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스캇 펙 지음 / 손홍기 옮김 열음사 / 2004년 6월 / 421쪽 / 12,000원
▣ 저자 스캇 펙
지은이 M. 스캇 펙은 정신과 의사이자 많은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하버드대학(B.A.)과 캐이스 웨스턴 리저브(M.D)에서 공부한 스캇 펙은 심리상담자로서 미 행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었다. 또한 그는 아내 릴리와 함께 개인과 조직에게 공동체의 원칙을 가르치는 비영리 교육기관인 FCE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현재 북부 코네티컷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본서 외에도 사람, 전통적 가치, 그리고 영적 성장에 관한 새로운 심리학을 전개하여 현대인들의 영적 방황에 길잡이를 제시한 『아직도 가야 할 길』,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장편소설 『창가의 침대』,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악과의 투쟁을 다룬 『거짓의 사람들』, 안락사에 관한 본격적인 정의와 문제를 제기한 『영혼의 부정』, 크리스천적 세계의 여러 차원에 관한 책 『What Return Can I Make?』, 공동체와 평화의 문제에 천착한 『The Different Drum』 등이 있다.
▣ 역자 손홍기
신라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한국학술진흥재단 책임전문위원, Penn State University 초빙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표논문으로 ‘Harold Pinter 극의 언어게임’ 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시멘트 가든』 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에 이은 '길 3부작'의 완결편으로, 스캇 펙의 작품과 사상을 재정립한 작품이다. 저자는 프로이트, 융을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알려져 왔던 교훈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명제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한다. 또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수단인 '진지한 사고'를 강조하며, 삶과 배움 그리고 영적 성장에 관한 길잡이를 제시하고 있다.
-----------------------------------------------------------
▣ 차례
서문
1부 단순함에 대한 저항운동
1장 : 생각하기 뇌를 가지고 있다는 점 / 단순주의와 사회 / 유행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 가설, 고정관념, 그리고 이름 붙이기 / 보편적인 범죄적 사고 / 당신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것 / 다른 사람의 문제는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 좋은 사람들, 나쁜 사람들,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 / 생각하기와 듣기 / 자유와 사고 / 시간과 효율성 / 역설과 성실하게 생각하기
2장 : 의식 의식의 신비 / 전두엽 다시 생각하기 / 창세기 3장의 교훈 / 선과 악 / 악, 죄, 그리고 그밖의 차이들 / 그림자 / 의식과 능력 / 죽음에 대한 의식 / 신과 함께 여행하기
3장 : 배움과 성장 영혼의 역할 / 수동적 배움 / 성장과 의지 /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기 / 나르시시즘과 자기애 / 나르시시즘, 죽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학습 / 새롭게 다시 배우기와 유연성 / 모험으로서의 배움 / 가치와 배움의 선택 / 역할 모델로부터 배우기 / 집단 학습
2부 일상생활의 복잡함과의 투쟁 4장 : 개인적인 인생의 선택 멋진 이기주의와 어리석은 이기주의의 길 / 책임감의 선택 / 복종의 선택 / 직업의 선택 / 감사의 선택 / 품위 있는 죽음에 이르는 선택 / 허무의 선택
5장 : 조직생활에 있어서의 선택 예절 / 체계 / 윤리 / 상호 의존성과 협력 / 책임과 조직 / 경계와 취약성 / 권력 / 문화 / 역기능과 예절
6장 : 사회에 대한 선택 선과 악의 역설 / 인간 본성의 역설 / 권리의 역설 / 책임의 역설 / 시간과 돈의 역설 / 개인적 사례 연구
3부 복잡성이 가진 또 다른 세계 7장 : 신의 과학 과학과 신 / 영성과 종교 / 영적 성장의 단계 / 심리적, 영적 그리고 역사적인 짐 / 통합과 완전함 / 은총과 뜻밖의 발견 / 계시 / 자아와 영혼 / 신성 포기 / 기도와 신앙 / 과정신학 / 영광 / 공동 창조
8장 : 하느님의 '시'
-------------------------------------
서문
이 책의 제목을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라고 지은 것은 나의 첫 번째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지난 20여 년 동안 탐색해 온 여러 주제들을 한 데 묶었기 때문이다. ‘통합(synthesis)'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는 이 책이 목표로 하는 ’넘어섬‘의 의미를 담지는 못한다. 마무리한다는 의미에 덧붙여, 나는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 판사가 말한 한 마디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복잡성의 한 편에 있는 단순함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지만, 다른 편에 있는 단순함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
그의 심오한 감성에 이끌려 나는 이 책을 3부로 나누었다. 1부 ‘단순함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나는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병리현상의 근저에 있는 원시적이고 나태한 단순사고를 비판했다. 2부 ‘일상생활의 복잡함과의 투쟁’에서는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복잡한 선택의 문제를 다루었다. 3부 ‘복잡성이 가진 또 다른 세계’에서는 적절한 지적과 감정적 대가를 치르고 났을 때 우리가 어떤 곳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썼다. 복잡함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에는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는 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겸손한 태도로 인식하게 되는 일종의 단순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1부 단순함에 대한 저항운동
1장 생각하기
한 개인으로서 또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심각한 딜레마 중의 하나는 너무나 단순하게 사고한다는 것, 또는 아예 사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시급히 풀어야 할 문제이다. 진지한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사고하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모두 파멸로 끝나 버릴 가능성은 너무나 커 보인다.
