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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

누룩의 어원에 대하여

by Ddak daddy 2018. 5. 30.




                                                                            

 
누룩의 어원에 대하여.....    

        


지난번 중국 술기행 중에, 성도(사천)의 늦은 밤거리를 걷게 되었다.

일행 중 유명한 막걸리 평론가가 계셔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누룩의 어원을 <누르다>라 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그 분은 국문학을 전공한 분이라 명확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얘기가 좀 달랐다. 어원이란 쉽게 밝힐 수 없고,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비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누르다>는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밝힐 수 없고, <누르다>에서 <누룩>이 된 과정 또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그리 얘기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어원을 연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가 마시는 <술>이라는 어원도 일반적으로 <수불>로부터 기원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나로선 선뜻 받아드려지지 않는다. 최남선은 술의 어원을 인도말에서 찾고 있을 정도니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누룩>의 어원은 만주어의 원형인 여진어 ‘누러’라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었다. 과연 그 근거는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나에게 S님께서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라는 김경일님의 책을 권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저자가 역시 오랑캐(胡)의 정체성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 책은 술이나 음식을 연구하는 책은 아니다. 언어학적 접근이 책의 주요 바탕이 되기 때문에 권한 듯하다.

 

여진족과 우리는 음식이나 양조와 관련하여 상당히 깊은 관련을 가진다. 원나라 초기에 씌여진 <거가필용>에는 여진족의 음식이 별도로 소개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우리민족의 음식 원형을 유추하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진어를 통한 어원 접근은 그만큼 가능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는 셈이어서 그분의 주장을 나름대로 정리한다.

 


먼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먼저 걸린다. 단일민족이란 허구를 벗고 보면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거란 등은 고구려 이전부터 거리감이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음식이나 문화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거의 비슷한 출발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훗날 국가체계를 갖추면서 문자를 발명한다. 여진어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1119년경 완안희윤(完顔希尹, 완이엔시이)에게 명하여 만든 글자다. 이 글자는 요(遼)나라 때 거란이 만든 거란문자를 참조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처음 만들어진 후 발전을 거쳐 1145년 이후엔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해독이 된 문자는 아니다. 여진어의 연장선에 있는 언어가 청나라 태종 때 만주족 어학자 다하이가 새로 만든 만주어다. 문자의 창조과정은 조금 다르지만 문자 이전부터 언어가 있었던 탓에 이들 사이엔 많은 관련성이 있다. 특히 서구학자들 중에는 한글 자음을 만주어에서 빌려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을 보면 한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한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속의 복식은 흰옷이 아니며, 고려 역시 그렇다. 조선시대엔 흰옷이 존재하지만 먹고 살만한 양반들의 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비해 여진족의 역사를 담은 <금사>에 의하면 “여진족의 거주지는 누에치기에 적합하지 않아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흰옷을 입었다. 옷감의 거칠고 고운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흰옷을 좋아했다. 남자는 머리에 꿩의 깃털을 꼽았고, 여자는 머리에 두견으로 감쌌다”고 한다. 즉 여진족이라야말로 백의민족인 셈인데, 우리민족이 백의민족이라는 것에서 묘한 여운이 남는다.

 

또 여진족에겐 데릴사위제도가 있었다. “혼인 때 신부쪽 사람들은 모두 온돌 위쪽에 앉아 있고 신랑쪽 사람들은 그 아래 서서 절을 올렸다. 혼례가 끝나면 새신랑은 아내의 집에서 3년간 집안일을 돌본 뒤 3년이 지나야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즉 우리문화속의 데릴사위제도는 여진의 문화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 문화유산으로 알고 있는 하늘의 작은 사냥꾼 ‘해동청 보라매’도 여진의 것이란다. 중국에서 바라본 바다 동쪽이 ‘海東’인데 그게 여진족이 사는 곳이고, ‘靑’은 중국어 발음 ‘친’으로 작은새, 사냥매를 뜻하는 여진어란다.(‘친’은 후대 만주어에서 왜가리류의 작은 새를 의미하는데, 여진족들은 매를 통해 왜가리를 사냥했다고 한다)

 


문자에 있어서의 영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동안 중국 한자에 의해 우리 언어가 많이 변질되었지만 한자에 의해 변질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리말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특히 신체명칭, 친족명칭, 색깔 등의 이른바 일상용어에 그렇다. 눈, 코, 귀, 입, 머리, 손, 발, 가슴, 배.... 등.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언니, 누나, 오빠, 며느리, 마누라, 동무.... 등.

