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유배 문화에 대한 글 을 읽던중 가슴시린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정헌(靜軒) 조정철 제주목사와 사랑했던 여인 의녀 홍랑(義女洪娘→홍윤애(洪允愛)) 이야기 입니다 정헌 조정철은 1777년 정조 시해 사건과 연류되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인물입니다.
정조 1년(1777)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들었다. 조정철은 그때 27세의 장래가 촉망되던 준수한 청년 선비로 아버지는 이조참판 조영순, 할아버지는 통덕랑 조겸빈, 증조할아버지는 노론 사대신으로 유명한 우의정 조태채였으니, 당시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장인은 노론 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였다.
그러던 그가 장인의 역모사건에 연류되어 죄중에 큰죄인 대역죄인의 몸이 됩니다. 대역죄인에게 참수형은 당연한것이지만 그는 정조의 배려로 제주로 유배를 떠난다. 친정 아버지의 역모 주동으로 남편까지 역모 죄인이 되자 정헌 부인 홍씨는 자진해 버리고 제주도 유배지에 홀로 남게된 정헌. 제주도로 유배온 조정철은 젊은나이에 꿈과 희망이 저버린 자신의 처지에 울고 또 울었을 것이며 좌절과 원망으로 유배생활은 오로지 집에 칩거 두문불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것 같지 않고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것 같지 않은 시간속에 조정에서 보낸 관리에 의하여 언제라도 사사 될수 있는 불안한 나날.....
특히 그는 대역죄인으로 제주목 관아의 특별 감시와 기찰을 받는 힘들고 힘든 생활이였습니다.
그런 정헌에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洪允愛)였다. 이웃집 아가씨 홍윤애에게 서울에서 귀양 온 유배객 조정철은 그야말로 신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육지에서 지원해줄 가족이 없던 정헌은 의탁하던 집에 밥값을 한 푼도 내지 못하는 형편으로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의탁지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자기가 그분을 돌보아드리겠다고 자청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홍윤애가 조정철을 위하여 마련하는 밥상은 소박하고도 조촐했다. 또한 그의 의복, 의복이래야 죄인에게 허락된 것은 흰 무명저고리바지가 고작이었으나 정성껏 지어 입혔다.
홍윤애는 어머니가 생전에 마련해 주고 간, 시집갈 때 쓰라는 비단옷감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 돈으로 섬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인 먹이며 붓, 종이는 물론 서책도 육지를 오가는 상인에게 구하여 정헌에게 시와 글을 쓰도록 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홍윤애의 온정의 손길이 고요히 다가와 그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홍윤애의 마음씨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조정철에게 따스하게 흘러들어 희망의 빛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던중 당파가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가 정조 5년(1781)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주 목사 김시구는 적당한 명문을 만들어 조정철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정철을 불러 갖은 형벌을 가하여 죄목을 만들고자 했으나 뜻데로 않되자 정헌의 거처를 출입하던 홍윤애를 잡아 들이게 됩니다.
조정철의 죄목을 만들기 위한 김시구는 남정네들도 참기 힘든 형벌로 홍윤애는 고초를 당하게 하지요
그러나 홍윤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했다고 합니다. 그 당당함 만큼 목사의 분노는 타올랐고 고문은 강도를 더했습니다. 동헌 마루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린 홍랑은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아니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고통을 잠재우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명할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정철을 지아비로 맞은 지 2년을 못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아이는 이제 겨우 백일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였습니다.
정조가 죽고 새로운 임금이 등장하면서 조정철 유배에서 풀리게 됩니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나이 27살에 대역죄인이 되어 약 30년 귀양살이 끝에 유배에서 풀리게 된 정헌은 그후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제주 목사를 지원합니다. 스물 일곱의 젊은이가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 조정철에게 제주도는 일생의 황금 같은 청춘을 옭아맨 눈물의 땅이자, 평생을 잊지 못할 홍랑과의 인연을 맺어준 그리움의 땅이었습니다. 바로 사랑하던 여인이 있는 제주 목사가 된것입니다. 부임하던 제주도 검푸른 파도를 넘고 넘어 화북포에 내리던 날, 조정철은 마중 나온 관리들의 영접을 뿌리치고 서둘러 어딘가로 갔습니다. 홍랑의 분신이자 유일한 핏줄이던 딸과 함께 홍랑의 묘 앞에서 목매어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무덤에서 밤을 지샜습니다.
제 한 몸 살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의로운 죽음의 길을 걸어간 홍랑.
홍윤애의 비석 둣편에는 조정철의 비문이 새겨있다
홍윤애의 무덤
조정철과 홍윤애의 글을 보며 가슴 시린 감동을 느껴 봅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함께 행복하게 있을 두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1997년 11월 9일에는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양주조(趙)씨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咸寧齋)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답니다. 초헌관은 양주조씨대종회 조원환 회장, 아헌관은 홍윤애의 외손 박용진씨, 종헌관은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이었다. 조정철이 사랑했던, 그사람을 위해 비명에 간 의녀 홍윤애가 186년만에 이루어진 복권입니다. |
아래는 조정철과 홍윤애 이야기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uXUNDqO9KQ
출처: 삶의 향기 보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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