사고한다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며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따라 가야 될 길 또는 방향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필요하며,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에 그 길이 항상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인생의 궁극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이나, 나는 이 대사를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죄’란,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 두려움, 오만 등과 같은 원죄의 복합적 의미이며, 그런 요소들은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이 극한까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다.
‘이성이 진정한 자아를 갖도록’ 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가능한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허용하며 가능성의 극한까지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뇌, 더 구체적으로 전두엽을 신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런 인체기관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뇌는 우뇌와 좌뇌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두 부분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 섬유질로 구성된 흰색 물질인 코퍼스 캘로섬(Corpus Callosum)이다. 이 연결 고리를 제거한 뇌 분리 환자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인식론의 영역에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좌뇌는 연역적 추리 활동에 관계되어 있고, 우뇌는 주로 귀납적 추리 활동에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 인간은 구체적인, 그리고 추상적인 두 가지 중요한 형태의 사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여성은 우뇌 지향성인 것 같고, 남성은 좌뇌 지향성인 것 같지만, 나는 남녀양성적 사고의 절대적 옹호자이다. 양성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녀 공히 양성의 특성을 동시에 보이며, 이 경우 사고는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실체를 통합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일차원적인 단순사고를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믿게 만들어 버리는 데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끼치는 영향이 크다. 단순사고는 사회에 유행처럼 퍼져 있어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문화가 낳은 규범들 중에서도 문화적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규범들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이들은 온갖 치장을 하고 있어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그 껍질을 벗기고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곧 그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위선적 진실이나 분명한 거짓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를 조종하고 볼모로 만들어 버린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말처럼 “진실을 가장한 거짓은 가장 사악한 거짓이다.”
우리 사회의 여러 집단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큰 거짓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은 항상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물신주의와 광고가 만들어내는 거짓이다. 한 시대의 유행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 단순사고의 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을 순응주의로 이끌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을 것과 믿지 않아야 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 단순사고의 논리에 도전해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은 생각하고 학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 무엇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존심, 두려움, 게으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때로는 가장 파괴적인 추론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사실 추론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그에 따른 상투적인 분류방식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되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의 틀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 고정관념은 파괴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잠재적인 파괴적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파만이 유일하게 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신은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어떤 표지를 달고 있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과 사물에 표지를 달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사고장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범죄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경우도 왜곡된 사고가 아니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고 형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을 희생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현재의 시점에만 존재하며, 미래나 그들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는다.
한편 범죄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 측면은 소유권에 대한 태도이다. 자신이 그럴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또는 그들의 재산을 침해하는 일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열등 콤플렉스’에 기인하며,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 심지어는 희생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자신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에서 다른 대안을 찾아보는 일에 태만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반면 ‘우월 콤플렉스’에서 기인된 자만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인종적, 경제적, 가족적 배경 때문에 항상 1등을 해야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비록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최상의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기분 상해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인생에서 최상의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차별이나 착취, 억압 등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사고의 부산물일 수 있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분모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하고 느끼며 진정한 주체적 존재가 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기를 선택한다면, 그에 대한 반발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선택의 문제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도 당신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이것은 자기성찰이면서 동시에 의구심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의심해 본다는 것은 지혜를 쌓아 가는 출발점이다. 정신분석의로서 활동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확실한 신념에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성이 없다면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마침내 의심과 불확실성이 나타나고 커다란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리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임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이 자유에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훈련시킬 책임이 수반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 삶에서 최상의 것을 얻어내기 위하여 우리의 사고력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때로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어 깊이 있게 생각도 하며, 명상과 기도도 해야 한다. 이것은 보다 의미 있고 효율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내가 좋아하는 기도에 대한 정의는, 신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 매튜 폭스의 정의이다. 그는 기도를 ‘인생의 미스터리에 대한 근본적 대응’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전에,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행위인 것이다. 또한 기도가 의미 있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폭동, 동성애, 낙태 등에서부터 빈곤, 질병, 악, 전쟁과 같은 복잡한 사안들에 대해 단순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에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주의와 지적 편협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여러 차원의 측면들을 종합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잘 생각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차원에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성실(integrity)'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전체, 완전, 완성을 의미하는 명사 ’integer'이다. 성실하게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성실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한 환상과 추론을 뛰어 넘어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약 전체 그림에서 한 조각도 빠지지 않고 모든 부분들이 다 통합되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역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진실은 역설적이다. 반면 어떤 개념이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면, 전체 중 몇 가지 측면을 통합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엄격한 개인주의 윤리가 그 한 가지 예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존재이다. 개인임과 동시에 개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얽혀 있고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신비스럽고 역설적인 진실 중의 하나는 인생이 우리에게 고통도 주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수반된다는 점일 것이다.
역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양면의 진실 중 어느 한쪽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마음 속에서 서로 모순되는 생각들을 가지고 곡예를 하는 정신적 곡예술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사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악은 선과 공존한다는 사실- 을 부정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날 때, 환상, 반쪽의 진실, 명백한 거짓을 구별해내는 과정에서 역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역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 차이는 지능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연습량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역설적 사고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그 능력은 더욱 더 확장될 것이다.
