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도서

기독교영성관 / 프란시스 쉐퍼

Ddak daddy 2016. 6. 22. 16:52



진정한 영적 생활



* 쉐퍼, "진정한 영적 생활", 권혁봉역(서울:생명의 말씀사)

*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서울:살림)

I. 저작시기와 동기

1. 저작시기 / 1949년 가족들과 함께 챔패리의 산골 마을에 위치한 르펜즈 산장으로 이주한 쉐퍼는 1951년 영직인 위기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기독교 진리와 그 실천을 재검토하면서 건조창고 속에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때 쉐퍼는 성령충만의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에 기초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쉐퍼 사상의 골격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라브리 공동체가 시작된 것은 이 경험이 있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는 이때 얻은 깨달음으로 윤리서인 "진정한 영성 생활(True Spirituality)"을 저작한다.

2. 저작 동기 / 자신의 실재적 문제가 다가 왔다. 그것은 첫째, 정통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고 기독교의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의 질재를 별로 찾아 볼 수 없다는 점과 둘째, 나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보다 더 약화된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원인을 이러한 것에 대한 성경의 음성을 듣지 않은 것에 있다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자신의 사상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이것을 라브리를 통하여 증거하기 시작했다.

II. 책의 구조

제1부. 죄의 속박에서부터의 현재적 자유

제1장. 유법과 사랑의 법 / 제2장. 죽음의 핵심 / 제3장. 죽음을 거쳐 부활로 / 제4장. 성령의 능력으로

제5장. 초자연적인 우주 / 제6장. 구원 : 과거, 미래, 현재 / 제7장. 신실한 신부

제2부. 죄의 속박의 결과에서부터의 현재적 자유

제8장. 양심에서부터의 자유 / 제9장. 사상의 세계에서의 자유 / 제10장.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치유

제11장. 전인적 인간의 실질적 치유 / 제12장.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의 실질적 치유

제13장. 교회에서의 실질적 치유

III. 세부내용

1부. 죄의 속박에서부터의 현재적 자유

제1장. 율법과 사랑의 법

1. 전정한 영적생활을 위해서 사람은 먼저 중생해야 한다.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무한하신 인격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도덕적 죄책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역사와 시공간상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대속 사역만이 충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가능하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의 시작이다. 육체의 출생은 중요하지만 단지 시작일 뿐이며, 자라나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듯이 영적인 출생인 중생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성화의 영역으로 자라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2. 진정한 영적 생활은 금지항목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거나 또는 그러한 억압을 부정하므로 안일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금지항목을 대면하는 자들은 단지 그 이상의 십계명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대면하게 되며, 금지항목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십계명 전체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3. 진정한 영적 생활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의 탐내는 것은 내적인 것이며, 다른 모든 계명을 어기기 전에 내면에서 일어나는 계명이므로 계명의 축이 되는 계명이다. 또한 사랑의 법은 내면적인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 39)은 탐심은 이런 사랑의 소극적인 면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탐심을 갖지 않는 것과 연관 되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탐심을 갖지 않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욕구가 다 탐심은 아니다. 욕구가 탐심이 되는 때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이 포함되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 이러한 탐심의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첫째, 자신이 만족할 만큼 하나을 사랑하고 있는가와 둘째, 질투하지 않을 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파악해 보는 것이다. 특히 진정한 영적생활의 부정적인 면은 이와같이 탐심을 가진 인간의 본성, 옛 성품을 부인하는 것, 죽이는 것이다.

4. 진정한 영적 생활은 성경적인 부정 뒤에 긍정이 따르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외적인 결과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것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적극적인 것이며, 내적으로 실재적인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내적 실재의 결과가 밖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과 교제하는 모습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대신하여 산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로 역사의 현재적 순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결국, 이상의 내가지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을 이해하는 시작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농락하는 것이요. 죄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 ――→

JX 닮는 삶(배척→죽음→부활)

이땅에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함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

구속의 삶 (배척→죽음→부활)

