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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서평

한국민담의 심층분석

by Ddak daddy 2017. 1. 24.




<한국 민담의 심층분석> 에 기초한 민담읽기 - 이계정(2006/4/14)

 

그 이야기가 해석자에게 주는 감동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선녀와 나무꾼, 아니마를 찾아서-

 

· 줄거리 요약

가난하게 노모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이 어느날 사냥꾼에 쫓기던 사슴을 숨겨 구해준다. 사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선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늘에서 선녀들이 목욕을 하러 내려오면 그중 가장 아름다운 셋째 선녀의 옷을 숨겨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되, 아이 넷을 낳기 전까지는 선녀의 옷을 돌려주면 안된다는 것. 나무꾼은 사슴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여 딸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선녀는 자신의 옷을 보여달라고 하는데 나무꾼은 별 생각없이, 사슴의 경고를 잊은 채 옷을 건네준다. 선녀는 그 옷을 입고 세 아이를 안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아내와 세 딸들을 그리워하는 나무꾼에게 사슴이 다시 찾아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두레박에 실려 올라간 나무꾼은 아내를 찾고 상상하지도 못한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나무꾼은 홀로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보다 못한 선녀는 내려가게 해 주나, ‘무슨일이 있어도 말에서 절대 내려선 안된다’는 경고를 잊으면 하늘나라에 영영 돌아올 수 없음을 신신당부한다. 나무꾼은 굳게 다짐을 하고 어머니를 찾아 간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자 너무 반가운 나머지 말에서 내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나무꾼은 내릴 수 없다. 어머니는 호박죽을 끓여 아들을 먹이려고 가지고 온다. 마침 그 뜨거운 죽이 말의 발등에 떨어지고, 말이 뜨거워 날뛰는 통에 나무꾼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말 만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나무꾼은 영영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

 

· 저자의 해석

지상의 인간과 초인간적인 여성과의 결합

가볍게 날아다니며 땅 위에 잠깐 빛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붙잡기 힘든 선녀의 특징은 영혼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이는 민담의 주인공인 나무꾼의 ‘아니마’ 역할

나무꾼이 잃어버린 자기의 반쪽을 찾을 때까지 정신의 세계의 어느 구석진 어둠 속에 ‘자율적’으로 도달 가능한 장소에 오르내린다.

심적 기능이 의식화될 가능성이 있다.

자아가 이 존재를 깨닫게 되려면 ‘사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 ‘사슴’을 쫓는 사냥꾼은 사실은ㄹ 자아의 어느 무의식적 기능일 수 있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 : <분석심리학> 中

남성과는 그렇게 다른 심리를 지니고 있는 여성은 남성이 전혀 눈뜨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원천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영감을 의미한다. 남성을 훨씬 능가하는 여성의 예감 능력은 남성에게 유익한 경고를 주며 개인적인 것에 관심을 둔 여성의 감정은 남성에게 그가 지니고 있는 별로 개인적으로 관계되지 않은 감정으로는 찾기 힘든 길들을 가르쳐 줄 수 있다. - ‘자아와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융의 말.

 

남성은 대체로 사회적 관심이 많은 반면, 여성에게는 구체적인 개인의 감정이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의 모상, 원형으로서의 ‘어머니’는 산출력있는 대지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기도 하나 또한 죽음을 포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무의식적인 것, 비합리적이며 영원한 것에 연계되어 있다.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고 부른다. 이때 말하는 남성적, 여성적이란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보편적, 원초적 특성을 말한다.

경험적 관념. 투사되어 경험될 때 인지될 수 있는 것.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천상의 배우자’가 ‘마음’의 상징적 표현.

“아니마나 아니무스는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성에 관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그것은 남성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경험의 총화이며 여성에서 남성에 대한 경험을 통튼 것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인간 정신 속에 전승된 여성적 요소, 전승된 남성적 요소이다. 이리하여 남성에서의 아니마는 ‘기분’,‘정동’으로 나타나고 아니무스는 ‘생각’,‘의견’으로 나타난다.

아니마 원형이 지니고 있는 ‘기분’의 성질은 어둡고 밝은 여러 뉘앙스를 띠고 있어서 꼭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마는 마치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처럼 붙잡기 어려운 존재이다. 다시 말해 의식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남성의 꿈속에 황홀한 감동을 주는 이름 모를 여인, 어두운 베일에 싸인 귀신같은 노파, 때로는 청순한 소녀의 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성이 외계에 관심을 두면 둘수록 그의 아니마는 독선적 감정, 고집 불통의 정열이라는 특징을 띠며 하나의 여성상에 집약한다.

부정적인 아니마는 자신이나 타인을 깎아내리는 작용을 한다. 다른 측면은 남성들로 하여금 지적 유희에 사로잡혀서 삶의 생기와 자발성을 무의미한 현학적 사고로 희생시키는 데 있다.

페르조나가 외부 세계와 자아를 연결하는 관계기능이라면 ‘마음’은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으로 눈을 돌리게 하며 그 깊은 층으로 인도하는 관계 기능이다.

훌륭한 사람의 일생을 보면 대개 그 뒤에서 그를 인도한 유명, 무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성 오거스틴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그녀들은 아니마 원형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주인공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는 그러한 존재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그러한 요소를 우리는 아니무스, 아니마 원형에서 발견한다. 우리가 이러한 원형과 더불어 친숙해지고 동시에 그 영향에 맹목적으로 자기를 맡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자기실현의 가장 큰 난관을 통과하는 것이 된다.

 

· 논의하고 싶은 점

선녀와 노모의 관계 : 긍정적인 아니마와 부정적인 아니마

노모가 호박죽을 떨어뜨린 사건 : 부정적인 아니마의 유혹

무기력한 나무꾼 : 현실의 나와 무의식을 통합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남성상

세 아이 모두 여성이었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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