오래 전 읽었던 글귀처럼 “일단 우리의 정신세계가 진실로 확장되면, 그것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2장 의식
생각을 한다는 것은 더 의식적이 되는 것이며, 문제 해결의 선행조건이다. 그렇다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또 왜 그것이 중요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잘 알려진 명제가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의식은 결정을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며, 우리의 자연적 인지 영역을 넘어서는 내용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다. 의식 아래에 은폐되고 의식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알 수 없으며, 그래서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식은 계발 가능하다.
오랫동안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고정망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 뇌전두엽 절제술을 해왔다. 수술 절차는 간단한데, 전두엽의 앞부분과 나머지 뇌의 연결 부분을 절단하는 것이다. 이 수술을 함으로써 가장 발달되어 있고 가장 인간다운 기능을 하는 뇌의 일부분의 기능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런 환자들은 분별 있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다. 수술은 그들의 고통을 없애 주었지만, 자아 인식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정서적 반응 영역이 크게 제한되어 버리는 후유증을 남긴다.
인류학과 신경해부학에서 강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인류의 진화 방향이 전두엽과 의식의 발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의 신화도 인간 의식의 진화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인간성에 대한 가장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신화 중 하나인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진화가 의식의 발달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단순히 죄의식이나 수치심보다 더 심오한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의지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모방하여 인간을 창조한 의미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식을 갖게 된 인간은 축복 받은 존재이며 동시에 저주받은 존재이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악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인간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열어 둔 셈이다. 선택이 없다면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그것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 다음의 이야기가 악의 한 가지 예라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창세기 4장에서 카인은 아벨을 살해한 뒤 아벨이 어디 있냐고 신이 물었을 때, “제가 동생의 보호자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것은 피상적이고 거의 조건반사적인 사고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단순하게, 조건반사적으로만 생각하려 하는가? 깊이 있는 사고를 한다는 것은 때로 훨씬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악과 정신이상, 질병과 죄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밝힐 때,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힘을 준다. 악은 미지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원시 종교가 상상력을 동원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질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물론 악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모두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악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악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죄나 악을 단순히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은 잘못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의 포괄적 의미는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목표를 맞추지 못하면 그때마다 죄를 짓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결국 죄라는 것은 ‘끊임없이 완벽해지지 못함’을 뜻한다. 우리는 누구나 항상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는 매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이루지는 못한다. 최선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종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상적으로 스스로를 또는 다른 사람들을 배신하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장 나쁜 경우는 뻔뻔스럽게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스스로에게 완전히 정직해진다면 당신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정직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그 자체가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죄인이다.
칼 융은 인간 악의 근원을 ‘그림자를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거부감’의 탓이라고 했다. 융의 ‘그림자’ 개념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우리 스스로로부터 그리고 타인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은폐하고, 의식의 저 아래로 숨기고 싶은 것들을 가진 정신 영역의 한 부분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죄, 실패, 결함 등의 증거가 드러나 몰리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융이 사용하는 ‘거부’라는 단어의 의미는 훨씬 적극적인 그 무엇을 포함한다. 죄와 악의 경계선을 넘어 버린 사람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함은 양심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양심의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점이다. 즉, 그들의 행위를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악한들은 아주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상당히 의식이 있지만 그들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특별한 경향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악에 대한 가장 간결한 정의는 ‘호전적 무지’이다. 악은 일반적인 의미의 ‘무지함’과는 다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호전적 무지이다. 악인들은 죄의 고통을 참아내거나 그림자가 의식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마주치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그들은 때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들의 죄의 흔적이나,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사실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없애 버리려 한다. 그러다 끝내 어떤 파괴의 행위로 인해서 그들의 악은 저질러지는 것이다.
자신이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무지하고, 이기적이어서 늘 신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반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유익까지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런 개인적인 실패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죄의식이 주어져 있어서 우리의 죄가 통제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막아 주는 가장 효과적인 안전장치이다. 우리가 더욱 더 의식적으로 살아야 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악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한편 우리의 의식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신적 영적 성장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성장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유능한 존재가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능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보다 지혜를 넓혀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개인적인 힘을 갖게 해주는 심리적, 영적 성숙함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심리치료사로 활동해 오면서 나는 일상적으로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심리치료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게 아니라, 당신의 힘을 길러 주려는 것이지요. 이 치료 과정을 다 끝낸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어요.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더 유능해질 거라는 점이지요. 우리가 더 유능한 존재가 되면, 신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더 큰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처음 치료를 받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문제로 고민하면서 이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소한 문제들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큰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쁨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언젠가 심리치료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식 또는 의식의 발전은 자아 계발이라는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으며 의식 계발과 상당히 유사하다. 자아란 인격의 통치부이므로, 자의식의 발달을 포기해 버리고 성인기에 접어드는 사람들은 관찰자로서의 자아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관찰 능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실상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감정과 결함에 대해 제한된 인식을 하는 것에 만족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의 개인적 성장의 과정이 갑자기 멈추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성취할 수 없으며, 진정한 의미의 심리적,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신의 은총과 신비로 인해 운이 좋은 소수의 사람들은 개인적 성장의 여정을 계속하여 관찰자로서의 자아의 성장을 위축시키지 않고 강화해 나간다. 