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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서평

공부에 미친 조선 선비들

by Ddak daddy 2015. 9. 5.

 

 

 

 

"공부에 미친 조선 선비들"을 읽고

나는 조선시대 유학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생활을 도외시한 학문의 추구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주변부에 위치하게 만든 큰 원인을 조선시대 유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이런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고 그래서 동양철학, 성리학을 대하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한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단지 나의 느낌일 뿐이므로, 왜냐하면 나는 잘 모르니까. 그런데 다 알고 생각을 말하고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있을까?

그러나 그 조선시대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조금 범위를 좁혀서 우리시대 사람들이 나이가 들도록 손을 놓을 수 없는 공부를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했을까? 도서관 신간코너 앞에 서서 책을 고르다 이 책이 손에 잡힌 이유다.

1부 조선을 이끈 성리학의 선비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영수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성리학은 고려시대 안향을 시초로 목은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정도전과 권근 등에 의해 조선의 국시가 되었으나 조선시대 성리학을 정립한 인물은 점필재 김종직이고 그의 1대 제자 김굉필(1454-1504)에 이어 2대 제자 조광조(1482-1519)에 이르러 활찍 꽃을 피웠다.

1457년(세조3년) 김종직은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조의제문」을 지었다. 훗날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기록하면서 연산군시대에 엄청난 사화로 발전한다.

김종직은 공맹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신들이 잡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명분과 절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김종직은 보위를 찬탈한 세조의 행동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조가 죽고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성종이 사림파를 중용하여 김종직은 조정에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조선 주자학을 확립한 퇴계 이황(1501-1570)

읽고 또 읽고 사색하여 성리학을 사상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이기이원론(사단은 이가 일으키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일으키는 것이다.)을 주장했으며 영남학파를 이끌었다.

장원급제 아홉번의 전설 율곡 이이(1536-1584)

『자경문』을 짓고 공부에 전념했다. 자경문은 모두 11조인데 1. 입지:뜻을 크게 가지고 성인을 본받되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2. 과언:말을 적게 하라.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말을 줄려야 한다, 3. 정심: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잡념과 집착을 끊고 쉬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 4.근독:언제나 경계하고 조심하면 자연히 일체의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5.독서: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이유는 의리를 살펴 일을 할 때에 쓰기 위한 것이다, 6. 소제욕심: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욕심을 버려라, 7. 진성:모든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앟고 성실해야 한다, 8. 정의지심:천하를 얻더라도 불의로 얻어서는 안 된다, 9. 감화:누군가 나에에 악한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돌이켜 깊이 반성하여 그 사람을 감화시켜야 한다, 10. 수면:마음을 항상 깨어있게 하고 바르게 자야 한다, 11. 용공지호:공부는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서두르지 않고 늦추지도 않아야 한다.

이이는 기호학파의 유종으로 떠받들어졌다. 기호학파주기론(일어난 것은 기이며, 이는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다.)을 내세웠다.

벼슬을 거부한 재야 학자 남명 조식(1501-1571)

조식은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나 명종과 문정왕후, 윤원형을 상소를 올려 거칠게 비난했다. 이 상소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조식은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내면서도 현실 정치의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폐정 개혁을 요구했다. 그의 사상은 경상남도 일대의 학풍이 되었다. 그러나 이황의 문인들은 대부분 남인이 되고 조식의 문인들은 북인이 되었다. 북인은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몰락했다.

조식은 철저한 절제와 자신에 대한 경계를 가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높은 도덕성을 견지했다. 또한 단계적이고 실천을 염두에 둔 학문을 주장하여 남명학의 고고한 학풍을 이루었다.