이땅에 계시는 동안 지속적으로 하심

제2장. 죽음의 핵심


진정한 영적 생활의 부정적인 면은 바로 자신의 안에 있는 탐심을 제거함으로 사랑으로 나가는 자기 부인이다. 성경은 하나님 보기시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롬6:4, 6; 갈2:20, 6:14). 우리가 이러한 자기 부인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향하야 "아니요"라고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세상은 자신을 나타내고, 자아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락의 핵심이다. 이것은 자기 부인의 결핍이요 죄의 시작이다. 눅9:23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를 포기하고)"라고 기록한다. 이것을 "영광 중에 나타나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새"에서 "말씀하실새"는 헬라어로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주님은 장차 자신이 당할 죽음을 말씀하신 다는 것이다. 특히 눅9:22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한말을 보면 구속의 사건에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버림받음, 죽임당함, 다시 살아남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를 원하신다. 특히 이 세 가지 단계에서 앞의 두가지 단계인 배척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목표이셨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우리도 이땅에서의 영적인 삶은 바로 배척과 죽음이다. 그것이 없이 부활을 말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잠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있는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제3장. 죽음을 거쳐서 부활로

예수님의 배척당하심, 죽으심, 부활하심의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건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변화산 사건도 실제 지도상에 있는 사건이요, 부활하신 후의 엠마오 도상에서의 제자를 만난 사건도 시간과 공간에서 실제인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도마에게 보이셨을 때 그의 믿음없음 때문에 만저 보라고 하셨는다. 구운 생선 도막을 잡수시기도 하셨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승천도 역사적 사실이다. 후에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셨을 때에도 다메섹 도상이라는 공간과 정오쯤이라는 시간과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다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재림도 영적인 사실이다. 재림은 가시적인 강림이 공간과 시간과 역사와 결부되어 있음을 설명한다(계19:11-16). 그때에 구원 받은 사람이든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든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이 시점들을 우리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역사적 시점

(JX의 죽으심)

예수님의 구원역사

제2역사적 시점

(JX의 부활)

-------→

제3역사적 시점

(우리도 함께 죽음)

우리의 중생

제4역사적 시점

(우리 함께 살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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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역사적 시점

(과거 죽은자 처럼 삶)

우리의 성화의 삶

제6역사적 시점

(죽었다 살아난 자처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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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적 시점이 우리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우리가 그분이 죽으신 것 같이 영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 존전에서 죽어야 한다. 그 후에 하나님을 대면하고 믿음으로 살아 돌아온 자처럼 사는 것이다. 이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능동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앞에 죽은 모습으로 살며,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난 자 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4장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기록하고 있다. 욥과 아브라함은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히11:17~19). 다니엘도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믿는 자의 부활과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단12:2). 신약에서도 등장한다. 바울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변화산상으로 가보자.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신다. 모세는 장사까지 지낸 사람이요, 엘리야는 들림받은 사람이다. 이들이 지금 시공간 안에서 실제로 산자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신자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말하고 있다. 눅23:43을 보면 한 강도의 신앙에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그날에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죽은 신자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다가 주님의 재림에 다신 부활한다. 그래서 신자의 두 가지 상태를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살아있는 신자는 육체를 지닌체 이 세상에 있다(보이는 세계). 그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 둘째, 죽은 신자는 낙원(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삶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한 사람 처럼 살 수 있는 원동력은 사로 우리가 운데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수동의 삶을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 생활의 방법은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삶(롬6:11)을 말하면,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산자로 여기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가능하다.

제5장 초자연적인 우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두 가지 우주가 있다. 자연적 우주와 초자연적 우주(인격적 우주)가 있다. 자연적 우주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로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특히 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초자연적 우주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계시는 인격적인 우주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두 세계 가운데 살고 있다. 그것은 자연적 세계와 초자연적 세계이다. 초자연적 세계는 우리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이다. 변화산상의 사건을 보자. 그곳은 공간적으로 산꼭대기였고, 시간적으로 다음의 자연적 사건과 연관되는 연속선상의 시간이었다. 그때 예수님이 변모하시고 초자연적 세계가 열렸다.또한 구약의 엘리사의 사건을 보자(왕하6:1617). 엘리사와 함께 한 사환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가 사환을 위하여 기도하자. 사환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군대가 보였다. 이것은 기도하는 순간 모여든 것이 아니라 이미 초자연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와 같이 펼처져 있다가 사환의 눈이 열려 그것을 본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두 세계에서 사는 삶이다. 자연적이며 가시적인 세계에 살아가지만 늘 초자연적이며 불가시적인 존재하시는 인격적 주님의 세계를 사는 삶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에 모든 것이 적용된다. 복음을 전파하는 경우에서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자연적인 세계만을 의식하고 한다면 그것은 실패하는 것이다. 이 새대에 살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실재가 밀려나가고 있는 현상을 점차 발견하게 되었다. 실재는 자연주의적 사상의 장막으로 가리어지고 있는 판이다. 자연주의적 한계가 우리에게 가까이 내려오고 또 그것이 주입내지 내포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침공해 오는 만큼, 이제 실재가 점차적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교리를 중시하며, 순간순간 체험적인 실재가 있다면 그 실재의 영광은 모든 지적인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놓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순간순간 그리스도 및 삼위일체와의 점진적이고도 체험적인 관계이다. 우리는 지금 삼위일체와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이것이 자연적인 세대에 초자연적인 실재를 들어내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이다.