관찰자로서의 자아의 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자아가 충분히 강해지면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단계에 서게 되고, 그 후에는 초월적 자아로 발전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자아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보다 폭넓은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정체성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할 때와 장소, 그리고 이유를 결정할 수 있는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전 영역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의 결점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적어지게 될 것이고 자신 속에 있는 좋고 나쁜 측면 모두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가진 불완전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면, 좀더 나은 위치에서 그런 점들을 수용하고 또 가능하다면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축복은 잠재되어 있는 저주이며, 의식과 통제 능력은 모두 고통과 뒤엉켜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재능 있고 고도의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성과 타협해야 하는 고통에 직면한다. 『새로 태어나려 하는 세계』에서 내가 주장했듯이, 확실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게 된다. 그들이 가진 탁월한 개인적인 능력과 함께 겸손함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의식과 능력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따라오는 또 다른 고통스러운 짐은 전통적인 문화 영역을 초월해야 되는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의식의 수준을 높여 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를 경험한다. 그들의 인식은 영원한 것에 뿌리를 두게 되고, 의식의 진화는 바로 영적 성장의 본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하는 길은 외로운 여정이기 때문에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때로 우리 삶과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들과 의사소통하기 또한 어렵다. 가족들과도 부분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며, 친한 친구나 보편적 문화의식으로부터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의식과 연관된 또 하나의 커다란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의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일 뿐 아니라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젊음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어떠한 암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적절한 준비를 하지 못한다. 또한 이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늙음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된다. 늙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때 저주라고 생각했던 것을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늙음을 준비의 기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 위한 준비기간인가? 나는 연옥이란 고통 없는 배움을 위해서 가장 현대적인 기술과 훌륭한 설비가 갖추어진 정신병동이라고 묘사한다. 내세에서든 현세에서든 우리는 연옥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과 함께 하지 못하고 림보(지옥의 변방)에서 영원히 머물게 되는 것이다. 신과의 관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노년의 문제를 풀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노년기의 상실감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신은 우리의 일부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원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지금까지 나는 의식을 성장시켜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진화의 추진력이 ‘의식의’ 계발로 나아간다고 하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미스터리가 다 풀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식의(conscious)'라는 단어의 라틴어 파생어인 con-scire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의미는 ’~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되다(to know with)'이다. 얼마나 이상한 파생어인가? 무엇의 도움을 받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 뜻을 ‘신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되다’로 해석했다.
나는 심리적 혼란이 무의식보다는 주로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쾌한 내용들은 우리 의식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에 저장되나, 만약 우리가 이런 불쾌한 내용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되면, 무의식은 절대적 기쁨만을 담고 있는 장소가 되고, 우린 그곳을 통해 신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지혜를 인식하게 되면 신은 우리의 무의식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신은 실제로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줄 것이다. 충분히 의식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신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발전은 신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무의식을 향해 의식이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이다. 새로운 진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재인식하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신과 인간이 공유하는 지혜를 알게 된다.
신은 실제로 우리의 무의식을 통해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걸고 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이다. 한편 신은 꿈을 통해서도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꿈을 의식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속에서 신의 출현을 알아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나, 꿈은 무의식이 주는 선물이다.
나 자신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출간을 앞두고 있을 때로, 진실로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문제에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두 주 예정으로 조용한 수도원을 찾았다. 나의 최우선적인 희망은 속세에서 벗어나 있는 이 성스럽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 딜레마를 풀어 줄 수 있는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독재자 같은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 깨어났다. 운전면허증이 있는 아들에게 운전을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 나는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꿈을 이야기 글로 써 놓은 지 사흘이 지나 다시 그 노트를 펼쳤을 때 나는 아버지(father)란 단어의 첫 문자를 대문자 ‘F'로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꿈 속에서의 아버지는 바로 신(Father)이라는 사실을 왜 생각지 못했을까.‘ 마침내 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전은 내게 맡겨.”라는 거창한 신의 계시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도 나는 이 계시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성인이지만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분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3장 배움과 성장
항상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편안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는 배움, 즉 진화해 가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진화’라는 것은 발전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배우게 되면 우리는 퇴보와는 반대되는 개념인 진보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배움은 생각 그리고 의식과 함께 복잡하게 짜여지는 과정이다. 생각이나 의식과 마찬가지로 배움은 결코 단순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다.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나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들은 이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고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거나 여러 가지의 경험들을 비교 분석한다. 한편 나는 영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신앙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증거, 말하자면 신의 은총을 경험했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나는 통계적으로도 증명이 가능한 수많은 신의 은총에 대해서 안다. 과학적으로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불가능성의 통계학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측정된 가능성이 낮을수록 불가능성은 높아지며, 그럴 경우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는 아니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안전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이 발생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은총이란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극히 일어나기 힘든 형태의 사건’이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그런 형태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신의 지문을 볼 수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 세상은 이상적인 인간의 배움터라는 목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이어져야 할 논의는 영혼의 개념에 관한 것이리라. 나는 영혼이란 ‘신이 창조하고, 신에 의해 양육되는, 독특하고 발전적인 불멸의 인간정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키이츠는 이 세상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영혼이 만들어지는 계곡’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의 의미는 배우고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공유하고 있는 환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우리의 삶의 목적은 전생의 나쁜 업보를 없애고, 궁극적으로 이승을 벗어나 부활의 대변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배움에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끊임없는 배움이 우리의 목적이라면,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영혼의 완전함일 것이다. 완전하게 되어 간다는 개념은 우리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거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생을 통해 배울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영적인 발달을 ‘성장’이라고 표현한다. 