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냉장고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서 창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는 그 얼음을 꺼내어 사용했다.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를 <빙고>라고 했다. 우리집 강아지 이름과 같다.
옛날부터도대체 겨울 얼음을 여름까지 보존한다는게 말이 된다굽쇼? 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 얼음을 집에 들고오면 반나절도 안 되서 다 녹는데 이게 여름까지 보존된다규?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실험을 해본 사람이 있나보다. 장동순 교수라는 사람의 실험에 의하면 석빙고에서 얼음을 보관했을 때,
- 석빙고에 얼음을 꽉 채우고 6개월 경과 : 얼음량 48.2% 잔존
- 석빙고에 얼음을 꽉 채우고 짚을 채운 후 6개월 경과 : 얼음량 81.6% 잔존
- 석빙고에 얼음을 50%만 채우고 6개월 경과 : 얼음량 61.6% 잔존
- 석빙고에 얼음을 50%만 채우고 짚을 채운 후 6개월 경과 : 얼음량 99.6% 잔존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짚을 충전해서 잘만 보관하면 겨울 얼음을 여름까지 거의 손실없이도 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왕 굿 ㅋㅋ
서울에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 있다. 당삼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동빙고와 서빙고의 흔적이다. 동빙고의 얼음은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왕가/양반 등이 썼다. 썼다고는 하는데 어떤 용도로 썼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음식의 보존용도가 강했을지 아니면 이래저래 냉면이나 나박김치 같은 것에 동동 띄우거나, 얼음물로 음료수를 만들어먹었을지 모를 일이다. 먹는거야 그렇다고 치고, 제사 용도로 사용하던 동빙고의 얼음은 뭐에 썼을까? 제사상에 얼음을 올려놓지는 않았을텐데. 음식료 보존용이었을까?
동빙고와 서빙고 모두 나무로 만든 <목빙고>라서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석빙고로 남아있는 것은 경주 석빙고부터 생각하는데, 이것도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지었던 것을 증축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경주 이외에 안동, 청도, 창녕 등에도 석빙고가 남아있다. 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62868 사진과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포스팅에 의하면 지방에 있는 석빙고들은 모두 특산물을 서울에 상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안동의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를 서울까지 진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고는 하는데 더운 여름에 찬 얼음을 보면 먹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서, 지방에서 행세 깨나 하던 양반님들이라면, 여름에 얼음 한두 번 얻어먹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직접 얼린 얼음이 위생상 좋지 못하던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보존용으로만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얼음을 캐는 일은 부역 중에도 가장 힘든 부역의 하나였다고 한다. 일이 고되고, 동상 걸리는 것은 기본이고, 얼음을 깨다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일도 잦았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런 사례도 있다.
한강 가의 주민들이 서빙고(西氷庫)를 불태웠으므로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 적간(摘奸)하였다. 강가의 주민들은 폐조 때부터 얼음 저장하는 고역(雇役)을 기화로 이득을 취하며 국고의 곡식을 훔쳐 먹어 왔는데, 이제 간사하게 외람한 짓하는 것을 금단하자, 이득을 놓치게 된 것을 원망하여 밤을 틈타 불을 지른 것이다. |
일제시대의 얼음
냉장고가 발명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기술은 아니었는지 전세계적으로 빠르게 도입되었고, 우리나라에도 1910년대에는 부산, 군산 등 주요 항구도시에 제빙회사가 생겼다. 얼음공장이 세워진 곳은 주로 수산물을 가공/유통해야하는 해안 지방이었다. 그러나 얼음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이전에도 대부분의 강변에는 천연빙을 보관하는 회사들이 존재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을 주워왔는데, 한강다리로 보건데 해방 후의 사진인 것 같다. 일제시대의 채빙 광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경성천연빙회사에서 목표 12,000톤 중 7,000톤만 캤다는 이야기인가? 아무튼 1922년 2월 말에 이렇게 올해의 얼음캐기를 끝냈다고 한다. 한강변 중에는 얼음의 위생상태 등을 문제 삼아서 정부의 허가를 맡은 얼음회사만 천연빙 채취권을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조치의 이면은 2개의 일본 회사에 특혜를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대에 큰 얼음회사는 경성천연빙회사와 조선천연빙회사, 두 개였는데 이 두 개의 일본인 회사가 전체 채빙의 80%를 독점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5003781 그러나 한강변 뿐만 아니고 여러 강변에서 모두 얼음을 캐고 보관했다.