2부 재능을 감출 수 없었던 여성 선비들

여성백과사전을 펴낸 빙허각 이씨(1759-1824)

남편 서유본과 평생을 친구처럼 지내며 여성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규합총서를 편찬한 여성 실학자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규합총서』 「주사의」: 온갖 술을 담그는 법과 음식과 반찬을 만드는 법을 기록

『규합총서』 「봉임칙」: 옷 만들기, 길쌈, 그릇 때우기, 불 켜는 법 등 모든 잡방

『규합총서』 「청낭결」: 태교와 병을 다룸

『규합총서』 「산가락」: 농촌에 살면서 농사짓는 법, 밭 갈기, 가축 기르기 등

『규합총서』 「술수략」: 집 정하는 법과 벽사진경의 속방이 기록 됨

빼어난 시어로 감동을 준 난설헌 허초희(1563-1589)

동생 허균은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한 허난설헌의 시를 모아 유고집을 엮고 유성룡에게 청하여 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후대에 높이 평가된다.

여성 문학 동인을 결성한 금원 김씨(1817- )

금원은 관동 지방의 금강산 및 관동팔경, 관서 지방의 의주와 한양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시와 산문으로 쓴 『호동서락기를 남기고 용산 삼호정에서 활발히 문학 활동을 했다.

금원은 기생의 딸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규당학사 김덕희의 소실이었다. 김덕희는 성균관대사성까지 올랐다.

성리학자로 명성을 드높인 정일당 강씨(1772-1832)

정일당 강씨는 여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속 공부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일당 강씨가 죽자 평생을 벗처럼, 스승처럼 지냈던 남편 윤광연은 정일당이 남긴 시문을 모아서 『정일당유고를 만들었다. 정일당은 누구보다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다. 시집은 너무나 가난하여 사흘 동안 한 끼를 먹지 못한 적도 있고 집도 없이 떠돌았다. 자식은 아홉이나 낳았으나 모두 돌이 되기 전에 죽어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스럽고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여성성리학자로 우뚝 섰던 것이다.

3부 실학으로 조선을 개혁하려 한 선비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마괴회통』『아방강역고』등을 저술한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다.

정약용은 북학자들과 함께 실학사상을 실천했는데, 이는 학행일치의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오학론을 써서 당대의 주요 학문인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을 지적하여 그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철저하게 실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조선의 자연과학자 담헌 홍대용(1731-1783)

그는 자연과학에 몰두하면서 평생을 가난과 벗하게 되었다. 그는 지전설을 주장하고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여 천문학과 자연과학을 발전시켰다. 홍대용은 그의 저서 『유포문답』에서 서양 학문은 산수를 근본으로 삼았다고 평가했다. 홍대용은 연경을 방문했을 때 서양인 선교사인 흠천감 유송령과 부정 포우관을 만나 천주교와 천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의산문답』은 홍대용의 철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방대한 논의가 담겨 있다. 특히 중화사상을 부정하고 우주의 기원과 지구 창생까지 설명하고 있어서 천문학자로서의 높은 식견을 살펴볼 수 있다.

신문물 도입을 주장한 연암 박지원(1737-1805)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그가 남긴 소설들은 양반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등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변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저술한 영재 유득공(1749-1807)

어머니 남양 홍씨가 첩이라 서자의 신분이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여 유득공을 공부시켰다. 영조가 서얼허통을 하여 서자도 과거를 볼 수 있었으나 과거 급제는 어려웠고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얻지 못해 가난했다.

유득공은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통일신라 이전의 시와 향가를 모아서『삼한시기』편찬했고, 시작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과 의기투합하여『한객건연집』이라는 시집을 엮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발해 역사서 한 권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고 『발해고』를 편찬했다. 발해사라 아니하고 발해고라 하는 것은 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나 발해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없어 역사서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발해고』와 함께 『경도잡지』『영재집』『고운당필기』『앙엽기』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4부 신분의 한계에도 학문을 사랑한 선비들

일본을 들썩이게 한 천재적 시인 송목관 이언진(1740-1766)

이언진은 대대로 역관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책을 읽고도 부족하여 내용을 전부 베껴 적기도 했다. 그는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이 되었다.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을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장씩 쓰곤 했다. 1763년(영조 28년) 통신사 조엄을 따라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글과 문장으로 일본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재능이 출중했으나 불과 27세에 요절했다.