 

그렇지만 아씨라는 단어는 지배계층의 젊은 여자를 일컫는 흉노어이고, 혼례 때 쓰는 연지와 곤지 역시 흉노어다. 여진족의 후대언어인 만주어에 ‘치커’(동물 가죽으로 만든 짧은 상의), ‘치커리’(무늬없는 천)에서 저자는 ‘저고리’라는 우리말이 나왔다고 보며, 만주어 ‘미순’(된장)에서 우리말 ‘맛’과 일본어 ‘미소’가 나왔다고 본다. 우리 전통 음식중의 묵, 그 중에서도 도토리묵, 그것은 여진족의 음식이란다.

 

1757~1759년 사이에 군수로 있다가 정치를 잘못하여 암행어사(윤동승)에게 걸려 당시 두만강 유역의 종성으로 귀양을 간 윤도암자(윤창후)라는 인물이 유배중에 채록한 <수주적록>의 내용을 소개하면,

명칭

여진어(괄호안은 한자음)

만주어

콩류

더투리(두독리)

투리

무커,모(몰)

무커

말(짐승)

무린, 무리

모린

부커, 보(박)

보오

나쁜

어헙

어허

 

이 표에서 저자는 ‘물’의 경우 발음이 ‘무커’, ‘모’ 또는 ‘몰’ 등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콩을 갈아서 물에 가라앉혀 만든 ‘묵’의 어원으로 본다. ‘말’의 경우는 ‘무린’ 또는 ‘무리’의 전형적인 2음절어의 축약햔상으로 이해하고, 한 공간에서 잠도 자고 음식도 만들던 과거 여진과 몽고의 습속을 근거로 ‘부커’나 ‘박’이 부엌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본다. 그리고 어른들이 ‘어험’ 또는 ‘어허’의 경고음은 여진어와 만주어와 닮아있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아골타와 족장들은 모두 조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금에 절인 야채, 풀줄기, 마늘, 넝쿨채소들을 곁들여 먹었다. 또 밥상에는 닭고기, 토끼고기, 사슴고기, 늑대고기, 여우고기, 개고기, 물고기, 개구리들을 삶아놓고 각각 차고 다니는 칼로 베어 마늘즙에 찍어 먹었다”(묘재자서, 송의 스마쿠어)라는 글에서 김나라, 즉 금나라의 여진족들이 먹던 채소, 즉 소금에 절인 채소를 금나라 채소, ‘김채(김치)’라 본다.

 

이런 연장선에서 누룩의 어원을 살펴보자.

18세기 윤창후의 유배 시 쓴 <수주적록>에는 여진족의 막걸리류의 ‘술’을 ‘누러’라 하고 한문음으론 ‘누륵’이라 했다. 그리고 만주어에서도 ‘술’의 의미하는 단어는 ‘누러’다. 이게 누룩의 어원이란 얘기다. 또 만주어에는 막걸리류를 나타내는 단어에 ‘얼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술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말은 우리나라 언어의 수많은 동사들이 그렇듯이 ‘하다’가 붙을 때 그대로 ‘얼크하다’가 된다. 그리고 이 ‘얼크하다’는 음이 ‘얼큰하다’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누룩 어원을 접하며 ‘누러’의 한자음이 ‘누륵’이었음을 볼 때 누룩의 어원으로서 타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막걸리류의 술이 왜 누룩이라는 단어로 축소되었는지는 역시 비약이다. 이처럼 어원을 찾는 과정에서는 비약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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