제6장 구원 : 과거, 현재, 미래

성경은 타락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이 지배해야할 세계가 비정상이 되고 말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 회복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목적은 하나님의 덕(찬양)을 드러내기 위함이요(벧전2:9~10).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의 확증과 드러냄의 임무를 띠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올바른 교리, 참된 교리, 성경 교리를 믿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현재의 삶 속에서 초자연적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초자연적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과 가능성과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의도하신 전시(demonstration, 나타내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시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도덕적 전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 그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은 통일성을 가진다. 제1통일성은 우주의 초자연성에 관한 교훈이고, 제2통일성은 현 세계에서 그리도인의 소명에 관한 성경의 교훈이며, 제3통일성은 구원에 대한 통일성이다. 구원의 통일성에서 구원은 역사가운데 실재 하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기초로 하며, 시제적 의미(과거, 현재, 미래)를 지닌다.

구원

과거

현재

미래

칭의(등급없음)

성화(등급있음)

영화

믿음으로(성령의 도우심)

그리스도인 -- 아버지 되심 --> 하나님

그리스도인 -- 연합 ------> 예수님

그리스도인 -- 성령 ------> 내주하심


진정한 영적 생활은 구원의 현재적 부분을 이야기 한다. 칭의 받은 자가 지금 당장 삼위일체의 각 위와 새롭고도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첫째,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셋째, 성령님의 내주로 새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우리가 아니라 믿음으로 내주하시며 순간순간 도우시는 성령님의 대행적 사역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인 것이다.

제7장 신실한 신부

그리스도인 -- 아버지 되심 --> 하나님

그리스도인 -- 연합 ------> 예수님

그리스도인 -- 성령 ------> 내주하심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과 즉각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돌입한다. 우리는 아바 아바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신부가 된다(롬7:4). 또한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새로운 모습을 갖는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신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전체의 대행자로써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 이와 반대로 육체의 일도 성경에는 기록한다(갈5:19~2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대행자로서 성령의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를 맺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다. 성령은 인격적인 영이시므로 근심도 하시고 슬퍼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구원을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내재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유물을 믿음으로 취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


우리가 마땅히 맺어야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무지한 탓이다. 그래서 결실치 못하는 경우이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지식적으로 알면서 행하지 않는 무실천이다. 교리를 알면서도 단지 지식으로 끝나고 소화하여 누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한다. 칭의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고, 성화의 기초 또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다. 믿음이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여 살아야 할 "은혜의 수단들"을 주셨다. 그것은 성경과 기도,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교제이다. 칭의와 성화의 기초는 똑같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칭의란 죄책을 다루며,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죄의 권세를 다룬다. 칭의는 영단번에 완결된 사건이지만 성화는 삶의 매순간순간에 일이다. 이러한 매 순간순간은 역사적 순간의 연속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마리아 처럼 이러한 능동적 수동으로 대응해야 한다. 죄는 이러한 관계들을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접함으로 칭의가 일어날 때 우리는 이 관계를 회복하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지속적으로 인격적인 관계와 교통을 유지하게 된다.