박학다식한 역관 성재 고시언(1671-1734)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역관이 되기로 목표를 세우고 공부했다. 나이 17세에 통역관을 톱는 과거에 응하여 급제했다. 고시언은 역법에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중국에 갔을 때역법에 관한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시언은 영조의 영에 의해 종2품까지 올랐다.그러나 여전히 역관이었다.

고시언은 평밍의 시가 책으로 편찬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여 『소대풍요』시집을 였었다. 『소대풍요』가 나오면서 중인들과 천민들도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했다. 평민들은 주갑(60년)마다 속집을 간행하는 의지를 보였다. 1주갑이 되는 1797년(정조 21년) 『풍요속선』7권 3책이 간행되었고, 2주갑이 되는 1857년에는 『풍요삼선』이 나왔다.

고난 속에 글을 익힌 천민 선비 박돌몽

박돌몽은 대궐에 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기인공인 김씨의 종이었다. 박돌몽은 주인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어깨넘어로 공부했다. 그의 아내는 돌몽의 공부를 도왔다. 박돌몽은 이웃에서 글을 가르치던 정차후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판서를 지낸 조진관의 아들은 우연히 박돌몽을 만나게 되고 그의 학문에 감탄했다. 조진관의 아들은 박돌몽을 면천시켜 주고 전옥서의 아전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일개 종의 신분으로 경서를 읽는 그를 사람들은 선비로 대접했다.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라 부른 청장관 이덕무(1741-1793)

이덕무는 조선의 제2대 정종의 열다섯째 아들인 무림군 이선생의 14세손이었다. 이덕무는 집안이 가나하고 서자였기 때문에 스승도 없이 혼자 학문에 전념했다. 이덕무의 부인은 무인으로 유명한 야뇌 백동수의 누이이다.

이덕무는 26세에 『이목구심서』를 지었다. 『이목구심서』는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이덕무는 서자의 신분으로 잡직 벼슬을 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규장각검서관을 지냈고, 백동수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그가 가난하게 살다 죽자 정조는 조정대신들에게 유고집 비용을 갹출하게 하여 『아정유고』가 간행 되었다.

그는 슷로를 책만 아는 바보라 하여 『간서치전』을 지었다.

16명의 이름을 쓰고 나니 뭔가 마음이 숙연해진다. 내 마음을 숙연해지게 하는 뭔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16명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그냥 버릴 수 없어 각장마다 '조선의 공부 달인들'이라는 코너로 한분씩 더 소개해 놓은 16명의 삶도 많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후기 정일당 강씨는 가난한 몰락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학문을 좋아했으며 20세에 역시 몰락 양반가의 6세 연하 윤광연에게 시집가서 장사를 하는 남편을 설득하여 학문에 몰두하게 하여 남편은 밤낮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강씨는 삯바느질, 길쌈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강씨의 노력으로 남편은 학문의 명성이 높아갔으며 강씨 또한 살림을 하면서도 남편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그녀의 학문은 남편보다 앞서갔다고 한다.

강씨의 노력으로 윤씨 집안은 살림이 넉넉해져서 임야와 전답을 소유하였으며 가난한 친지들을 돕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씨는 윤광연과의 사이에서 9남매를 낳았지만 모두 첫돌 전에 죽고 양자를 들였다고 한다. 강씨는 남편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지만 당시 가부장적이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였기에 강씨의 학문은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다. 강씨를 아는 주변의 유학자들은 강씨를 뛰어난 성리학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녀가 61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멀리서부터 수많은 유생들이 찾아오거나 수많은 조문을 보냈다고 한다.

 

*정일당 강씨를 볼 때에 살아가면서 여자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일당 강씨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뛰어난 학자로서 이름을 떨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