성장은 필연적으로 배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신과 함께 자신에 대한 공동 창조자가 될 수 있지만, 성장을 거부한다면 공동 창조자의 역할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우리 인생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저질렀던 온갖 어리석음, 편견 그리고 잘못된 생각들을 치유하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수동적 배움에서 능동적 배움으로 나아간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에 의한 배움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극히 신비스러운 인간의 의지와 직면하게 된다. 강한 의지는 인간에게 부여된 보배로운 축복 중 하나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강한 의지가 곧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의지가 약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축복은 잠재적인 저주이기도 하다. 강력한 의지가 잘못되면 못된 성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삐를 매어 둔 의지인가, 아니면 고삐가 풀려 있는 의지인가의 차이는 아주 중요하다. 당신의 의지는 단순히 당신 자신에게만 매어 두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의지는 당신 자신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힘에 매어져 있어야 한다.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성장하려는 의지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나는 사랑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자신을 더 넓혀 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했었다. 순수한 의미에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성장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랑의 능력과 성장의 의지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부모에 의해서 길러질 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 또는 사랑에 의해서 평생 동안 길러지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스스로의 의지로 배움과 성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신의 목적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불가지론자로서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배움과 성장을 계속하지만,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살아 있는 신의 손길 속으로 들어오게 되며, 그들의 영혼은 창조주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할 능력도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 사실상 우리는 모두 자기도취자(나르시시스트)로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자연적으로 타고난 자기도취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린시절 커다란 굴욕감을 경험한 아이들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심한 굴욕감으로 자아가 아주 약해졌고, 그 결과 자기도취의 기준틀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곧 자신들의 생존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아도취가 극대화되는 시기는 사춘기 때이다. 반면 자기도취에서 벗어나기 위한 큰 발걸음을 떼어 놓는 시기 또한 사춘기이다. 자기도취 증세는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이 가진 촉수는 섬세하고 침투력이 강하다. 우리는 매일, 매주, 매달, 매년마다 그 촉수를 계속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좋은 사람, 사려 깊은 사람이 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 있다.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그러나 그 황금률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고급과정이다.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성장하는 것은 협동을 가능케 하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인 면이 있다.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목표이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인간인가 하는 문제와 타협하는 것을 배우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겸손’이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능력을 다 갖고 있지도 않으며 완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장해 가는 데 그러한 인식은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 속에는 우리에게는 더 갈고 닦아 나가야 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느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우리 자신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성숙한 정신건강을 위한 선행조건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자기도취적 상처를 받으며 산다. 그리고 자기도취적 상처 중에서 죽음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아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가능한 일찍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도취를 극복할 수 있는 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예측은 오히려 심리적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커다란 자극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텐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의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자기도취적 생각을 줄여 나갈수록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법을 배우게 되는 기초가 된다. 자신에게만 집착해 있던 눈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신의 존재를 기억해내고 삶의 구석구석에서 신의 모습을 찾아내게 되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지속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감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생명을 구하려 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도취에 빠지려 하는 자는 누구나- 생명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려 하는 자는 누구나 생명을 얻으리라.” 이처럼 모든 위대한 종교가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도 자기도취에서 벗어나는 길은 곧 인생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길이라는 점이다.
이 죽음의 과정 속에는 다섯 단계의 감정 상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거부,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용이다. 죽음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이 보인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마치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같다. 보기만 해도 아름답지만 이런 사람은 흔치 않다. 이처럼 성숙한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상충되는 욕구와 목표, 의무 그리고 책임감 등에서 끊임없이 미묘한 균형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균형 맞추기 훈련의 본질은 새롭게 습득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 새롭게 다시 배우는 동시에 우리 안에 이미 고착화된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려 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두려움은 완전히 공허한 상태로 남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무(無) 또는 무의 상태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이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변화이든 변화는 옛 방식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이미 새로운 방식이 태동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법이다. ‘새롭게 다시 배우기’의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다섯 단계의 죽음의 과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과정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국가의 차원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때로 그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의 주기 속에는 항상 재생(부활)의 기회가 존재한다. 희망은 죽음과 변화를 뒤따라오는 부활의 받침대이다. 희망이 남아있다면 우울의 단계는 필연적으로 수용의 단계로 대체되어진다. 배움은 모험이다. 모험이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런 세계에 대한 강한 욕구가 없어서는 안 된다. 모험을 시작할 때 적어도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인간적이며 또한 매력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험을 통해서만이 많은 의미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모험은 우리를 새롭고 예기치 않은 것에 노출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계 상황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그들의 진실을 솔직하게 다 털어 놓음으로써 영적으로 더 의식화된다.
성숙하고 독자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인생이 궁극적으로 모험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죽음이다. 인간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든, 죽음 이후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도대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게 무엇인가!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이기 때문에, 이승에서의 시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죽음의 순간은 아마도 가장 위대한 영광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훌륭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가지는 본질의 일부이다.
이 모든 배움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태도, 기질, 가치이다. 이들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지만, 각각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요소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지켜가야 할 가치를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성실은 내가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한 가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두 가지는 진실을 지키기 위한 헌신적 태도와 적절한 책임감이다.