제2부 죄의 속박의 결과에서부터의 현재적 자유

제8장 양심에서부터의 자유

사람은 타락함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 되었다. 또하나 자신과 자신이 분리 되었고, 다른 사람과 자연과도 분리 되었다. 이 장에서는 자신과 자신 분리에서 진정한 영적 생활에 대하여 다루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과 분리되는 것은 죄의 결과이다. 죄의 속박의 결과로 부터의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두 가지에 있어서 우리는 우선 진실해하여야 한다. 첫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여야 하며, 둘째, 죄의 속박에서 자유함에 대한 성경적 교훈에 입각해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전제해야할 진실된 객관적 진리의 사실이 있다. 첫째 사실은 초자연적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성경적 의미에서 구원의 실재이다. 둘째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셋째 사실은 우리의 도덕적 딜레마이다.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여전히 도덕적 죄를 짓는 행위를 말한다.

우선 진정한 영적 생활에서 자신과 자신과의 분리에 있어서 "죄의 속박의 결과"로부터 어떻게 자유해야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중 양심의 잘못된 면에서부터 자유함을 고려해본다. 먼저 두가지 잘못된 태도를 조심하자. 첫째 태도는 완전주의 태도이다. 전적인 완전주의(제2의 축복이 오면 완전해짐)와 순간적 완전주의(중생하는 순간 완전해짐)이 있다. 두 번째 태도는 죄에 대한 무감각과 타성의 태도이다. 죄에 대한 타성에 젖게 되는 위험에 처한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실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것이다. 그런데 죄가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비틀거린다. 여전히 짓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을 상처를 입으며,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됨을 경험한다. 우리는 회복이 필요하다. 어떻게 회복하는가? 그리스도의 완성된 십자가 사역을 근거로 우리는 주님께 다시 자백한다. 죄를 죄로 여기며, 자신의 죄에 대한 뜻을 포기하고, 자백하고 의식적으로 감사하면 우리의 양심을 회복의 경험을 한다.

제9장 사상세계에서의 자유

세상 문화가운데 사상세계는 허망하여지며 미련하여 어두어졌다(롬1:21)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지혜로와 보이지만 우둔하게 되어(롬1:22) 결국 하나님이 그 정욕대로 내어버려 둔다는 것이다(24절). 이와같이 순서를 보게 된다. 처음에 그들의 사상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관념이 있다가, 다음엔 그 관념의 외적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적행위는 내적인 것을 따르게 되며, 외적인 행위는 내적인 것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내적인 것이 있고 그 후에 외적인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적인 것이 원인이요, 외적인 것이 결과이다. 세 단계를 말할 수 있다. 1단계. 내적인 것이 먼저 온다. 2단계.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의 원인이다. 3단계. 도덕적으로 볼 때 내적인 것이 핵심이다. 내적인 것이 중요하면, 이러한 내적인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부터 구별짖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내적인 사상세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사상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하시고, 창조하신 것 같이 인간도 생각하고 일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내면의 사상세계에서 생각하게 되며, 그것이 외면의 삶의 세계로 행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은 내면과 외면의 세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의 모습을 재고해 본다. 첫째, 우리는 선악 간에 모든 것에 대하여 일단 죽어야 한다. 둘째, 성령이 우리 속사람에 내주하신다. 셋째, 사랑은 내적이며, 외적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넷째, 우리는 내적인 성령의 사역에 먼저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능동적 수동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첫째결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의 실재는 반드시 내적 자아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둘째결론. 인간의 진정한 투쟁은 외적인 ㄱ덧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결론. 그리스도인의 생활, 진정한 영적 생활은 언제나 내부, 다시 말해서 사상의 세계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10장 심리적인 무제에 대한 실질적인 치유

인간의 문제는 두 개의 근본적인 영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존재와 실종의 문제이며, 둘째, 인간 실존의 범주의 문제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범주는 하나님과의 차이가 있고, 동물과 식물들과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전제는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둘째 전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 되어 이렇게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로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탈피하고 진정한 범주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할 때 인간으로써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격적이며,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딜레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죄책을 도입한다.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분리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가정한다. 이러한 실용주의 사상이 정신병 환자를 실제로 치료하고 있다. 융(Jung)은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심리적인 사람들에게 죄책의 감정이 등장한다. 그것을 우리는 심리학적 죄책이라고 한다. 인간은 진정한 죄책, 즉 도덕적 죄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죄책의 감정을 느끼는 심리학적 죄책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치료를 가져오지 못한다. 진정한 죄책인 도덕적 죄책을 해결 해야 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가 무한하듯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진정한 죄책도 처리되었고, 따라서 남아있는 죄책의 감정은 진정한 죄책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가공할 만한 비극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1장 전인적 인간의 실질적 치유

