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정기룡 장군 영정 2- 정기룡 장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충의사 3- 상주 충의사 옆에 자리한 정기룡 장군 묘소 4- 정기룡의 일대기를 서술한 매헌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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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1598) 개전 첫 해 조선 땅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귀신 같은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10만이 넘는 왜군 앞에 조선군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백성들이 뿌린 피로 산하는 처절하게 물들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파천했다가 또 다시 조ㆍ명 국경 근처인 의주까지 피신했다. 국운이 통째로 백척간두에 선 이때는 부산 앞바다로부터 왜군의 침탈을 받은 지 고작 두 달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국토 대부분이 왜군 수중에 떨어지다시피 한 그 해 11월의 칠흑 같은 어느날 밤. 경상감영이 있는 상주성 외곽에 갑작스레 거센 횃불의 물결이 일렁였다. 상주판관(尙州判官)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이끄는 수백여 명의 민ㆍ관군 합동부대가 상주성 탈환을 위한 기습 공격에 나선 것이다.
정기룡은 화공전(火攻戰)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적들이 조총으로 조준 사격을 할 수 없는 야밤을 틈타 성 안의 왜군을 향해 불화살을 뿌려댄 것. 난데없는 불길에 놀란 왜군은 허겁지겁 몸을 피해 횃불이 없는 동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건 바로 정기룡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기룡의 부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적군을 베어낸 뒤 마침내 상주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정기룡은 앞서 5월 거창(居昌) 전투에서는 경상우도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의 휘하 장수로서 왜군 500여 명을 무찌르며 임란의 첫 번째 육전(陸戰) 승전보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공훈을 세운다. 또 금산(錦山) 전투 때는 직속상관 조경이 포로로 붙잡히자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그를 구출하기도 했다. 이런 용맹한 모습 덕에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기룡의 연전연승은 패망의 짙은 그늘에 휩싸여 있던 조선 조정과 백성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됐다. 그는 당시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서 잇달아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며 해상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과 함께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는 말도 그때부터 나왔다. 그의 나이 불과 31세 때였다.
■ 출중한 무예에 탄복한 선조, 직접 이름 내려
25세 때 무과(武科)에 4등으로 급제한 정기룡의 무예와 기백은 일찍부터 남달랐다. 당시 과거에서 그가 출중한 활쏘기 실력을 선보이자 선조는 크게 탄복하여 친히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의 부모가 지어준 초명(初名)은 무수(茂壽)였다.
정기룡이 육전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임란 초기 조총을 앞세운 적에게 모든 방어선이 힘없이 무너져내린 바람에 조선 육군 장수들은 지축을 흔드는 왜군의 호각 소리만 들어도 꽁무니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런 터에 정기룡은 언제나 불퇴전의 각오로 전장에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임란 내내 그가 치른 크고 작은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장수 중에 불패 신화를 쓴 이는 사실상 정기룡과 이순신뿐이다.
그는 북쪽으로는 보은과 상주, 동쪽으로는 울산, 서남쪽으로는 하동과 사천에 이르기까지 영호남의 광범위한 땅을 무대로 활약했다. 개전 초기 영남 지방을 초토화했던 왜군은 정기룡의 등장 이후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개전 이듬해 당시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에게 “경상도 전체에 백성들의 인적이 드문데 정기룡이 버티고 있는 상주성에는 10만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며 그를 칭찬하자, 선조는 정3품의 벼슬(상주목사)을 내렸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정기룡의 앞길은 거침이 없었다. 1597년 왜군이 다시 북상(정유재란)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로 임명돼 고령, 성주, 합천, 초계, 의령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낚은 뒤 성주에 경상우도 군영을 구축했다.
■ 이순신 최후의 일전 때 육지서 협공 나서
임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에도 파죽지세를 이어간 그는 1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연합해 사천왜성을 공략했다. 이 때 이순신은 철군하는 왜선을 최후의 한 척까지 섬멸하기 위해 노량 앞바다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임란 종전 후 조정에서는 전쟁 공신을 선별하기 시작해 이듬해 4월 공신녹권(功臣錄券ㆍ공신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의 교지를 발표했다. 총 107명이 공신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전장을 누비며 국난 극복의 최일선에 섰던 공을 인정받은 선무(宣武) 일등공신에는 이순신, 원균, 권율 등 세 장군이 포함됐다.