진실에 대한 헌신적 태도는 과학자로서의 나의 기질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싶어 하는 인간적 욕망과 싸워 이기려고 수 세기에 걸쳐 채택해 온 일련의 규칙과 절차에 다름 아니다. 과학적 방법을 실행하는 이유는 -과학자 개인의 자아가 방해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좀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 즉 진실에 헌신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과학이란 좀더 차원 높은 권능에 따르려 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차원 높은 권능의 전형 -신은 빛이고, 사랑이며, 진리이다- 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어떠한 존재도 성스런 존재이다. 과학이 모든 의문에 답할 수는 없지만, 제 기능만 발휘해 준다면 아주 성스러운 인간활동이다.
배움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좌우 뇌를 모두 사용하듯 가능한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혼합적인 가치 체계를 개발하기를 권한다.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을 피하려 하거나 불편하게 느끼는 측면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완전성을 배우기 위해서는 남녀 양성적 특질 모두를 포괄하는 데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 총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고, 때로는 우리의 약점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성숙함도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전인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약점을 고쳐 나가는 것보다 더 건강하고 중요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한편,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중 하나이다. 역할 모델은 우리가 큰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내려진 축복이다.
집단도 배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겨우 이런 사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새롭게 개척해야 될 분야이다. 집단의 건강은 개인의 건강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 한 개인이 나머지 삶을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배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처럼, 조직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문명의 존속 여부는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들이 지속적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고, 지속적인 학습조직이 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제2부 일상생활의 복잡함과의 투쟁
4장 개인적인 인생의 선택
삶이 복잡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개인이면서 동시에 가족, 직장 같은 조직의 구성원이고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장에서는 한 개인으로서의 인생의 선택에 초점을 맞춰보자. 모든 선택에 선행하는 것이 의식이나, 의식이 있다고 해서 선택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선택의 범위가 늘어나게 된다.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문제와 도전들을 모두 생산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능력은 곧 정신적 발전을 의미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전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멋진 이기주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문제들을 피해 가면서 어리석은 이기주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신경증적 고통과 실존적 고통을 잘 분별하고 수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의 책임 여부를 선별해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수만 번 되풀이해야 될 과정이다.
훈련은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푸는 수단이다. 그리고 모든 훈련은 복종의 한 가지 형태이다. 우리는 언제 무엇에 대해 복종하고 또는 복종하지 않을 것인지를, 그리고 그 복종의 대상이 우리의 자아인지, 사랑인지, 신인지, 아니면 악의 힘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실존적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말은 복종의 열망을 나타내는 멋진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뜻’이다. 복종이란 단어는 차원 높은 그 어떤 대상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킨다는 의미를 가진다. “신은 빛이요, 사랑이요, 진리이다.” 빛에의 복종은 양심과 특히 자신의 내부적 통찰력이 선택한 것에 따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의 복종은 자신을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 기만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자기 기만은 자아의 그림자를 증대시키며, 동시에 자아에 대한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해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자아를 사랑하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형태의 존재 방식이 있다. 하나는 신과 선에의 복종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악의 힘에 구속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어떠한 대상에도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의 말대로, “우주에 중립지대란 없다. 어떤 곳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신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거나 또는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고 있다.” 선과 악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신과 악마의 중간 지대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
우리는 직업을 선택한다. ‘직업’이란 소명(신의 부름)이다. 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일을, 때로는 아주 구체적인 일을 하도록 소명을 내린다. 신은 우리 각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명은 전적으로 개별화된 것이다. 신이 우리 모두에게 내려 주는 각각의 소명은 반드시 우리를 성공에 이르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밖에도,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선택하고, 지상에서의 우리 삶의 최종 선택인 ‘품위 있는 죽음에 이르는 선택’을 한다. 이 모든 선택은, 우리가 각자의 삶 가운데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를 버린 상태에서, 즉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무지의 허무’ 가운데서 행해진다. 당신의 의지가 항상 선을 지향하고 있다면, 선의 모습이 모호하게 보일 때조차 당신의 무의식은 언제나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면서 의식보다 한 발 앞서 가게 될 것이다.
