. 1994년 4월 9일 부터 시작된 이 만행은 11일까지 3일 동안 무려 2만명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1994년 7월 4일 투치족의 RPF가 수도를 점령하면서 학살은 종식되었고 투치족이 다시 정권을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후, 르완다 현정부와 많은 인권단체들이 국제사회가 이를 외면했다는 점에 대해 호소했고 1998년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대학살을 방치한 무책임을 인정했습니다. 2000년 벨기에 총리는 추모식에서 식민통치와 인종학살 외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UN 또한 인종학살을 막지 못한 점에
대해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한 바 있습니다.
벌써 르완다 대학살이 종식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인이 약자의 입장에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국제사회가 그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세 또한 분명 필요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