1937년의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몇 가지 재밌는 이야기가 보인다. 당대 신문기사 답게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는 가운데 (그러니 이광수나 김유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런 신문기자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능 -_-) 대략 행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 작년도에 천연빙은 위생상 좋지 못하므로 채취를 금지시켰다
- 아이스케잌, 아이스크림, 청량음료수, 사이다 등이 여름에 흔한 음료였다
1938년 기사도 재밌다. 신의주에서는 여름에 하루 10톤 가량의 얼음을 소비했는데, 이것을 천연빙으로 제조했었지만 공업발달로 인한 '협잡물' 때문에 먹고 마실 수가 없어서 이후로는 제빙공장에서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1936년도에도 위생상 좋지 못했다고 금지된 천연빙은, 그러나 1960년대까지도 계속해서 몰래 채취되었다.
천연빙의 주목적은 음식의 부패 방지용이었겠지만, 여름에 얼음을 보면 먹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인조빙보다 값이 쌌기 때문에 아이스케키며 화채며 냉면이며 이런저런 차가운 음식에 많이 사용되었겠지. 1950년대까지는 위생용/냉장용/식용으로 계속 사용되었고, 그러면서 배탈도 많이들 나고 수인성 전염병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인조 얼음 대신 쓰지말라는 천연빙을 몰래몰래 쓴 것은 값이 싸서였을 것이다. 주영하씨는 인조빙의 탄생이 냉면의 여름음식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나는 조금 의견이 다르다. 많은 냉면집들이 값싼 천연빙을 더 많이 이용했고, 그래서 해마다 신문을 떠들썩하게 했던 냉면 식중독 사고에는 천연빙의 병균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했을 듯 하다.
한강에서 얼음 채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60년대 중후반 경으로 보인다.
1975년도의 기사인데, 이제는 한강변에서 얼음도 안 보이고 황금 모래를 캐는 채취선의 굉음 같은 것도 들리지 않으니 또 한번의 시대변화를 느낀달까낭;;
미국의 얼음산업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더. 미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고 얼음은 추운 시절에 강에서 채취한 다음에 창고에 보관하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그런데 얼음이 조금씩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미국은 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것이 대단히 유망한 산업이었다. 얼음왕이라고 불리우던 사람이 프레드릭 튜더(Frederic Tudor)인데 그는 1806년에 처음으로 메사추세츠의 얼음을 캐러비안의 Martinique (뭐라고 읽어야 하는 섬인지...)에다 수출했다고 한다. 아마 산업용 얼음이었던 것 같다. 아래 내용은 위키에서 대략 요약해본다.
얼음을 나르는 일은 쉽지 않았던 모양. 1810년까지는 3주간의 항해동안 녹아내리는 얼음 때문에 오히려 손해만 보다가, 1810년부터 처음으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1815년에는 쿠바 하바나에 새로운 얼음 보존용 창고를 가지되었고, 이맘때부터 제대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음을 보냈던 배에다 돌아오는 길에 열대과일을 가득 싣고 15톤의 얼음과 3톤의 짚으로 냉장해서 와봤는데, 과일이 다 썩어버렸다는 듯.
그래도 그런식으로 야심차게 실험을 계속 한 결과 점점 운송과 보관의 효율성이 좋아졌다. 그는 1833년에는 얼음을 인디아에 팔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5월 12일에 메사추세츠를 출발한 배는 9월에 캘커타에 도착했는데, 모든 사람들은 튜더가 아주 고난이도의 자학적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180톤의 얼음 중 100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고. 그래서 향후 이십년간 인도에 얼음을 수출해서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얼음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한때 북아메리카의 대단한 유망 산업으로 인정되던 중, 최초의 인공제빙공장이 1868년에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세워지고, 급속하게 세를 불려간다. 효율성을 증진시켜가며 버티던 자연빙 산업은 1890년 경에는 인조빙에 밀려서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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