5장 조직생활에 있어서의 선택
모든 인간의 행위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조직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직 행위의 문제는 인간 심리학의 전 분야를 포괄한다. 조직 행위란 집단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뿐만 아니라, 집단과 조직 그 자체가 어떻게 기능 하는가를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내린 결정이 단지 우리 자신에게만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이 개입된다면, 윤리와 예절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윤리적’이란 의미는 ‘인간적’이란 의미와 통한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은 소중한 존재이고 가능한 그에 따른 대우를 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속적 인도주의는 왜 인간이 소중한 존재인지, 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 결과 흔히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만 세속적 인도주의에 의존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예절 바른 행동을 단순히 ‘윤리적’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의 힘에 복종하는 윤리’라고 정의한다. 빛과 진리, 그리고 사랑이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이런 것들에 복종을 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비록 스스로 종교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성할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하나의 체계이다. 하나의 세포, 기관, 기관계, 개인이라는 차원을 넘어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이다. 또한 이 사회는 다시 바다, 육지, 산림, 그리고 대기와 연계되어 있으며 이 모든 전체가 생태계를 이룬다. 전체 행성은 하나의 생명체이며, 더 나아가 은하계와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체계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체계의 한 구성요소를 변화시키면 다른 모든 구성 요소들 역시 변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이로 인해 우리를 발전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체계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때로 매우 신속하게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전체 체계는 와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체계는 본래 변화와 치료를 거부한다. 역기능과 비용의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조직들은 보다 예의 바르기를 택하기보다는 역기능적인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예절이란 ‘보다 더 차원 높은 힘에 순종하면서 윤리적이고 의식적으로 동기화된 조직 행동’이라고 정의할 때, 예절은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과 행동이 있어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례함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게으름 때문에 우리는 쉽게 무례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개인주의적 윤리는 우리의 약점과 실패를 숨기게 만들고, 인간의 한계를 수치스럽게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절반의 진리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개인적 한계를 인정하고, 상호 의존성이 갖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조직에서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조직은 보기에도 좋지 않다. 그러나 협력이 잘 이루어지면, 그 조직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아름답게 보이며, 궁극에는 영광도 따르게 된다. 물론 서로 다른 책임과 역할들이 이미 규정되어 있는 조직에서는 ‘경계’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계를 존중하도록 요구받는 것과 동시에, 때로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 개입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도 직면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부모나 관리자라는 역할이 갖는 복잡성 속에도 내재되어 있다. 완벽하길 원한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으나,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할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참으로 복잡하고 힘든 역할수행이다. 명심할 것은 이 과정에서 가능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커다란 정신적 노력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실존적 고통을 감내하는 멋진 이기주의에 이르는 길이다. 무례함은 손쉬운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예절 바른 조직이나 권력,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 비용 효과적이다. 또한 이것은 보다 더 치유적이고 생생한 그 무엇을 창조하는 길이다.
6장 사회에 대한 선택
우리는 조직이나 지역,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집합적 존재로서 공존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분명 세계 시민이다. 그리고 이 사회 질서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의 자격을 다해야 할 중요한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에게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선택권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회복지에 대한 모든 책임을 회피할 선택권도 있다. 보다 면밀히 시민 자격의 복잡성을 연구하고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분명히 많은 역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회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는 선과 악의 역설적 진실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사도 바울은, 인간 사회는 그가 사악한 것이라고 표현한 ‘원칙과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했다. 이 사악한 것을 외부의 힘, 또는 단순히 인간의 본성, 또는 ‘원죄’라고 해석하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악한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전쟁, 대규모의 학살, 빈곤, 가난, 기근, 부의 분배에 있어서 커다란 불평등,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폭벽, 범죄, 가정 내 아동 및 배우자 학대 등이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하는가를 고려해 보면, 악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질서인 것 같다. 악의 힘은 우리 눈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보다 교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악 그 자체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평생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악 자체를 영속화시키는 것이다.
반면 냉소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악은 모든 것에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매우 순수하고 아름다울 때조차도 음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최악의 경우를 찾고 있으며, 긍정적이고 삶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절망과 냉소주의가 악마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악을 영속화시킬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악마를 피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악마를 환영하지 않거나 그들과 영합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할 수 있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악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오직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단지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도전은 균형 잡힌 견해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절망이 아닌 낙관주의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950년대 어떤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동양의 한 현자에 대한 것이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낙관주의자인지 비관주의자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물론 낙관주의자입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런데 과잉 상태의 인구, 문화의 붕괴, 전쟁, 범죄 그리고 부패와 같은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기자가 묻자 그 현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20세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는 아주 희망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소명을 받고 있다. 완전함을 지향하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악의 힘을 인식하고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선의 힘을 의식하면서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질 선과 악의 투쟁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염세적 인생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지만, 또한 우리 각자가 미약하나마 세상이 악으로 치달을지 혹은 선으로 치달을 지에 대해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관점으로 인간 본성의 역설을 이해하고, 권리의 역설과 책임의 역설, 시간과 돈의 역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제3부 복잡성이 가진 또 다른 세계
7장 신의 과학
복잡성의 또 다른 측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확성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이라면 ‘신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사실들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확실함만을 강조하는 고지식한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참된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사물을 인지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복잡성의 또 다른 측면은 언제나 획일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다. 인생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미스터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지만, 변화와 치유와 지혜의 습득 과정을 포함한다. 이곳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매우 복잡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갑자기 모두 다 이해가 되어 버리는, 즉 직관적으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현현의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물질(보이는 세계)이라는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역설은, 이 ‘또 다른 세계’에서 나타나는 단순함은 항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은 흔히 아주 복잡한 존재로 여겨진다. 기독교도로서 나는 하느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역설을 포용하는 동시에, 나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뜻이며, 또 나는 그에 대한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칼 융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 두 거장들은 개인적으로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부 뛰어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말할 수 없다.
많은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다. 여기엔 물론 신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을 손에 잡을 수도 측정할 수도 없다고 한다면, 분명히 실제 존재하는 빛, 중력, 원자의 입자도 완벽하게 측정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빛, 중력, 전자기학 그리고 양자 역학과 같은 현상을 탐구함에 있어서 자연과학은 지난 세기 동안 꾸준히 발전하여 이제는 어떤 수준에서는 실상이 완전히 역설적임을 인정하는 수준에까지 왔다. 그러나 아직도 ‘하느님의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는 과학적인 현상과 수많은 우연한 일들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영적 활동에 대한 암시들이 많이 있다.