헌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많은 공신 중에 정기룡의 이름 석 자가 보이지 않았다. 왜군과 단 한 번도 맞선 적이 없는 ‘별 볼일 없는’ 인물들도 적잖이 공신 칭호를 얻은 반면 육군 최고의 용장으로 기개를 떨친 정기룡은 어떤 이유에선지 쏙 빠졌던 것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1605년에 이르러 선조가 정기룡에게 선무 일등공신의 교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우선 당초 공훈 평가가 잘못됐음을 뒤늦게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도승지 신흠을 시켜 발표한 선조의 전교(傳敎)에는 임란 직후의 공신 책록을 바로잡는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그 5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최근 정기룡의 일대기를 재조명하는 역사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일송북)를 출간한 박상하 작가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임란 종전 직후만 하더라도 오랜 전란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심의 이반을 임금과 조정으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시국에 37세의 젊은 장군이 전쟁영웅으로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왕권 유지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 젊은 영웅 등장, 왕권 위협 간주한 듯
즉 선조와 조정 신료들은 당시 정치적, 정파적 고려에 따라 의도적으로 정기룡을 무시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그럴 듯하게 성립된다. 실제 일등공신에 책록된 이순신, 원균, 권율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런 추정에 공감이 간다. 세 명 중 이순신, 원균은 이미 전사한 뒤였고, 권율은 육순을 넘긴 노장이어서 이들을 일등공신으로 삼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1605년에 이르러 정기룡은 이순신, 원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나중에 56세가 되던 광해군 9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다만 그가 쌓아올린 전쟁 신화는 세월의 풍파에 씻겨 희미해진 후였다.
이후 임진왜란사(史)에서 정기룡 장군의 활약이 그리 조명을 받은 적은 없다. 현대에 와서도 사람들은 ‘불멸의 이순신’만 영웅으로 기억한다. 다른 모든 장수들은 그저 이순신을 위한 조연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최근 정기룡을 ‘당대의 영웅’, 나아가 이순신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민족사의 성웅’으로 추앙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쟁 신화의 거점이었던 경북 상주시와 장군의 출생지인 경남 하동군이 특히 적극적이다.
이미 상주시는 매년 정기룡 장군의 상주성 탈환을 재현하는 기념행사와 함께 장군의 탄신일에 맞춰 추념식을 거행해 왔다. 또 하동군은 2008년 9월말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과 함께 ‘임진왜란의 영웅,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이라는 제목의 학술발표회를 연 바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를 출간한 일송북 출판사도 정기룡 장군 재조명을 위한 학술세미나를 조만간 개최, 그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다.
우리 민족사의 중심에 우뚝 서 영원한 귀감으로 살아 숨쉬는 이순신 장군과 달리 오랜 세월 향리에 묻혀 잊혀진 신화로만 남아 있던 정기룡 장군. 과연 그가 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에 부활할 수 있을까.
■ 박상하 작가 인터뷰 "조선왕조실록서 영웅적 면모 단서 찾아내" 사료부족으로 집필작업 애 먹어… 정기룡 연구 이제 첫 걸음
박상하(56) 작가는 지금껏 <명성황후를 찾아서>, <새는 섬에 가서 죽는다>, <진주성 전쟁기>, <이병철과의 대화>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작품을 써 왔다.
그는 “보통 책 한 권 집필하는 데 6개월이면 충분한 속필 스타일인데 이번 작품은 11개월이나 걸렸다. 이제껏 쓴 작품 가운데 가장 힘겨웠지만 또한 가장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꼈다”고 소회를 털어 놓았다.
그가 어려움을 느낀 것은 무엇보다 정기룡 장군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 장군의 일대기를 기록한 <매헌실기>와 그의 행적에 대해 80군데 가량 언급한 <조선왕조실록>이 거의 유일한 역사적 사료였다. 그는 이 책들을 샅샅이 훑고 또 훑으며 정 장군의 삶과 인물상을 복기했다. 경북 상주시 등 정 장군의 흔적이 깃들인 유적지들도 발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다.
그는 취재와 집필을 병행하며 절반 정도 작업을 진행할 때까지 ‘성웅 정기룡’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영웅으로 만들기에는 이야깃거리가 다소 약하다고 본 것이다.
그것 역시 사료 부족 탓이었다. 정 장군 현양 사업을 펼쳐온 상주시의 향토 사학자들조차도 어렴풋한 신화만 말할 뿐 뭔가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직계 후손들도 만났지만 그들이 건넨 자료는 튼실하지 못했다.
그렇게 집필 여정의 중간쯤에서 길을 잠시 잃었던 박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마침내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임진왜란이 종전된 후 한참 뒤 정 장군이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일등공신으로 책록됐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는 쾌재를 불렀지요.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분명한 영웅적 업적을 쌓았던 인물이라는 근거를 찾았으니 말이죠.”
이후로는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400여 년 전의 역사적 인물인 정기룡과 ‘대화’하는 것도 진지하고 즐거워졌다. 그럴수록 장군의 이미지도 또렷해져 갔다.
“정 장군은 공포 그 자체였던 왜군에 맞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장수는 이순신 장군과 정 장군,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무예가 출중할 뿐 아니라 전략, 전술에도 매우 능했어요. 조총을 앞세운 왜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기마전, 협곡전, 야간전 등 전투 방식을 자유자재로 바꿨죠. 무엇보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과 위기도 뚫어낼 수 있다는 열정과 의지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는 점이 이순신 장군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면서 박 작가는 자신의 이번 작업이 ‘영웅 정기룡’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촉발하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랐다. “정 장군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깊이 이뤄지면 다음 번에 그를 다룰 책은 제 작품보다 더 진화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겠죠.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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