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소개·서평

제7대 죄악, 탐식

by Ddak daddy 2017. 1. 18.




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평점 :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뉴스를 읽다가 경악했다. 뉴스의 주된 내용인즉, 살이 일단 찐 후에는 어떻게든 살을 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찌기 전에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세상에나... 전세계 다이어터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많은 다이어트에 실패했던 것인가 싶기도 하고. 삼순이 말처럼 '세상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것이 운명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쉽다. 많이 먹지 말고 맛있는 것을 조금만 먹으라고. 어떤 여자 연예인은 '딱 세 입만 맛있다'고 말하며 그 뒤로는 맛이 없으므로 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 그 프로를 함께 시청하던 나와 친구 모양을 코웃음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맛있는 음식일수록 더 많이 먹게 되지 않던가. 입에 쓴게 몸에 좋다는 건 상식이지만 입에 달면 손이 더가는 것 역시 상식이다. 미식은 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이 미식과 대식, 나아가 먹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욕망인 탐식은 그래서 인류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아주 긴밀한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나보다. '식'이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탐식'의 역사 또한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할 게 없다. 프랑스 역사학자 플로랑 켈리에는 이 탐식의 역사에 주목했다. 그런데 그냥 많이 열렬히 먹어치운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다. 탐식을 죄라고 규정한 유럽의 종교 사회에서 유럽인들은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배부름과 맛'의 세계에 어떻게 탐닉해 왔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 역시 종교적인 엄격함과 그 속에 은밀히 자리해온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제7대 죄악, 탐식] 이다.






책은 중세의 신학자들이 규정한 '탐식은 죄'라는 명제에 대한 해설로부터 출발한다. 성경 어디에도 탐식이 죄라는 부분은 없었다. 먹어선 안될 음식을 구분한 하나님의 법은 신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어느새 먹는 것을 탐하는 것이 곧 죄라는 해석으로 귀결되고 이러한 신학자들의 규율은 이후 유럽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프로테스탄트 문화인 북유럽과 가톨릭 문화인 남유럽에서 식사와 미각적 쾌락의 관계는 여전히 다르다. 덴마크에서 돼지고기는 맛보다 유연성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사회학자 클로드피슐러가 진행한 최근의 조사(2008)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잘 먹는다는 개념을 쾌락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식품의 산지와 연결시키는 반면 영국에서는 영양분과 비타민, 약으로서의 식품에 연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본문 p85~86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먹는 것을 신분에 따라 나뉘었다. 평민들은 언제나 배를 곯았던 탓에 '코케뉴'라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민담이 널리 퍼졌다. 반면 귀족들은 무한정 먹고 살을 찌우는 것으로 미덕을 삼았다. 특이한 것은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 역시 귀족처럼 엄청난 식탁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탐식을 죄로 정의하는 규율에 많은 해석의 차이를 용납해, 식문화가 비교적 자유로왔던 가톨릭 시대는 15세기를 지나면서 금욕적이고 원칙적인 개신교와 부딪힌다. 탐식에 관대했던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유럽의 탐식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이후 점차로 '대식'은 경멸 당하고 '미식'이 사회 주류들에게 각광을 받으며 오늘날에 이른다.

 




저자는 2000년에 걸친 유럽 탐식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를 위해 문학, 미술 등의 자료들을 꼼꼼히 열거하고 인용한다. 특히 책에 실린 선명한 미술작품들은 음식에 탐닉해온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재미있는 점은 그간 중세 미술작품들 대부분이 아름다움이나 위용, 감동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책에 실린 탐식의 그림들은 전반적으로 감동보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게 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음식에 심취해 정신없이 먹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울 턱이 있나. 그들 스스로 죄라고 못박은 탐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고발당하고 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방탕한 대식과 16세기 이후 발달한 미식 문화가 이미 지나간 역사라고만 할수는 없다. 탐식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거리에 가득찬 온갖 음식점과 티비 광고에서 연이어 흘러나오는 식품 광고들. 신문과 잡지 심지어 블로그마다 맛있는 음식점과 먹음직스런 식품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마시고 씹고 먹고 즐기길 열렬하게 권하는 한편에선 건강을 위해 살을 뺄 것을 걱정하는 이 사회가 두툼한 살집을 자랑해야 아름답다고 여겼던 유럽 중세와 크게 다를 것이 무언가.

 

 




식욕과 미각적 쾌락이라는 섭리는 본능적인 신체적 욕구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는 신성한 명령에 부응하는 셈이라고 했다. 예수회 신부 뱅상 우드리가 서술한 내용도 이와 유사하다.

"자연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하게끔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이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식물의 섭취는 미각의 쾌락과 연관되어 있는데, 미각의 쾌락이 없었다면 약을 먹을 때 느끼는 혐오감을 음식을 먹을 때에도 느꼈을 것이다."

본문 p99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먹는 즐거움이 인간으로서의 다른 존엄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죄가 아닐까. 먹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든 삶이 먹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칠면조 두 마리를 먹어치우고 저녁 식사를 하러가는 왕이나 좋은 식재료와 요리법, 훌륭한 쉐프들을 줄줄이 꿰면서 그와 같은 해박한 식견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은 저급하다고 폄훼하는 미식가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제7대 죄악, 탐식]은 '먹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본능적이고 절대적인가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디까지 사람을 추하고 방탕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 맛(식)을 사랑은 해도 맛에 미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