물질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진실이란 오직 인간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뿐이라는 믿음에 근거해서 살고 있다. 또한 세속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적인 인간일지는 모르지만,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쉽게 상실감을 경험하며, 스스로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종 생의 무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 성스러운 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신성한 존재, 다시 말해 하느님에게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실 세속주의자들보다 자신을 하찮은 존재이거나 무의미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덜 하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성스러운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중요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한 발은 성스러운 의식 속에 또 다른 한 발은 세속적인 의식에 담근 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사람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영성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는데, 그와 같은 변화는 일련의 단계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야곱이 하느님과 함께 겨뤄 이기면서 받은 이름 ‘이스라엘’의 영적 의미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든 사람을 통칭한다. 이것은 지구라는 전체 공동체가 가진 잠재적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이다.
나는 이성을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상상력이 없는 편협한 이성은 반대한다. 모든 현상이 존재하는 것에는 단 한 가지 이유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저주받은 존재가 된다. 그와 같은 제한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교육은 세속적, 아니면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고,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보수주의냐 진보주의냐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믿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를 몰아내고 신앙과 이성의 특성들을 우리의 삶 속에 통합시킬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완전함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나는 ‘하느님과의 결합’을 찬양한다. 양자택일의 사고작용이 아니라, 양자 결합의 사고작용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신비, 이성과 감성, 이성과 직관, 이성과 계시, 이성과 지혜, 이성과 사랑을 결합시키려는 것이다. 이성이 ‘하느님과의 결합’과 이어질 때마다 우리는 역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은 너무나 무한한 존재이기에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수도 없고, 그건 성경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연처럼 하느님의 그 커다란 품을 마주하게 될 때 그때 우리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광의 경험’일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 영광을 갈망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영광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는 점이다. 영광은 우리의 모든 욕망들 중 가장 강력한 대상이기 때문에, 그 욕망은 가장 타락하기 쉽다. 이런 타락을 칭하는 말로 우상숭배가 있다. 이것은 하느님을 표방하는 거짓 우상이거나 그 유사물을 숭배하는 것이다. 악마를 칭하는 이름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우상숭배를 뜻하는 단어들은 아주 많다. 돈, 섹스, 권력, 신제품, 안전, 소유 등등, 이 모든 것은 거짓의 신들이다. 참된 영광은 우리 자신을 참된 하느님께 바칠 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느님과 공동 창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역설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에리히 프롬의 하시디즘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일리가 있다.
이것은 어느 착한 유태인 남자의 이야기로 -그를 모데카이로 부르자- 그는 어느 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천사들이 알고 있는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세요.” 하느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이를 허락하여 그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데카이는 공포에 질려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소리쳤다. “하느님, 당신의 진짜 이름을 잊게 해주세요.” 하느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이것 또한 허락했다.
사도 바울의 다음 말도 프롬과 같은 맥락이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손길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한다.
8장 하느님의 시
사랑하는 하느님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좋은 분이었습니다. 결국 나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향합니다. 이제 나는 나이가 들었고… 아주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은 당신이 여기 우리를 위해 남겨놓은 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가며, 우리의 아픈 몸을 돌보면서, 기다려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껏 이 세상에서 많은 즐거움을 누렸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10년 전 내 친구 짐은 말했지요. "스카티, 우리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여기도 같은 곳인 것 같아." 그리고 1년 후, 바로 그 말을 했던 날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짐은 프랑스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뒤에서 달려온 차에 치어 즉사했습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슬펐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러웠습니다. 저는 당신을 향해 흐느꼈지요. "하느님,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이제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예전처럼 흥분하지 않습니다. 오래지 않아 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이제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는 더욱 더 당신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기에 당신은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처럼 이 세상을 펼쳐 놓았고 그것을 담았던 상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퍼즐 조각들은 너무나 형형색색 아름다워서 어린아이에 불과한 우리는 그 조각을 집어 들고 놀이를 시작합니다. 애써 한 조각씩 맞추어 갑니다.
그러나 그 퍼즐은 너무 큽니다!
결국 우리는 깨닫게 되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완성할 수 없다는 걸. 이것은 우리가 당신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는 절망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다면 배울 건 또 있습니다. 사실 그 퍼즐은 너무 거대하지만 재미있다는 거지요. 어쨌든 우리는 이 퍼즐을 한 조각씩 맞추어 나갑니다. 순전히 운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본능에 의해 우리의 손과 눈이 움직여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몇 조각을 맞추면 전체의 모습이 얼핏 스쳐가기도 합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마침내 몇 개의 맞춰진 조각들 속에서 숨어 있는 신비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그 조각들을 서로 단단히 맞추어 보는 순간 그것은 이상한 기호가 됩니다. 그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당신들은 서로 사랑합니까?"
이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저는, 당신이 내리신 은총으로 이 게임을 아이들의 놀이보다는 더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상자 위에 그려진 완성된 그림을 보게 되거나, 또는 당신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인도되어 감동받아 전율하는 제자로서 퍼즐을 만들 톱 한 자루나, 아니면 한 자루의 그림붓이라도 받아 들게 될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그 동안 이 게임의 주인공이 당신이라는 것을 제가 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