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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음악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

by Ddak daddy 2020. 1. 6.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



I. Allegro tranquillo ∙
II. Adagio cantabile ma non tanto ∙
III. Scherzo. Allegro scherzando giocoso ∙
IV. Finale. Andante lugubre - Allegro moderato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
Paavo Järvi, Dirigent ∙



이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첫 번째 교향곡이다. 차이콥스키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임을 감안하면 공연장에서 접할 기회를 그리 흔치 않아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음악원 수업을 갓 마친 청년 차이콥스키가 특유의 열정과 감수성으로 빚어낸 이 작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가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순수 교향곡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교향시적인 성격을 띤 표제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이 교향곡에는 '겨울날의 환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마도 러시아의 백야와 그 눈 덮인 광활한 대지 위로 떠오르는 환상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나아가 처음 두 악장에도 별도의 표제들이 붙어 있어서 음악 외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울러 마지막 악장에 차용된 가요선율은 토속적인 색채를 한층 부각시킨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조국에 대한 애착과 동경, 그리고 환상을 노래한 청년 차이콥스키의 초상을 엿보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만만치 않은 산고를 거친 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차이콥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는 ‘형의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많은 노력과 고생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순탄치 않았던 작곡 과정


음악원 재학 시절의 차이콥스키

186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콥스키는 그 이듬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개원 준비 중이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책임자는 그의 스승인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었는데, 차이콥스키가 첫 교향곡에 도전한 데에는 아마도 니콜라이의 권유와 격려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봄, 차이콥스키는 음악원 시절의 작품인 [서곡 F장조]가 성공을 거두자 용기를 얻어 생애의 첫 대작인 [교향곡 제1번]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는 밤낮 없이 스케치에 매달렸는데, 교수로서의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얼마 못 가서 체력이 바닥났다. 그런 상황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인 칸타타 [환희의 송가]가 혹평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하지만 그는 불면증과 두통, 그리고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작업을 이어나갔다. 때로는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엄습해 왔지만, 그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그가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작품을 보이며 자문을 구했을 때, 스승의 반응은 냉담했다. 안톤은 제자에게 작품을 고쳐 쓰라고 말했고, 차이콥스키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가을과 겨울에 걸쳐 개정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승의 반응은 중간 두 악장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시연에서는 스케르초 악장만이 단독으로 연주되었는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두 달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이 연주되었을 때는 청중이 상당한 호응을 보냈다. 이 때 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었는데, 아마 니콜라이의 호의와 격려가 없었다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에 대한 도전은 첫 단계에서 그냥 좌초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차이콥스키의 첫 교향곡은 1868년 2월 15일,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차이콥스키는 당연히 니콜라이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그리고 그는 1874년에 이르러 작품에 추가적인 개정을 가했고, 이 최종 개정판은 1883년 12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막스 에르트만스되르퍼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당시 차이콥스키는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모로 미숙한 작품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다 성숙된 작품들보다 재료 면에서 더 풍부하고 낫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