실질적 치유를 위하여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 실질적인 치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둘째, 실질적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치유의 역사가 분명히 등장한다. 그러나 누구나 다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따라 판단하신 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실질적으로 치료 받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몸이 되어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다. 탈장병 치료를 받더라도 감기에 걸려서 아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타락의 결과요 그리스도의 재림날 까지 계속된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 높은 표준을 잡으므로 실질성을 상실할 때가 많이 있다. 반역한 인간은 심리적인 결과로 세가지 공포를 소유한다. 첫째, 비인격적 공포다.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한 것 처럼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하고 하자는 말은 곧 인격체가 얼굴 없는 입자에 불과하다는 공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함께하시는 분임으로 극복할 수 있다. 둘째, 비존재의 공포이다. 현대인들은 그의 출처에 대한 아무런 사상도 없으며 존재(Being)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순전히 우연의 연속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바로 비존재의 공포다. 그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거기계시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셋째, 죽음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극복할 수 있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있어서 살펴볼 수 있다. 우월감은 내가 기타 동등한 피조물 인생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한 사람의 피조물이 아닌 거처럼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의 지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당성과 지위는 오직 거기계시는 하나님 앞에 존재함으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열등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열등은 우울과 극과 극이다.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나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신이 피조물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진실로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해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인의 통합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만족할 만큼 유일한 통합점이 있다. 그것은 술, 쾌락, 스포츠, 물질, 음악, 예술, 성행위, 음식, 지식추구 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최종 통합점, 우리 전인의 통합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고 진정한 통합된 삶의 길이다. 이것이 나 자신에게 안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12장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의 실질적 치유

인격의 문제는 사랑과 의사소통의 요소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주된 열쇠가 된다. 사상과 생활에 대한 기독교 체계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한다. 하나님은 항상 인격적 관계에 기초해서 사람을 다루신다. 어떤 경우에도 기계적으로 다루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실질 적인 문제를 살펴본다. 먼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여기는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형성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고, 인간은 인격을 소유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선을 갖는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다르다. 이것은 인격 대 인격의 동등한 관계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심이 된다. 세상은 두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이웃은 바로 두 부류모두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만 이웃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도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가 작용한다. 우리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와 인격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항상 인격적인 관계가 기초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양 타인이 잘 못된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를 법적으로 책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순간 우리는 사랑을 잃고 인격적인 관계를 상실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까지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올바르더라도 우리는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이 관계는 나라, 교회, 가정, 부부 등 모든 인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할 때에는 죄를 고백할 때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은 우리 형제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두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가정의 영역과 교회의 영역이다.

제13장 교회에서의 실질적 치유

성경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신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을 주장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배격하느라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육체가 내면의 세계가 외면의 세계를 향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도 세상을 향하여 의사소통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불려나온 무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상실된 인간성에서 불림을 받아 나온 무리이다. 이러한 교회가 통일성을 갖는 것은 조직적 통일이 아니라 개개의 지체가 머리의 지배를 받아 기능을 함께 발휘하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각 세대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행하신 분이신가를 전시하는 만큼 반드시 하나의 적절한 법적 강조점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초자연적으로 회복된 인류를 대표한다. 교회는 교리 및 생활 양자에 대한 법적 관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교인들을 격려하되 죄의 속박에서부터의 현재적 삶 안에서의 자유와 죄의 속박의 결과에서부터의 현재적 삶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믿음을 전시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고 실천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또한 교회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서도 메시지뿐 아니라 방법에서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님에 관해 교회에 내리신 보편적인 약속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오직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행1:8). 둘째, 성령의 열매를 약속하셨다(갈5:22-25). 셋째, 성령에 관한 보편적인 약속은 부활 하시사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대행하심을 통하여 교회와 함께 주신다는 것이다(요14:16-18).

<의문점> 1. 그리스도인의 결혼관에 있어서 믿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쉐퍼는 비그리스도인과의 결혼도 허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제12장.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